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고 구구절절하면 지는 거야
‘지루한 글쓰기’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같은 불굴의 백수처럼?
“불굴의 백수처럼 써라.”
인상적인 글을 쓰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다. 그냥 ‘백수’가 아니다. ‘불굴의 백수’다.
잠시 백수로 지낸 경험에서 체득한 교훈이다. 그때 나의 장난스런 좌우명은 이러했다. “심심하면 지는 거야.”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티를 역력하게 내거나 ‘무슨 건수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꼴은 저렴한 인간으로 추락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전화로 불러주기만 하면 언제든 즉각 ‘5분대기조’처럼 ‘출동’할 듯한 자세는 백수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철학이었다. 나는 놀면서도 바쁜 척 했다. 이런 ‘불굴의 백수정신’과 글의 운명은 닮았다. 정말, 심심하면 진다.
앞 부분일수록 빠른 리듬으로!
학창시절의 선생님들을 떠올려본다. ‘지루한 수업’에 강했던 분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수면을 유도했다. ‘유쾌한 수업’에 강했던 분들의 얼굴도 함께 지나간다. 점심시간 직후라도 눈꺼풀이 내려앉기는커녕 똘망똘망해졌다. 어떻게 졸리지 않도록 지루함을 타파할까. 세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 처음이 심심하면 지는 거다. 첫 문장도 중요하지만, 첫 단락도 마찬가지다. 앞 대목을 흔히 ‘리드’라 부른다. ‘리드’는 말 그대로 글 전체를 ‘리드’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닌 승부처다. 첫 대목에서 ‘뭔가 있다’는 인상을 결정적으로 주지 않으면 독자의 시선은 곧장 이탈한다. 더더욱 ‘단문’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들은 롱테이크를 잘 참아내지 못한다. 글의 앞 부분일 수록 빠른 리듬으로 문장을 전환해야 한다. 숏컷! 처음이 활기차야 전체가 활기차다.
둘째, 구구절절하면 지는 거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혹은 우리집 강아지조차 귀띔으로 알고 있을 당연한 말들은 절대 장황하게 나열하지 말자. 이거야말로 ‘심심 올림픽’의 금메달감이다.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생략하겠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알듯이” 등으로 툭툭 가지를 치는 편이 낫다. 가령 “요즘 친구들이 얼마나 학원 때문에 등이 휘는지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라는 식으로.
셋째, 머리 아프면 지는 거다. 다른 말로 하면, 비유가 없으면 지는 거다. 전문적이거나 낯선 이야기일수록 그렇다. 복잡한 논리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능력은 ‘창의력’에 해당한다. 그 창의력의 무기중 하나가 비유다. 어려운 고담준론을 생활 속의 가볍고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끌어오자. 연평도 포격사건을 ‘또라이 친구’에 빗대듯이.
‘언제, 어디서’를 뭐 그리 길게 늘어놓나
이런 관점에서 준석과 은서의 글을 읽는다. “이건 내가 유치원 때 겪은 일인데, 그때는 참으로 신기했다. 유치원을 다니던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니 어쨌든 크리스마스에 나는 산타에게 선물을 받았다. 내가 받기 전, 어떤 아이는 장난감을 좋아하는데….”(은서) “한창 신원당 아파트에 살 때였다. 엄마는 유딩들이나 믿을 괴담을 해주시곤 하였다. ‘지하로 내려가면 망태 할아범이 잡아간다!’”(준석)
산타할아버지의 진실을 폭로하는 글의 첫 대목이다. 따분하기 그지없다. 은서가 특히 그렇다. 뭐, 구미 당기는 정도가 0%다. 그래서 어쩌라고! ‘언제, 어디서’에 관해 뭐 그리 길게 늘어놓는가. 준석도 맘에 안 든다. “한창 신원당 아파트에 살 때였다”라며 역시 시공간 설명으로 시작한다. 쓸데없이 머뭇머뭇 어슬렁거릴 이유 없다. 핵심을 내포할 만한 엉뚱한 키워드를 들이대거나, 최소한 냄새라도 피워야 한다. 딴청 피우는 척하면서, 확 치고나가는 거다.(참 말은 쉽죠~잉)
심심한 글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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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계단을 달리는 소년’이 있다
엘리베이터 노땡큐!
준석이는 뛰어 내려간다. 13층이나 되는데도, 엘리베이터는 안중에도 없다. 위험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서너 계단을 한꺼번에 성큼성큼 뛰기에, 한 층씩 내려올 때마다 ‘쿵’하는 거대한 발자국 소리를 낸다. 아침 등교시간마다 한결같다.
