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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척’하는 글쓰기는 재수없다!

‘다짐’하지 말고 ‘비도덕적’으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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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이 투철해 걱정이야
정의란 무엇인가? 다짜고짜 내리지는 말아야할 것!


‘정의파’를 말리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 제2탄이다. 두 주 전엔 선과 악의 문제로 정의를 말했다. 오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의다. 누군가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리라. “다짜고짜 내리지는 말아야 할 것.” 정의(正義)가 아니라 정의(定義)다.

날라리란? 난센스란? 선생님이란?

중딩 준석의 글은 초딩 은서의 그것보다 한 차원 높다. 은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준석은 주어진 명제를 다양하게 분석하려 한다. 중딩인 만큼 어른스럽게 철학적인 태도로 논리를 구사하려고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게 바로 ‘정의’다.

“날라리란 무엇인가.”(날라리에 대하여) “‘센스’의 반대말, ‘난센스’. 센스에 ‘none’을 붙임으로서 ‘센스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난센스는 ‘말이 안됨’을 일컫는 말이다.”(난센스퀴즈에 대하여) “……그 중에서도 학창 시절,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은 ‘선생님’이다. 그럼 ‘선생님’이란 무엇인가?”(내가 만난 선생님) “동생, 자식이 둘 이상 있는 집안에서는 형, 언니, 오빠, 누나를 제외한 다음으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족의 구성원이다.”(나에게 동생이란)

글의 도입부에선 예외없이 ‘~은 무엇인지’ 개념을 짚고 넘어간다. 날라리란? 난센스란? 선생님이란? 동생이란? 준석에게 굳어진 글버릇이 되었다. 나는 준석을 ‘못말리는 정의파’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개념정의부터 안 하면 글이 아니잖아요”라는 강박 또는 착각.

준석의 스타일이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논리적 서술의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기 위해선 불가피할 수도 있다. ‘서론-본론-결론’ 또는 ‘기-승-전-결’이라는 글의 전통적 구성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준석을 말리련다.

첫째, 매번 같은 방식으로‘만’ 쓰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이 천편일률적이다. 새롭게 쓰면 덧나니? 지난번 A처럼 썼다면 이번엔 C처럼 써보자. 다음엔 X처럼, 다다음엔 Z처럼 써보자. 둘째, 창의적인 형식이 아니라서다. 개념정의란 다르게 말하면 ‘포괄적인 규정’이다. 어떤 논리를 증명하는 논술이 아닌 경우, 개론부터 더듬고 각론으로 가는 방식은 긴장감 없이 나태할 뿐이다. 자유롭게, 제멋대로 써야 한다. 주어진 틀에 얽매이지 마라. 왠지 준석은 틀의 노예가 된 것만 같아 슬프다.

‘새끼손톱의 디테일’이 주는 생동감

준석은 ‘내가 만난 선생님’이란 글에서 ‘선생님’에 관해 정의한 뒤 선생님의 역사(조선시대), 선생님의 종류(학교 선생님, 유치원 선생님 등등)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상상력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 ‘선생님 개론’이 아닌가. ‘개론’의 틀을 부수기 바란다. 그 대안 중 하나는 ‘하찮은 디테일’이다. 사람에 관해 전체적 인상부터 평할 수 있지만, 그의 새끼손톱에 낀 때만을 묘사할 수 있다. 새끼손톱의 디테일이 때로는 전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선생님에 관한 글이라면, 잊지 못할 선생님과의 엉뚱한 추억 하나가 더 힘이 셀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이 칼럼에서 ‘정색’이 가장 싫어하는 색이라고 했다. 정형도 좋을 리 없다. 김형, 이형, 박형, 최형, 윤형 다 좋은데 정형은 좀…. 정씨 제위들 화내지 마시길. 바른 형식의, ‘정형’(正形) 얘기다.

***

너의 ‘모럴 엔딩’이 좀 지겨워


“메리야, 물어! 물어!”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다. 집에 있는 똥강아지를 데리고 한심한 장난을 치곤 했다. 뼈다귀 처럼 생긴 막대기를 입 근처에 가져다대고 놀리거나, 친구들이 나타나면 강아지한테 “물어버리라”며 부추기는 척을 했다. 아들한테 그런 장난을 한 적은 없다. “준석, 물어! 물어!”라고 한다면 거의 개 취급이다 ^^. 한데 준석은 글을 쓸 때마다 “물으면 안돼요?”라고 눈치를 보는 듯하다. 준석에게 “살살 물어라”고 충고한다. 매번 물면 획일적이다. 너를 ‘정의파’에 이어 ‘물음팍 도사’(!)로 분류하노라. 왜 이리 늘 물고, 아니 ‘묻고’ 시작하느냔 말이다.

