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Blur)’와 함께 ‘브릿 팝’의 대표 그룹으로 손꼽히는 ‘오아시스(Oasis)’. 1960년대의 로큰롤의 기본 방식에 ‘디스토션’한 사운드를 구현하고, 듣기 좋은 멜로디까지 얹은 ‘오아시스’만의 접근법은 곧바로 영국 록의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뛰어난 곡 이외에도 그룹은 멤버인 ‘갤러거 형제(노엘, 리암)’의 싸움으로도 유명했죠. 비틀즈의 환생으로도 불리는 오아시스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앨범입니다.
오아시스(Oasis)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1995)
오아시스가 브릿팝 국가대표인 것은 확실했다. 지나치게 영국색을 강조한 브릿팝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국내리그에서 벗어나 전세계를 침공한 것은 분명 국가대표급 역량이었다. 그들은 블러와의 치열한 내전(內戰)에서 승리했고 영국 록에 주리를 틀고 있던 미국 록 음악계를 보란 듯이 굴삭했다. 블러는 대서양 횡단에 부분적 성과를 거둔 것에 비해 오아시스는 ‘95년의 록 현상으로 솟구쳤다.
90년대 활개를 친 밴드들은 대부분 80년대부터 역량을 축적했던 것에 비해 오아시스는 93년에 지각 데뷔했다. 오아시스의 전적은 프론트 맨 노엘 갤러거가 인디 그룹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기타 테크니션으로 종사하며 기타를 만지작거린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예상밖으로 그들은 맨체스터 출신이었다.
버즈칵스, 매거진, 스미스, 더 폴, 조이 디비전, 뉴 오더, 심플리 레드, 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즈, 케미칼 브라더스 등 음악적으로 ‘이단의 메카’에 적(籍)을 둔 그룹치고는 오아시스의 평범한 로큰롤 스타일은 다분히 이단적이었다. 한마디로 ‘이단의 이단’. 오아시스의 이러한 탈(脫) 맨체스터 경향은 그들의 혈통 때문으로 생각된다. 갤러거가(家)는 아일랜드 이주민 2세이며 노엘과 리암 갤러거 형제의 보헤미안 정서는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아일랜드 남부 혈통에서 비롯한다.
맨체스터에 이단적인 오아시스의 양식은 우선 촌스럽게도 로큰롤을 고수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래’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갤러거 형제가 꿈꾸는 이상은 언제나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이다(오아시스 음악이 영국에서 일반적이었음은 다음 말로 증명된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나이키를 신지만 영국에서는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나 그 진부한 ‘노래 제일주의’로 그들이 팝적으로 도태는커녕 창성(昌盛)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로큰롤을 수용하고 있어서였다.
로큰롤 동력과 갤러거 형제의 극히 ‘인간적인’ 목소리가 엮어 내는 시대착오적 진부함은 쿨(cool)한 브릿팝 클럽에서 도리어 광채를 발했다. 전혀 쿨하지 않은 자세로,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꼴통’을 부림으로써 오히려 효과가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오아시스는 영리한 ‘첨단’들에게 고스란히 착취를 당하기도 했다. 단적으로 케미컬 브라더스와 골디가 오아시스를 자신의 테크노 회로에 용접한 이유는 무엇보다 테크노에 인정(人情)을 깃들이려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테크노에 손을 보태면서도 그들은 자기 구역에서는 결코 ‘테크노 바이러스’가 기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큰롤에 수절했다.
오아시스는 잘 팔아치웠다. 94년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 그해 영국에서만 90만장에 육박했고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열번 이상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95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정규 앨범 3장을 통한 음악적 변화 역시 유별난 게 없었다. 데뷔 음반
<Definitely Maybe>는 94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던 ‘브릿팝의 선언문’ 블러의
<Parklife>와 영국 음악계를 양분(兩分)하며 90년대 브릿팝 이정표 구실을 했다. 60년대의 절도 있는 로큰롤에 비해 디스토션을 잔뜩 집어넣은 히스테리컬 로큰롤을 구현했다.
