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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지만 간단하게 갑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틀로!

프랑스의 계몽주의 볼테르. 왠지 점잖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볼테르는 조롱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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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페미니즘
하이다모기시 저/문은영 역 | 프로네시스
서구의 시선은 '헤자브'를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바라봤다. 모순적이게도 프랑스에서 특정 종교를 상징하는 의복의 차림을 금하자 이슬람 여성은 자발적으로 헤자브를 착용했다. 이는 헤자브가 가부장제의 모순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이처럼 이슬람 여성 문제는 복잡하다.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무슬림 사회에서 성장한 페미니스트의 통찰을 담은 책이다.
1. 낙천주의자 캉디드

프랑스의 계몽주의 볼테르. 왠지 점잖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볼테르는 조롱의 대가였다. 그는 『낙천주의자 캉디드』란 소설로 라이프니츠라는 위대한 철학자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로 유명한 근대 사상가. 사실, 볼테르의 소설 자체는 볼품 없다. 드라마틱한 반전도, 뜨거운 사랑도, 통쾌한 복수도 없다. 등장인물의 숫자도 적고 서사 전개도 단순하다. 그렇다면 볼테르의 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오늘날까지 고전으로써 널리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몽주의가 지향한 가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볼테르를 비롯하여 디드로, 루소, 칸트 등 일련의 계몽주의자로 묶이는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이성'.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라이프니츠를 상징한다. 캉디드는 세상이 더없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폭풍과 지진 등 연이은 자연재해로 죽음에 이르는 점근선에 올라탔지만 캉디드는 말한다.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형태 중에 가장 최고라고. 캉디드의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신정론과 일치한다. 흔히 '예정조화설'이라고 불리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은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형태 중 최고라고 주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을 통렬하게 조롱한 점이 바로 볼테르 소설의 매력이다.

2. 전근대(전통)과 근대라는 도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

볼테르와 라이프니츠, 이성과 신앙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성이 신화로 전락하여 폭력으로 귀결되었다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푸념에서부터 이성을 무기로 내세운 근대는 실패한 기획이라고 단정지은 리오타르는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적 기획에 회의감을 표명했다. 이에 대항해 하버머스는 근대는 실패한 계획이 아니라 다만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볼멘소리를 뱉었다. 이성에 대한 확신감이 떨어진 만큼 종교를 대안으로 보는 세력이 탄력을 받았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서구 지성사에서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려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 얼마 전 선거에서 여당의 자리를 물려주긴 했지만 여전히 선전하고 있는 인도의 힌두 근본주의 정당 등이 그러한 예이다. 신앙에 호소하는 힘은 근대를 추진한 동력에 못지않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전의 대립과 다른 점은 전통과 근대, 전근대와 근대라는 대립항이 더 이상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종종 해체주의, 탈근대, 후기근대로 번역되곤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 후기식민주의, 탈식민주의로 번역된다)이 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전통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주겠다는 근대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소 과장하여 표현했듯 권력의 이해관계에 충실했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비판하는 것처럼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으며,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부장제를 도왔다. 이 때문에 전통을 근대가 비판하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이 근대를 역으로 공격하는 복잡한 상황이 도래한다. 인도의 사띠 풍습을 보자.

다른 사회가 그러하듯, 인도 역시 가부장제 사회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는 남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불에 활활 타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부터 사띠 풍습은 야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띠는 제국주의자가 계몽주의자로 둔갑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였다. 하지만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이를 다르게 공격한다. 서구 근대성으로 다른 사회를 제단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이기에 올바르지 않다는 반박이다. 이 때문에 비교적 최근까지 사띠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비호 아래 슬며시 행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이슬람 여성이 쓰는 '헤자브'에서도 발견된다.

3. 헤자브, 전근대의 상징에서 저항의 도구로

헤자브, 차도르, 브르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이것은 이슬람 여성이 쓰는 베일이다. 헤자브도 인도의 사띠 풍습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기호가 다양한 기호를 나타내는 것이다. 터키를 위시하여 세속국가가 이슬람 지역을 점령할 때, 근대성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헤자브를 맹비난했다. 이슬람의 여성과 일부 남자도 동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헤자브는 전근대, 가부장제, 정체, 무지를 상징하는 여성 억압의 도구였다.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은 이슬람 세계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제3세계에 가져온 것은 기껏해야 끊이지 않는 빈곤과 전통에 대한 경멸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전통 세계가 차라리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란을 기점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권력을 잡았고 이슬람적 가치가 근대성을 대신하게 된다.

2004년 프랑스가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여성에게 헤자브 착용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다. 이 때 헤자브는 역설적이게도 저항의 도구로 다시 태어난다. 일부 이슬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헤자브를 착용한 것이다. 프랑스는 특정 종교나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엄격한 정교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헤자브 착용 금지를 발표했지만, 이러한 프랑스 정부의 행동은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공격으로 여겨졌다. 더 많은 이슬람 여성이 헤자브를 쓰기 시작했다.