엘리베이터보다 늘 빨리 1층에 도착하는 준석. 왜 그러느냐 물으면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이를 못 참다니! 나쁘게 말하면, 인내심이 없는 ‘이상한 소년’이다. 좋게 말하면, 지루함을 거부하는 ‘활기찬 소년’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빗대자면 ‘계단을 달리는 소년’이랄까(그러나 올라올 때는 절대 뛰어오지 않는다는 거 ㅎㅎ)
| 일요일엔 준석과 은서가 계단을 함께 뛰어 내려간다. 위험하니 따라하지 마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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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본래 뛰어다니기를 좋아한다. 왜? 걸어가면 지루하니까! 준석과 은서는 야외에서도 틈만 나면 서로 ‘잡기 놀이’를 한다며 망둥이처럼(!) 뛰어다닌다. 뛰면 스트레스가 풀리나보다. 호흡이 가빠지지만, 깔깔깔 웃음이 터진다. 그래 뛰자. 글도 이왕이면 뛰는 리듬감을 유지하면 어떨까. 준석아, 산타클로스의 비밀을………뛰면서 폭로해봐! 은서도 함께!
망태할아버지와 산타클로스
| 준석이 산타한테 선물 받는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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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려니, 망태 할아범이 생각난다. 추억의, 아니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금 이것을 믿을 사람은 없다. 뭐 하나 잘못하면 “망태 할아범한테 잡아가라고 한다!”라는 어른들의 말은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가끔 싫은 사람이 있으면 “망태 할아범이 잡아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유년에 있었고, 망태 할아범이 두려웠다. 이제 동양의 망태 할아범과 너무나 너무나 유사한 모습을 지닌 서양의 그분을 리뷰하겠다. 산타클로스!
둘이 뭐가 같냐고? 둘 다 망태(물론 용도가 다르지만)를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 또 할아버지라는 거. 다른 점도 있다. 아이들에게 망태 할아범은 귀신같은 존재로 여겨지지만,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겨진다. 또 망태 할아범은 나쁜 아이를 잡아다가 착한 애로 만들어주는 소년원 같은 사람이지만, 산타클로스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고 보상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항상 ‘순수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접근하여 다스린다. ‘순수한 방식’이란 것은 폭력과는 무관한, 동심을 자극하는 그런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엉덩이에 이름쓰기라던가. ‘이거 안 사줄 거야’ 라는 것 같은 협박(??) 등이 있지만, 아무래도 최고의 예는 ‘망태 할아범’ 이나 ‘산타클로스’ 이다.
내 생각에는 산타클로스가 더 최고의 예 같다. 더욱더 ‘동심’을 자극한 것에 대하여서 말이다. 날개 없지만 날아다니는 루돌프를 타고 다니는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
정말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것은 ‘착한’이다. 오직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는 소문이 나돈다. 우리 같은 청소년은 “에이 설마 나쁜 짓 해도 산타가 알겠어?”한다. 이상하게 아이들에게는 통한다. 어른들이 연극을 하기 때문이다.
그 연극의 대표적인 예가 ‘위장’이다. 내가 어릴 적, 태권도를 마치고 왔을 때, 친구들과 엄마가 있었다. 그 속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정말로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하늘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 저기 보이네 보여, 루돌프가 보이네!” 하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믿음은 무서울 정도로 굳건해진다. “산타클로스는 정말로 있다!”고.
하지만 사필귀정이다. 모든 일은 정상적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그때 사진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분은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고 산타 아저씨구나”라는 걸 느꼈다. 아주 세밀한 ‘검은 구렛나룻’ 때문이었다. 또한 가짜 수염을 고정시키기 위한 고무줄 선, 하얀 눈썹에 가려진 검은 눈썹. 늙으신 분은 개뿔, 아주 젊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당연한 거지만, 산타클로스나 망태 할아버지 따위는 없다. 아직도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있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멍청한 거고. 그들은 오직 ‘아이 교육 수단’일 뿐이다. 한번 보자. 뭐든지 ‘안 착해서’ ‘착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어른들은 말한다. “안 착하게 굴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가!” “착한 일만 가득 해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신다!” 그래놓고는 자기가 선물 다 사놓고 위장술을 한다. 고마운 거지만. 그분들은 ‘가상 인성 교육 담당자’ 라고 해야 할 듯 싶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만약 당신 옆에 산사모(산타클로스를 사랑하는 모임)에 가입한 아이가 있다면, 절대 이 글을 읽게 하지 말아라! 인성 교육을 위한다면. 또 아이의 동심을 깨고 싶지 않으시다면!(고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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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집게할아버지, 이젠 안 속아요
| 은서와 산타가 함께 있는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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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족집게 할아버지에 속은 적이 있다. 유치원을 다니던 12월 크리스마스이브였던가? 나는 산타에게 선물을 받았다. 내가 받기 전, 유난히 장난감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 아이한테 장난감을 주며 “너 장난감 좋아하지?”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반찬투정을 많이 하는데, 들통날까봐 초조했다. 선물을 받는데 정말 산타할아버지가 “너 반찬투정하지? 다 알아!”라고 말씀하셨다. 산타할아버지는 족집게 할아버지였다.