그리고 본 앨범에서는 전작의 출력 로큰롤 엔진을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마」 등의 스탠다드 팝록으로 다소 윤활했지만 역시 전세계를 타켓으로 하는 ‘패권주의’ 로큰롤의 연장이었다.
1집과 97년 세 번째 앨범
<Be Here Now>가 획일적인 분위기로 일관되어 조금은 지루했던 반면 모닝 글로리는 「Roll with it」「Some might say」를 위시한 빅 히트 싱글들과 노골적으로 ‘비틀스인 척’한 「She's electric」등등 다양한 ‘들을 거리’를 제공했다.
오아시스를 얘기할 때 비틀스와의 관련성을 빼놓을 순 없다. 리암 갤러거의 보컬은 존 레논의 요소가 다분하며 「Don't Look Back In Anger」는 비틀스의 고전 「Let it be」의 코드를 뒤로부터 돌려 만든 느낌이 든다. 「Wonderwall」은 또한 조지 해리슨의 오래된 솔로 앨범 제목이기도 했다.
언젠가 파티석상에서 폴 매카트니는 노엘 갤러거에게
“당신의 음악을 잘 모르고 당신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하지만 TV에서 보니까 음악이 좋더군. 그리고 자넨 비틀하고도 닮았던데.”라고 말했다. 노엘의 여기에 대한 감사의 변.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쁩니다. 사실 그렇게 보이려고 돈 많이 썼어요.”
노엘 갤러거는 아예 <스핀>지에 비틀스 따르기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비틀스는 좋은 곡을 썼느냐를 결정하는 준거점이다. 그들의 곡을 참고하면 단순한 팝에서 보다 복잡한 음악으로 진화하는데 걸린 시간을 따져볼 수도 있다.”
그들은 이 앨범으로 필생의 소원인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했다. 여전히 비틀스 팬층이 두터운 미국인들에게 그들이 어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들의 설정이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앨범의 톱 메뉴인 「Wonderwall」이 빌보드 톱10에 랭크되었고 「Don't Look Back In Anger」도 줄기찬 리퀘스트를 받으며 미국에, 아니 전 세계에 오아시스 열풍을 야기했다.
오아시스의 집요한 로큰롤 전략 때문에 야릇한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아시스를 브릿팝에서 배제하려는 관점이 심심찮게 노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오아시스 자신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워낙 유별나니까!). 그러한 시각은 브릿팝의 ‘팝’이라는 단어에 억압되어 팝의 고정관념으로 브릿팝을 재단하려는 무모함이 빚어낸 억지였다고 본다. 브릿팝을 팝으로만 간주하는 오류 속에서는 비교적 록다운 오아시스는 무난히 브릿팝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릿팝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영국의 팝이 아니라 록에 융통성이 가미된 영국 록의 90년대식 해석이라고 한다면 굳이 오아시스를 순(純)록에 가깝다고 해서 브릿팝과 울타리를 칠 필요는 없다.
항상 이슈가 됐던 오아시스의 장외(場外) 문제도 음악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갤러거 형제의 주둥이와 행동거지야 어떻든 오아시스의 사운드는 곧았으며 성실했다. 입담과는 달리 음악은 조심스러웠다고 할까.
오아시스는 전통적인 록 보수주의자들에게 왠지 ‘날라리’같은 브릿팝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켜준 백신으로 작용했다. 록 보수주의자들의 편견 중의 하나인 모던 록의 '버릇없음과 가벼움'에 대한 오해를 상쇄했으며 동시에 브릿팝에 대한 호기심을 촉진했다.
오아시스의 가치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으며 젊은이들이 비틀스를 따른 것에서 보여준 꽤나 어른스럽고 ‘버르장머리 있는’ 그리고 성숙한 사운드는 높게 평가받았다. 오아시스와 이 앨범은 브릿팝의 또 다른 이면이었으면서도 실상 브릿팝의 중추였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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