4. 이슬람 페미니즘은 가능한가

인도의 사띠나 이슬람의 헤자브 문제에서 보듯 식민지의 경험을 겪은 곳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전통과 근대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계몽주의는 진보였지만, 계몽주의가 타고 온 배는 제국주의였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문제를 결코 간단히 해결할 수 없다. 성차, 계급, 인종, 종교 등으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풀려고 하면 더 복잡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복잡할수록 간단하게 가야 한다.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이슬람 혁명의 성지, 이란에서 성장한 페미니스트의 저작이다. 그녀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한다. 1999년에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10년이 넘은 2010년에서야 번역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의 주장이나 책이 제기하는 문제가 시류에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문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행동가들에게 좌절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불행히도 사실이다. 여전히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은 남자에 종속된 2등 인간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게 바로 종교,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의 권력이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말한다. 트럭 운전사로, 의사로, 법관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여성이 어느날 집안에 박혀서 아이만 봐야 한다면 믿겠는가. 혁명 세력은 과감하게 그렇게 했다. 명예살인이 버젓이 행해지는 나라가 이란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가 서구사회보다 낮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에드워드 사이드라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오리엔탈리즘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했군. 그러나 저자의 논지는 훨씬 섬세하고 복잡하다. 그녀는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을 위시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이해한다. 보편적인 인권에 호소하는 전략이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한 일환일 수 있다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한다. 따라서 서구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게 요지다. 이 지점에서 헤자브 착용은 무지몽매가 아닌, 저항을 표시하는 기의를 획득한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러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논의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무슬림 여성학자가 밝히는 포스트모던 분석의 한계'에서 보듯 주체가 아닌 타자를,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은연중에 권력과 공모했다는 비판을 받듯, 이슬람 여성을 향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발언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주장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출발한 운동이 권력을 도운 역설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하이다 모기시는 다시 한 번 근대성을 옹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명시적으로 자신이 서구의 근대성을 옹호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보편적인 인권적 잣대가 서구 근대성의 성취라는 점을 비춰본다면 앞서 사용한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이다 모기시는 이렇게 말한다.

중동에서 더 인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 대안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모더니티를 거부하는 것은 원리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비서구적?비유럽적?토착적?문화적으로 화합 가능한 가치를 이슬람 세계에 적절하고도 유일한 희망이라고 공표하는 일이다. (p.107)

서구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무비판적으로 매료되다가는, 중동 지식인은 엄청난 지적 체험의 수업료를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이 지역의 가장 효과적으로 은폐된 억압적 체제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의도치 않게 후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p.117)


만약 저자에게 서구 근대성이냐, 이슬람 원리주의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진다면 그녀는 당연히 서구 근대성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식민의 경험 그리고 중동에서 이슬람을 부정하는 것은 서구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교회와 자본, 국가를 부정한 아나키스트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잊혀졌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슬람적 상황에서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흐름을 이슬람 여성주의라고 칭할 수 있겠지만,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여성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슬람은 전혀 여성 친화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페미니스트는 꾸란에는 성차별적인 발언이 없다고 말한다. 꾸란을 해석한 하디스나 이슬람 세계의 법인 샤리아가 여성을 억압했지, 성스러운 경전인 꾸란에는 섹시즘(생물학적 성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리는 있으나 꾸란에도 여성은 남자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는 존재로 규정했고, 설사 꾸란에서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없다고 한들 꾸란 못지않게 중요한 하디스와 샤리아가 여성을 억압하는 한, 이슬람적 정체성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5.이슬람 원리주의자, 21C 캉디드?

이 책을 읽으며 줄곧 떠오른 작품이 서두에서 언급한 볼테르의 소설 『낙천주의자 캉디드』였다. 이성에 의지하느냐, 신앙에 의지하느냐의 기로에 선 유럽 문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작품, 캉디드. 신정주의 국가라는 비아냥을 받는 미국을 제외하면 서구는 충분히 세속화된 사회이다. 이에 비해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의 이슬람 세계는 세속화에 역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이다 모기시의 주장처럼, 그래도 대안은 이성에 기반한 세속화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와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서구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회의가 두드러졌으나, 이러한 사실이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이슬람과 페미니즘』과 같은 목소리가 거듭 나온다면, 이슬람 원리주의 역시 서구 근대성의 대안이라고 보기 힘들다.

2010년 보수성향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이란의 대통령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대선과정에서 이미 분열의 징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오랫동안 반목하며 자존심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나 물질적 풍요나 정치적 자유, 보편적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이란의 체제가 성공했는지 쉽게 판단하기 힘든 실정이다. 특히 최근 미국의 대 이란 제재는 향후 이슬람 원리주의의 성패를 가늠할 정도로 이란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이성이냐, 신앙이냐. 모더니티인가 이슬람 원리주의인가. 캉디드는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행복하다고 외쳤다. 과연 이슬람 원리주의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성들도 똑같이 생각할까. 이 같은 문제는 다른 세계종교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D. L. 카모디는 『여성과 종교』에서 현재의 세계종교인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 가부장제에 공모했다는 지적을 했다. 비록 예수나 붓다, 마호메드가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하기 힘든 여성주의적 발언을 했으나, 이후 조직은 가부장제와 밀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비판이다.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영구평화를. 이를 위해서는 젠더 문제도 슬기롭게 풀어햐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슬람과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한 더미 던져준다.

하이다 모기시(Haideh Moghissi)
이란여성연합(Iranian National Union of Women)의 창립자인 하이다 모기시는 현재 캐나다 요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있으며 동 대학 페미니스트 연구센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또한 국제 비교연구 프로젝트 과제 책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디아스포라: 캐나다 무슬림』 (Diaspora by Design: Muslims in Canada and Beyond, 공저, 2009), 『무슬림 디아스포라: 젠더, 문화 및 정체성』(Muslim Diaspora: Gender, Culture and Identity, 2006), 『여성과 이슬람』(Women and Islam: Critical Concepts in Sociology, 2005), 『이란의 포퓰리즘과 페미니즘』(Populism and Feminism in Iran: Women’s Struggle in a Male-Defined Revolutionary Movement, 199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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