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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성공은 위험할 수도 있다”

진은숙(陳銀淑, 1961~ ), 꿈꾸는 현대음악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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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숙은 1961년 경기도 파주와 김포에서 개척교회를 일구던 목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음악평론가 진회숙, 남동생은 미학자 진중권이다. 진은숙이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977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언니 진회숙은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로맨티스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음악과 문학에 대한 타고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오늘의 클래식
김성현 저 | 아트북스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한다.
진은숙

2007년 6월 30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1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초연한 것이다. 이 극장의 음악감독인 일본계 미국인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지휘봉을 잡고, 『M 버터플라이』를 쓴 중국계 미국 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대본을 맡아서 ‘아시아계 3총사’가 나란히 독일 음악계의 중심에 입성했다. 이 작품은 같은 해 독일의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가 세계 평단을 대상으로 조사한 ‘올해의 초연 작품’에 오르기도 했다.

2007년 독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

진은숙은 1961년 경기도 파주와 김포에서 개척교회를 일구던 목사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음악평론가 진회숙, 남동생은 미학자 진중권이다. 진은숙이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977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언니 진회숙은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로맨티스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음악과 문학에 대한 타고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작곡가 진은숙이 두 살 때 교회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왔고, 네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악보 읽는 법 같은 기초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언니 진회숙은 “자식들에게 일찌감치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는 아버지의 못 말리는 교육열은 우리의 경제 사정을 능가할 정도로 강렬했다”고 썼다.

진은숙은 교회 예배의 피아노 반주를 맡았고, 이 경험을 통해 서양음악과 처음 만났다. 작곡가는 “찬송가를 부르다가 감동을 받으면 사람들의 음정이 조금씩 올라갔고, 그때마다 조옮김을 해서 연주했다. 화성의 원리에 눈뜨는 방법이 됐다”고 말했다.

작곡가 스스로 “가난보다 심한 궁핍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이들 자매는 언제나 음악에 목말라 있었고 당시 방송국 주최로 열린 가족대항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했다. 1등 부상은 텔레비전, 2등상이 전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진출한 이들 가족은 “제발 1등만은 면해야 할 텐데”라고 빌었다. 결국 심벌즈 소리와 함께 결과가 발표됐을 때 상대팀 가족의 점수가 더 높았고, 방송 도중에도 동생 진은숙은 “언니, 전축이야, 전축!”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뒤 이들 자매는 용돈을 모으는 대로 음반을 사서 닳고 닳을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음반이 레코드점에서 처음 구입한 음반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독학하던 진은숙은 학교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작곡을 꿈꾸기 시작했다. 악보를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아 차이콥스키와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를 베끼면서 공부했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은 작품 전체를 통째로 필사했다.

이화여대 음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언니의 책을 보면서 진은숙은 화성법과 대위법, 음악이론을 틈틈이 공부했고, 초등학생 때부터 결혼식장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음악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진은숙은 대학 입학시험에서 두 번 낙방한 뒤 ‘삼수’ 끝에 1981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다. 그는 “고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레슨을 받은 적이 없으니 실기시험에 붙을 수가 없었다. 답안 쓰는 방법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졸업 정원제’로 입시 방식이 바뀌는 바람에 혜택을 봤다. 솔직히 여자 정원이 1명 미달이었던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소프라노 조수미와 동기인 진은숙은 대학에서 은사인 작곡가 강석희 교수를 만났다. 강 교수는 19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으로 꼽히는 「원색의 향연」을 발표했으며 1969년부터 현대음악제를 개최해서 서구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강 교수는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된 뒤 이듬해 병보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작곡가 윤이상을 만나서 사사했고,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간 뒤에도 이들 사제(師弟)의 연은 계속됐다. 1982년 서울대에 부임한 강 교수의 첫 제자가 진은숙이었다. 스승 강 교수는 “원래 내가 해서는 안 될 비판도 서슴지 않는 사람인데 진은숙의 경우는 그럴 구석을 찾기 어려웠다”고 기억했다.