아이들은 산타가 있느니 없느니를 갖고 싸우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의 그 산타할아버지는 그냥 어떤 아저씨가 변장한 거였다는 거 안다. 족집게처럼 내가 반찬투정하는 걸 맞춘 것도, 유치원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 생활 모습을 보고 말한 것이다.
하긴, 진짜 산타일리 없지. 만화에서 보면 뻔하지 않나? 꼬마는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오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분장하는 거 보고 기대감이 급하강.
사실 말이 안 된다. 뭐 날아다니는 사슴, 날아다니는 썰매, 굴뚝으로 들어가는 거. 산타가 굴뚝에 들어가서 인간이 아니면 살지만, 인간이면 타 죽는다.
아이의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 몰래 밤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 사서 편지 써서 놓아놓고서는 “이거 산타가 널 위해 굴뚝으로 내려오셔서 갖다주신거야”라고 뻥을 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알겠다. 애들 울거나 싸우고 있는 거 말리기엔 효과가 짱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싸우다가 “이러면 산타가 안 오시지”라고 말하면 급착한척. 애 울고 있는데 “이러면 산타가 안 오시지”라고 말하면 바로 뚝.
나도 어른이 돼서 애를 낳으면 이 방법을 써 봐야겠다.(고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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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가 은서의 반찬투정을 맞힌 이유
은서 글은 여전히 지루하다. 두 번이나 도로 물리게 하고 구박을 하고 다시 쓰라고 했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글 도입부에서 ‘언제 어디서 벌어진 일인지’를 길게 설명한 부분을 쳐버리고, 중간에 배치해놓은 ‘족집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곧장 꺼내도록 유도했다. 대폭 ‘수리’했음에도 밋밋하다. 단순히 산타한테 속았다는 이야기만 했다. 초딩 저학년의 수준에서도 소화할 만한 내용이다.
글 속의 사실관계도 예리하지 못하다. “족집게처럼 내가 반찬투정 하는 걸 맞춘 것도, 유치원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 생활 모습을 보고 말한 것”이라는 분석은 잘못 짚었다. 사실은, 엄마가 은서가 받을 ‘산타 선물’을 유치원으로 보내며 앞으로 고쳐야 할 점을 적어줬는데 말이다. 은서에게 점수를 하사한다. (강아지에게 던지듯) 옛다 44점! 흑흑.
준석의 글은 여전히 재미있다. 은서와 마찬가지로, 첫 도입부가 마음에 안 들어 한 번 다시 쓰게 하긴 했다. 처음에 쓴 글도 영 ‘꽝’은 아니었다. 두 번째 원고에서 중복되는 여러 부분을 살짝 쳤을 뿐이다.
망태할아버지와 산타클로스를 동서양 대표로 비교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둘 다 망태를 들고 다닌다”거나 “망태 할아범뫀 나쁜 아이를 잡아다가 착한 애로 만들어주는 소년원 같은 사람이지만, 산타클로스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고 보상하는 사람”이라는 대목은 날카롭다.
준석의 글은 지루할 틈이 없다. 비유와 함께 ‘산타클로스 위장술’에 관한 분석과 관찰도 슬며시 들이댄다. 그럴 듯하다. 오랜만에 웃었다. 원고량이 조금 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준석에게 점수를 하사한다. (상을 수여하듯) 옛다 88점! 흐흐.
크리스마스의 계절이 왔다.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아챈 이상,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감동이 절반으로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크리스마스 선물을 조르지 않을 놈들은 아니다.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끌고 오건 말건, 캐럴에 맞춰 반짝이는 트리의 불빛에 준석과 은서의 가슴은 마구 뛴다. 이브의 밤을 밝히는 케이크 초 불빛에도 뛴다…뛴다…뛴다.
오늘의 결론은 바로 그 두 음절이다.
뛰.자.
‘뛰는 감각’으로 글을 쓰자. 날렵하고 경쾌하고 시원하게 쓰자. 엘리베이터를 거부하고 13층에서 곧장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준석의 그 넘치는 활력을 그대로 글 속에 심어보기 바란다.
단지 속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문이 닫히기를 또 기다리고…내려가다 또 중간에 문이 열리고…또 닫혔다 열리고…마지막 1층에서 또 열리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심정. 그 심정을 남의 글을 읽다 느낀 적이 있겠지? 네가 쓰는 글에 ‘엘리베이터가 지루하게 열렸다 닫히는 듯한’ 대목이 없는지를 성찰해보기 바란다.
남들도 뻔히 알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면 ‘심심한 엘리베이터’가 따로 없다. 기분좋게 ‘쿵 쿵’ 계단을 울리며 뛰어 내려가듯, 보는 이들을 흥미진진하게 하고 호기심을 부추기면 읽는 이들의 가슴도 ‘쿵 쿵’ 뛴다.
그런데 말이다. 웬만하면 아침에 엘리베이터 좀 타면 안 되겠니? 급하게 뛰어가다 다칠까봐 겁나거덩. 아침마다 은근히 조마조마하거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