“부모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 우리 어린이들은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인 이 날, 어느 날인가?” (방학을 맞는 나의자세)
“미국에서 소방차 부를 때 쓰는 그 9?11이 아니다. 기억하는가? 2001년에 일어났던, 그리고 21세기에 최고로 큰 대참사인 9·11 테러를… ”(선과 악, 그리고 9·11)
“욕이 뭔가요? 그냥 어린아이에게 ?자면 ‘나쁜거요’ 하거나, 어른들이라면 ‘기분 나쁠때 흔히 하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한다.” (욕이란 무엇인가)
“문제를 내겠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보기 싫든 보고 싶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동네 간판)

방학에 관한 글에서 “어느 날인가?”라고 물었다. 9·11은 “기억하는가”고 물었다. 욕은 처음부터 “욕이 뭔가요?” 물었다. 간판에 대해선 “문제를 내겠다”고 했다. 준석은 질문을 던진 뒤 답을 풀어가는 형식을 즐긴다. 아예 ‘Q & A 스타일’이 스테레오타입화되었다. ‘선생님’에 관한 두 번째 글도 그렇다. ‘개념정의’로 시작하지 말라는 아빠의 질타를 듣고 난 뒤 다시 작성했다. 역시 이번에도 질문이다. 또 문제를 내겠단다.

완전수면제거나 푸하하 웃기거나


자, 문제를 내겠다. 3살 정도 때부터 24세까지 나의 모든 지식 제공을 담당하는 사람은? 문제가 너무 쉽다. ‘선생님’ 이다. 우리는 꼭 한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악연일수도, 좋은 인연일 수도 있다. 또 한편, 기억에 남는 선생님도 있고, 그저 그런 선생님도 있다. 그럼 좋든 나쁘든 아이들의 기억에 세게 쐐기를 박을 선생님이란, 어떤 선생님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처음 개학날이자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 새 선생님과 새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선생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선생님의 성격도 잘 알지 못한다. 아직 아이들과 완전히 친숙하지 않고, 아이들을 처음 보는 데다, 이야기하느라 바쁜 아이들의 군기를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선생님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사소한 나이, 남자친구, 결혼 여부, 성격… 물론 친분관계라는 게 그런 거지만. 그러면서 이 ‘선생님’ 이라는 직업은 아이들 사이에서 분화된다. ‘과학 쌤은 완전 인간 수면제야!’ 나 ‘국어 쌤 시간에는 졸려 죽겠어’ ‘기술 시간은 진짜 웃음밖에 안나온다!’ 아이들은 이렇게 선생님을 백팀 청팀 갈라놓듯 하며, 대하는 태도도 달리한다. 예를 들어 재미없고 ‘수업시간에는 무조건 공부!’ 라는 과학 쌤의 말은 어떤 아이들은 건성건성 ‘아~ 네~’ 하면서 크지 않지만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항상 웃긴 기술 쌤의 말에는 항상 ‘푸하하하’ 하고 웃게 된다. 하지만, 이건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른 현상,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인연이 또 있기 마련이다.

삼단 논법으로 하면, 미술 쌤은 미술 잘하는 학생을 더 좋아한다. 나는 미술을 잘한다. 미술 쌤은 나를 다른 아이보다 더 좋아한다. 이런 식이다. 내가 미술을 잘해서 미술 쌤이 나를 더 아낀다던가, 사회를 잘해서 사회 쌤이 잘해주신다던지, 항상 수업 시간에 눈에 띄어서 쌤과 친하다던지, 뭐 그렇다고 꼭 좋은 인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밥 먹듯 하는 짓이라고는 말썽뿐이어서 만날 선생님께 얻어맏고, 아무 이유없이 나에게만 이상하게 대한다던지 하는 예가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친해지기도 하더만…

우리는 가끔 쌤에게 잘보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거나 상 타려 하는 학생을 볼 수 있다. 그런 학생을 보면, 또 ‘선생님’ 이란 것이 그 학생의 성적과 직접 관련해 있다고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선생님이 ‘하나’의 종류뿐이던가? 책을 수필, 소설, 설명문과 같이 나누듯이,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 과 ‘유치원 선생님’으로 나뉜다. 아까 위에서 학교 쌤에 대하여 언급했으니 이번에는 ‘유치원 쌤’에 대하여 언급을 해야 할 시간인데, 그 전에 먼저 생각부터 해 보자. ‘유치원 선생님’ 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유치원 선생님은, ‘폭력’을 절대 행사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가기 때문이다. 또 유치원 선생님은, 초등학생 고학년과 같이 일진이나 싸움, 삥을 별로 안 보기 때문에 눈이 정화(?) 된다. 무엇보다, 나의 경험이지만, 유치원이 아무래도 학교보다는 추억이 더 많은 듯 싶다.

이 글을 통해 나도 모르던 선생님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또 다시 유치원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초등학교 때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등을 하였다. 어쨌든, 학업 시절의 스승인 선생님들께 감사하자!

