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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여주인공의 독백 “신포니에타는…”

레오시 야나체크(Leoas Janacek, 1854~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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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체크의 음악을 훨씬 운치 있게 활용하고 있는 쪽은 소설가 밀란 쿤데라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이다. 외과 의사 토마스가 거침없이 연애 행각을 벌일 때에도, 『안나 카레니나』를 즐겨 읽는 여주인공 테레사가 상처 입을 때에도, 어김없이 야나체크의 실내악은 주제 음악처럼 화면을 감싼다. 무거움과 가벼움, 방황과 정착이 마치 제1주제와 제2주제처럼 얽혀 있는 이 영화에서 4명의 주인공은 4중주의 악기가 된다.

 
오늘의 클래식
김성현 저 | 아트북스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한다.
레오시 야나체크Leoas Janacek, 1854~1928

레오시 야나체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는 1984년 일본 도쿄의 수도고속도로에 올라간 택시가 극심한 교통 정체에 휘말리는 대목에서 출발한다. 여주인공 아오마메는 우연히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고, 문득 이렇게 중얼거린다.

야나체크의「신포니에타」첫 부분을 듣고 이건 야나체크의「신포니에타」라고 알아맞힐 사람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아주 적다’와 ‘거의 적다’의 중간쯤이 아닐까.

야나체크의 음악을 훨씬 운치 있게 활용하고 있는 쪽은 소설가 밀란 쿤데라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이다. 외과 의사 토마스가 거침없이 연애 행각을 벌일 때에도, 『안나 카레니나』를 즐겨 읽는 여주인공 테레사가 상처 입을 때에도, 어김없이 야나체크의 실내악은 주제 음악처럼 화면을 감싼다. 무거움과 가벼움, 방황과 정착이 마치 제1주제와 제2주제처럼 얽혀 있는 이 영화에서 4명의 주인공은 4중주의 악기가 된다.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실제 소설가 쿤데라와 작곡가 야나체크 사이에는 대를 걸친 인연이 있다. 쿤데라의 아버지는 야나체크의 제자였으며, 훗날 작곡가의 이름을 딴 야나체크 음악원의 원장으로 13년간 재직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소설가 쿤데라 역시 “내게 예술의 세계를 최초로 열어 보인 건 야나체크의 음악이었다”고 고백했다.

야나체크는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든 1904년까지도 체코 모라비아의 지역 작곡가에 가까웠다. 그해 지금의 체코에 속하는 브르노 극장에서 야나체크의 오페라 〈예누파〉가 초연됐다. 초연 한 해 전인 1903년에는 스무 살 난 딸 올가가 세상을 떠났고, 야나체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게 이 오페라를 헌정했다. “이 오페라를 나는 온통 검은색으로 칠했다. 우울한 음악은 내 마음과도 같다”는 편지에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 녹아 있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된 야나체크의 오페라 〈예누파〉의 한 장면

작곡가의 고향과 다름없는 브르노에서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수도 프라하 상연은 난관투성이였다. 남에게 쏜 화살은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비타협적이고 직설적인 음악비평가로 유명했던 야나체크가 겪었던 일종의 필화 사건 때문이었다.

17년 전인 1887년 야나체크는 작곡가 카렐 코바르조비츠 의 첫 번째 희극 오페라〈신랑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음악과 대본도 서로 맞지 않기에 오페라라기보다는 차라리 ‘음악과 함께 연주하는 코미디’라고 포스터에 적는 것이 낫겠다”는 구절은 지금 읽어도 상당히 원색적이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됐고, 코바르조비츠는 야나체크의 비판을 잊지 않았다.

1900년 코바르조비츠가 프라하 국립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1901년 드보르자크의 〈루살카〉를 초연한 이 지휘?는 〈예누파〉의 프라하 상연을 줄기차게 반대했고, 결국 브르노 초연 12년 뒤인 1916년에야 프라하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예순두 살이 되고서야 야나체크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관객과 평단은 1866년 스메타나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 초연 이후 반세기만의 체코 오페라 부활에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야나체크도 “아마도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감격을 표현했다. 자얽의 세 번째 오페라이자 첫 번째 걸작으로 꼽히는 〈예누파〉를 계기로 야나체크는 과거 「대장 부리바」로 번역됐던 관현악곡 「타라스 불바 」와 「신포니에타」, 현악 4중주 1~2번과 「글라골 미사」까지 봇물 터진 듯 숱한 걸작을 쏟아냈다. 드보르자크,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국민 작곡가’의 반열에 뒤늦게 오른 것이다.

야나체크는 1854년 체코 동부의 모라비아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빼어난 오르가니스트이자 칸토르(kantor)로 불리는 학교 교사였고,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게서 음악적 재능과 교사직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야나체크 역시 여섯 살 때부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고, 열여덟 살에는 사범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역 합창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를 마친 그는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피아노, 오르간과 작곡을 차례로 수학했다. 1881년 브르노로 돌아와 새로운 오르간 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됐고 1919년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간 몸담았다. 야나체크는 건반?합창?지휘 같은 기존 과목 이외에도 작곡과 음악이론을 추가했고, 체코 독립 이후에는 학교를 국립음악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앞장서며 왕성한 의욕을 보였다.

