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고 시끄러웠던 1960년대는 ‘감상할 수 있는 록의 시대’인 1970년대를 견인했습니다. 그룹 예스(Yes)의 ‘릭 웨이크먼(Rick Wakeman)’과 함께 최고의 건반 주자로 꼽히는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이 바로 이 그룹에 있었죠. 록의 단순한 코드에서 벗어나 클래식의 확장된 음악구조를 결합한 프로그레시브 록.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록으로 만들려는 혁신적인 발상이 이 앨범을 명반으로 남게 했습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입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And Palmer) <Pictures at an exhibition> (1972)
킹 크림슨을 떠난 그렉 레이크, 나이스(Nice) 출신의 키스 에머슨, 아토믹 루스터에서 활동한 칼 파머. 그룹 출신의 이들 3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난 것은 69년이었다.
그들은 킹 크림슨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클래시컬 록을 구사하는 그룹을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리하여 탄생된 그룹이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였고 그 트리오는 70년 클래식 모티브로 가득 찬 데뷔앨범을 내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클래식의 분위기를 살짝 덧입히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아예 클래식을 통째로 록에 끌어들이는 웅대한 실험을 감행했다. 그들은 본격적인 클래시컬 록의 완벽한 실체를 제시하고자 했다. 트리오의 핵심 키스 에머슨은 이미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와 같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록으로 해석하는 등 록과 클래식의 융합작업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그룹은 이를 물리적 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으로 상승시키면서 광채와 공포의 단계로까지 몰고 갔다. 그 결정체가 71년 발표한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이 클래식 대작을 록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혁신적인 발상이었고 과감한 용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가사까지 붙였고(그렉 레이크), 라이브로 연주해 음반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황무대를 통한 극적 요소에 소홀하지 않았는데, 일례로 키스 에머슨은 무대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칼로 피아노를 찌르며 격하게 연주하기도 했다. 록의 예술성을 탐구하면서도 록의 또 다른 본질인 ‘현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예술성은 키스 에머슨의 건반에서 창출되었다. 그는 그룹의 핵심이며 생명이었다. 그는 키보드로 ‘구부리고 휘고 뒤틀린’ 사운드를 들려주며 건반예술의 경지를 연출했다.
그가 사용한 건반은 무그 신시사이저(Moog synthesizer)라는 것이었다. 70년 10월 올림피아에서 개최된 제16회 국제 오디오, 뮤직 페어에서 미국의 로버트 A. 무그박사가 개발한 무그 신시사이저를 접한 그는 그것으로 웅대한 스케일의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로써 킹 크림슨 클래시컬 록의 건반악기인 멜로트론과 달리 그의 그룹은 무그 신시사이저로 클래시컬 록을 창출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그림”은 실로 키스 에머슨의 무그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 앨범은 영, 미 팝차트 톱 10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그와 함께 클래시컬 록 또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장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가 예시한 것은 클래식까지 삼켜버리는 ‘록의 왕성한 식욕’이었다. 세분화라는 미명하에 사회성을 잃고 방황하는 록은 그것으로 예술성을 소유하는 대진전을 이룩하지만 사실은 ‘록의 위안거리’이기도 했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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