강 교수의 소개를 통해 진은숙은 슈토크하우젠과 불레즈,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의 음악을 접했고, 스승이 주관한 현대음악제에도 피아니스트로 두 차례 참가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 캐나다 ISCM 세계음악제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에서 착상을 얻은 「게슈탈텐(Gestalten)」으로 입선하는 한편, 이듬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가우데아무스 작곡 콩쿠르에서는 3대의 첼로를 위한 「스펙트라(Spektra)」로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음악에서 윤이상과 강석희, 다시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급진적 모더니즘의 계보가 탄생한 것이다. 진은숙은 “(선생님을 통해서) 스트라빈스키에서 멈춰 있던 현대음악에 대한 지식을 넓혔고 전자음악에도 눈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은숙은 1985년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을 떠났지만, 문화적 충격과 함께 작곡가로서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스승 리게티에게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3년간 단 한 곡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진은숙은 “스승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쓰라고 닦달했지만, 그게 어디 매번 써지는가. 하도 괴로워서 보드카를 잔뜩 마시고는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공원에서 차라리 얼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상상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격한 자기비판을 통해 진은숙은 “작곡가는 마음속에 괴물이 하나씩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훗날 그 시기에 대해 “너무 이른 성공은 거꾸로 위험할 수도 있다”고 위트 있게 표현했다. 진은숙은 리게티가 말년에 오페라로 쓰기 위해 심혈을 쏟았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2007년 완성하면서 스승의 못다 이룬 위업을 완성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 역을 맡은 소프라노 샐리 매튜스

1988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진은숙은 1991년 「말의 유희 」를 발표하면서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내 음악은 내 꿈의 반영이다. 나는 꿈에서 보는 거대한 빛과 화려한 색채에 대한 환상을 작품에 투영하고자 한다”는 작곡가의 말처럼 꿈과 언어, 동화와 환상, 음색은 초기부터 진은숙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인도네시아 가믈란 음악부터 전자음악까지 폭넓게 받아들이면서도, 때로는 유럽의 음악가들보다 더욱 유럽적으로 보일 만큼 급진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세계를 선보였다.

특히 지휘자 나가노는 1999년 4명의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간의 거울」을 런던 필하모닉과 연주하면서 진은숙과 음악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진은숙은 2001년 나가노가 당시 상임 지휘자로 일하던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작곡가를 맡았고, 나가노는 2002년 바이올린 협주곡부터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현악곡 「로카나」에 이르기까지 5곡을 세계 초연했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은 2004년 그녀에게 ‘작곡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안겨주면서 작곡가의 출세작이 됐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은숙은 2006년 지휘자 정명훈의 초청으로 서울시향의 상임 작곡가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국내에서 현대음악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프로그램 기획과 해설, 진행까지 ‘1인 3역’을 도맡아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 시리즈를 시작하고, 젊은 작곡가를 위한 무료 레슨과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 것이다. 현대음악의 ‘전도사’이자 ‘교육자’를 자청한 의욕적 행보에는 어린 시절 힘들게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다.

‘아르스 노바’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세계 초연 4곡, 아시아 초연 36곡, 한국 초연 22곡 등 풍성한 기록을 쏟아내면서 작곡가가 직접 현대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맡는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반면 티켓 판매가 저조해 대중적으로 난제(難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어렵다’와 ‘어렵지 않다’는 기준만으로 예술작품을 나눌 수는 없다. 특히 예술작품은 인정을 받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작곡가의 믿음은 확고하다.

서울시향의 아르스노바 시리즈를 이끌고 있는 진은숙

작곡가로서도 진은숙은 2009년 영국의 명문 음악제인 BBC 프롬스에서 첼로협주곡을 발표하고,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생황 협주곡을 선보이는가 하면,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실내악단인 앙상블 모데른이 「구갈론」을 초연하는 등 대작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들이 한 해 3개 대륙에서 그의 곡을 연주한 셈이다.

초기에 19세기 낭만주의의 관현악 전통에 불편함을 느끼고 소편성 앙상블이나 전자음악적 실험을 선호했던 작곡가에게 대형 오페라와 전통적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작(大作)은 또 하나의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일정이나 작품 규모만이 아니다. 2009년 동양 악기인 중국의 생황을 처음으로 작품에 도입했고, 2010년부터 다시 전자음악을 화두로 삼아서 프랑스 현대음악의 산실인 이르캄(IRCAM)에서 공동 작업을 하면서 일대 전환을 맞고 있다. 그동안 음악적 이국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며 거리를 두었던 아시아의 전통 악기와도 정면 승부를 택한 것이다. 한국 현대음악계에서 급진적인 흐름을 잇고 있는 진은숙이 21세기 한국 현대음악의 향방을 가름 할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은 ‘유쾌한 역설’이기도 하다. “그녀는 막 집을 떠났다. 그녀는 이동 중이다”라는 비평가 폴 그리피스의 말처럼, ‘현대음악의 앨리스’ 진은숙의 여정도 어쩌면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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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다. 예술의 전당 월간지에 현대 음악 작곡가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서 음악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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