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는 달랐다. 모든 게 달랐다. 1970년대 초중반에 빨간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것부터 격식과 틀을 강요하던 당시로 볼 때는 파격이었다. 솔직히 이런 건 2011년 지금의 젊음에게도 범상치 않은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패셔니스타’였던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시건방지게도’ 콧수염을 길렀다는 사실! 분명 그 시절 어른의 눈에는 삐딱한 반항의 젊음으로 비쳐졌지만 당시 군사독재시대의 숨 막히던 청춘들은 이장희로부터 자유와 일탈의 자그마한 쾌감을 맛보았다.
가장 달랐던 것은 노래였다. 이장희 노래는 누가 들어도 잘하는 노래, 뛰어난 보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삼촌 친구였던 그리고 자신을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조영남은 그를 음치라고 놀렸다. 이장희의 진면목은 가창력이 아니라 음악이 주는 그만의 각별한 분위기, 은밀하고 불길하면서도 틀을 박차고 나와 실제와 맞닿은 리얼하고 자유로운 느낌에 있었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아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 「그건 너」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다느니, 종일토록 전화번호판과 씨름했다느니,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 운운해대는 것은 당대 노랫말 패턴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추상적이고 시적인 가사들이 만연하던 시절에 이장희는 당시 젊은이들이 말하고 접하는 현실을 그대로 노래로 옮기는, 이를테면 자유로운 구어체 어법을 들이댄 것이다. 그것은 센세이션이었다.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은/ 반쯤 찬 술잔위에 어리는 얼굴/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 「한잔의 추억」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고 유신정권에 의해 자유가 억압되던 그 서슬 퍼런 시절에 마시자고 외치는 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상상해보라. ‘마시자’에 이은 ‘마셔버리자’는 실로 일탈의 방점이다. 그것은 곧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겠다는 반발이요 반항에 다름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장희의 골든 히트곡들은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1975년 대마초파동과 가요검열에 걸려 대부분 방송과 음반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대마초 사건과 연루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대마초가수로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음악적으로 더 남들과 다른 게 있다. 이장희의 빛나는 명곡들 「그건 너」와 「한잔의 추억」을 비롯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편지」, 「그 애와 나랑은」, 「자정이 훨씬 넘었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창가에 홀로 앉아」, 「겨울이야기」 등은 모두 자신이 직접 쓴 곡들이라는 사실이다. 포크시대가 열린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나온 젊은 스타들은 대체로 번안 곡에 의존했다. 「하얀 손수건」의 트윈 폴리오가 그랬고 「딜라일라」의 조영남이 그랬다. 하지만 이장희는 직접 자기가 곡을 써서 노래했다. 천재였다. 김민기와 한대수가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이장희가 조금 빨랐으며 두 사람은 주류의 인기가수가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화제를 모은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 이장희 스스로도
“당시 포크송 계에서 싱어송라이터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오토바이, 가죽재킷, 콧수염에다가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던 것으로도 충분한데 전성기 시절 그는 인기 최고였던 동아방송(DBS)의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의 디스크자키였다. (동아일보사가 운영하던 동아방송은 신문과 방송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군부의 1980년 언론통폐합 플랜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여성 팬, 학생 팬이 득시글했다. 물론 그는 인기 절정이던 때 이대출신의 모 방직회사 회장 딸과 결혼해 여성 팬들의 한숨을 샀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당시 열애 중이던 아내(나중 이혼)에게 바친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197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별들의 고향>에 사실상의 테마로 삽입되어 영화만큼 대박을 쳤다.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에 신성일과 안은숙이 주연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전곡을 쓴 사람이 이장희였다. 앨범에는 윤시내의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와 이장희가 낭송하는 「겨울이야기」 그리고 수작 「한 소녀가 울고 있네」도 수록되어있다. 그는 여기서 최고의 기타리스트였던 강근식과 짝을 이뤄 포크와 록을 결합시킨 이른바 ‘포크 록’ 사운드를 실험한다. 이 대목도 포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가요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음악분야에서 ‘모던한 청년문화’를 견인한 주체를 이장희라고 일컬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그는 포크적인 동시에 다분히 록적이었다. 활동규제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는 못했지만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와 1979년 「장미」로 한국 록을 개척한 위대한 밴드 ‘사랑과 평화’의 곡을 써주고 프로듀스한 사람 또한 이장희였다. 적어도 ‘사랑과 평화’ 전설의 한 부분은 그의 몫인 것이다.
대마초 활동정지 기간에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그는 한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LA에 들렀다가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로즈가든>이라는 레스토랑을 차려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일주일 공부해 연세대 생물학과를 입학한 천재답게 ‘사업수완’도 빼어났다. 음악에 대한 열정도 여전해 1988년에는 「솜사탕」과 대곡 「나는 누구인가?」라는 곡이 수록된 마지막 앨범을 발표했다. 언론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듬해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했다.
라디오코리아는 1992년 한국인들이 상당한 피해를 겪은 LA 폭동 때 비상방송으로 주목을 받아 미국 대통령 부시도 방문했을 정도로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2003년 12월31일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후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로 돌아와 현재 농부로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나이 스물하고 아홉 살엔/ 내 사랑을 나는 찾았고/ 언제나 사랑한 건 나의 아내, 내 아내뿐이었지/ 가끔은 두 주먹으로 벽을 두들겨댔지만/ 가슴 속엔 아직 꿈이 남아있었지/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난 그땐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할까/ 그때도 사랑하는 건 나의 아내, 내 아내뿐일까/ 그때도 울 수 있고/ 가슴 한 구석엔 아직 꿈이 남아있을까<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서 이장희가 부른 이 노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는 그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낸 지금의 기성세대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노래를 들은 한 50대는 “노래의 ‘가슴 한 구석엔 아직 꿈이 남아 있을까’ 하는 부분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모처럼의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어른만이 아니라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접하지 못해 호기심과 신선함을 느낀 일부 젊음 시청자의 가슴도 파고들었다. 자신의 심정을 진실하게 전달하는 노래, 감각과 패션에 물든 지금의 노래와는 판이한 인간적인 노래 앞에 무슨 세대차가 있으랴. 이장희의 노래들이 돌아왔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