야나체크가 태어날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계몽주의 전제군주인 요제프 2세는 1784년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전역에서 독일어 공용화 정책을 실시했고, 체코에서도 학교의 체코어 문법 교육이 금지됐다. 공용어로서 체코어는 사멸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체코는 독일어를 쓰는 관료 및 부유층과, 체코 고유어를 사용하는 농민과 도시 빈민층으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학창 시절 피아노를 구입할 돈이 없어 탁자 위에 분필로 건반을 그려놓고 바흐의 전주곡을 연습했을 정도로 가난한 교사 집안에서 자라난 야나체크가 체코인으로서 뚜렷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야나체크는 13년 연상의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현악 세레나데」와 「스타바트 마테르」 등을 일찍부터 지휘했고, 1870년대 프라하에서 처음 만난 뒤부터는 평생 교유하며 조언을 구했다. 1885년 야나체크에게 남성 합창곡 4편을 헌정받은 드보르자크는 “독창적이면서도 진정 슬라브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 어떤 구절은 마법 같은 효과를 낸다”고 격려해주었다.

야나체크는 드보르자크와 스메나타 등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고향 모라비아의 민요를 채집하면서 고유의 창작론인 ‘말소리 선율(speech melody)’을 발전시켰다. ‘말소리 선율’이란 체코인들이 사용하는 실제 언어의 발음, 억양, 강세에서 선율의 흐름을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요 채집에 나선 야나체크는 “모라비아의 민속 무곡을 지체 없이 수집하는 것은 우리의 성스러운 의무”라고 단언했다. 그보다 뒤에 헝가리 민요 채집에 나섰던 후배 버르토크와 세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고, “슬라브의 노래에서 인용하지 않았다면, 벨러 버르토크의 작품은 건조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후고 볼프와 막스 레거 등 당대 독일 작곡가보다 일찍 태어난 야나체크가 바그너의 세례를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야나체크는 “화성적 진행에서 바그너는 독창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끝없는 변화와 진행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고 썼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1920년대 그의 악곡은 스트라빈스키, 버르토크, 힌데미트와 나란히 현대음악 연주회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이들보다 30~40년은 연상?었다. 청년기엔 고독한 보수주의자였다가, 늙어서 개혁가가 된 셈”이라고 적었다.

야나체크의 가정사는 아내와의 끝없는 불화로 점철되어 있었다.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이자 체코 독립 지지자였던 작곡가에게 독일계 상류층이라는 처가의 배경이 그리 달가울 리 없었다. 이혼과 재결합 등 갖은 우여곡절을 거쳤으며, 1890년 두 살 난 아들 블라디미르에 이어 1903년 딸 올가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들 부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다.

작곡가의 인생 후반부에서 연모의 대상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는 1917년에 만난 카밀라 스퇴슬로바였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스물다섯 살의 유부녀였고 작곡가에 대한 감정도 애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정에 가까웠지만, 야나체크는 “당신은 내 작품 속에 언제나 존재하오. 순수한 감정, 헌신, 진실, 열렬한 사랑”이라며 그녀에게 무려 7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훗날 쿤데라는 “피카소적 노년”이라고 위트 있게 작곡가를 옹호했지만, 낭만적인 ‘그레이 로맨스’와 영락없는 주책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현악 4중주 1~2번과 오페라 〈카탸 카바노바〉에 영감을 제공하고, 야나체크가 폐렴으로 숨을 거둘 때 곁에 있었던 사람도 스퇴슬로바였다. 타계하던 해인 1928년에 완성한 현악 4중주 2번「비밀 편지」에 대해 야나체크는 “전작들은 추억에만 의존했다면, 이번 작품은 감정이 활활 불붙고 있는 동안 씌어졌다. 이에 비하면 이전 작품은 뜨거운 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결혼 직후의 야나체크 부부와 1917년 처음 만났을 무렵의 카밀라 스퇴슬로바와 그녀의 남편

야나체크는 〈예누파〉초연을 기점으로 오페라 〈카탸 카바노바〉 〈마크로풀로스 사건〉 〈영리한 새끼 암여우〉같은 걸작을 쏟아내면서 체코의 이전 낭만주의적 전통을 넘어섰다. 음악비평가 폴 그리피스는 “그의 후기작들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의 체코 낭만주의 양식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의 간결한 선율적 악상의 다양성과 강한 힘은 교묘한 화성과 합쳐져서 극적 상황을 강화하고 극중 인물들의 행동 동기를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평했다.

야나체크는 1927년 독일 베를린에서 쇤베르크, 힌데미트와 함께 프러시아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말년에 톡톡한 인정과 보상을 받았다. 오토 클렘페러가 그의 「신포니에타」를 베를린과 뉴욕에서 지휘한 것도 같은 해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바탕한 오페라 〈죽은 자의 집으로부터〉의 3막 원고는 숨을 거둔 직후 책상에서 발견됐다.

타계 두 달 전에야 오페라 작곡을 마친 야나체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저절로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이제 더 이상 여기서 펜을 잡지는 않을 것 같다.” 평생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예외로서 굳건하게 살아남은 작곡가가 바로 야나체크였다. 소설가 쿤데라는 “이 작은 나라(체코)는 역사상 그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를 가진 적이 없다”는 말로 부친의 스승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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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다. 예술의 전당 월간지에 현대 음악 작곡가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서 음악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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