오늘은 ‘준석 무한 퇴짜’의 날

“책을 수필과 소설로 나누듯, 선생님을 ‘학교 선생님’과 ‘유치원 선생님’으로 나눈다”는 비유는 중딩답다. 정감이 간다. “유치원 선생님은, 초등학생 고학년과 같이 일진이나 싸움, 삥을 별로 안 보기 때문에 눈이 정화(?) 된다”는 표현도 반짝인다. 전체를 놓고 볼 땐 안(!) 반짝인다. 그래서 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냐? 갈 지 자, 횡설수설이다. 맨 끝 문장은 도덕적이다. “학업 시절의 스승인 선생님들께 감사하자!”고? 스승의 날 기념 글짓기라도 한 줄 아냐? 구리다. 진부하다. 생생한 에피소드로 힘을 주면 안 되겠니? 오늘은 준석을 향한 ‘무한 퇴짜’의 날이다.

유희왕을 정말 찢.었.다


유희왕 카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한 2006년 쯤이던가? 초딩 3학년 때이다.(사실 그 때 전체적으로 유행했는지는 잘 모르나, 우리 반에서는 유행함) 직사각형 외모에 무섭게 생기신 제 땡땡 선생님은 카드를 금지하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점점 카드를 가져오면서 그 분은 그것을 자그마한 불씨의 반항심이라고 여기고, 자꾸 갖고 오면 찢어 버리겠다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정말 찢. 었. 다. 무엇보다 카드 중 레어템을 찢으셨다. 그것도 우리 손으로. 그 순간부터 쌤을 얼마나 원망했던지.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카드를 갖고 오지 않았다.

4학년 때인 2007년에는 나 개인과 쌤의 안좋은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선생님에게 아이들을 좀 차별하는 면이 있었다. ‘공부 잘 하는 애들끼리 앉혀야지.’ 하거나, 지금은 양아치놈인 조 땡땡에게 그의 엄마의 무슨 비밀스런 사연을 아이들에게 공포하기도 하고, 참 입이 가볍고 차별을 중대화하는 쌤이었다. (중략)

6학년 때, 나는 쌤에게 최고의 신임과 격려를 얻었다. 수학 덕분인지, 기말고사 덕분인지, 꼬마훈장이라는 제도 덕분인지 2학기 때 부회장까지 했다. 선생님과 애들과 <아바타>도 보고. 물론 회장은 지금은 양아치인 미스터 OO가 했지만. 그 쌤과는 최강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중략)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많은 선생님들과의 사연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아까 말했듯이 내가 나의 단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지적은 계속되고, 나는 계속 새로운 인간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는 정신세계가 수평을 유지하는 인간이 되어 있으리라 결코 의심치 않는다.

착한 글과 착한 척 하는 글은 달라요

‘선생님’에 관한 네 번째 버전이다. 준석이 고생 좀 했다. 에피소드를 섞긴 했지만, 따분한 ‘선생님 순례’가 돼버렸다. 하나를 키워서 집중해주길 바랬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지럽기만 하다. 결론이 가장 마음에 안 든다.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또 도덕적이다. “선생님의 지적은 계속되고, 나는 계속 새로운 인간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는 정신세계가 수평을 유지하는 인간이 되어 있으리라 결코 의심치 않는다.”

준석은 남을 가르치진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훈계한다. 끝에 가선 예외 없이 마음을 다잡는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 ‘모럴 엔딩’이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는 말에 빗대 뜻풀이를 하자면 ‘도덕적 최후’다. 글의 초반부에선 ‘정의하기’가 습관인 ‘정의파’인데, 글의 최후는 꼭 장렬하게 ‘도덕적’으로 맺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냐.

시작과 끝은, 사실상 글의 모든 것이다. “멋진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지 않으면 아예 글을 쓸 생각도 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렇게 비틀어 다시 말하고 싶다. “사전적 개념정의로 첫 단락을 시작하거나, 바른 다짐으로 글을 맺으려거든 아예 글을 쓸 생각도 하지 마라.” 착한 척 구는 바른 다짐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매력은 더더욱 없다. 읽는 이의 가슴에 접근하지 못하는 최악의 엔딩이다. (오해 마시길. 착한 글이 아니라 악한 글을 권하는 건 아니다. 착한 글과 착한 척 하는 글은 다르다.)

준석에게 한 번 더 쓰도록 했다. 오늘은 은서를 따돌린 준석의 단독 드리블이다.(은서는 그림만 싣는다) 벌써 다섯 번째 버전이다. 두 가지 주문을 했다. 첫째, 제발 한 가지 이야기만 해라. 둘째, 끝에서 다짐하지 마라.

은서의 글은 오늘 탄압을 받았다. 게재 거부를 당했다. 그림으로만 우정출연했다.

윤쌤과 나

나는 ‘윤쌤’(가명 ㅎ) 이라는 수학 쌤과 인연이 깊다.
윤쌤은 일산의 한 OO수학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잘 알 거다. 지킬과 하이드랄까? 그런 쌤이라고 할 수 있다. 뭐 당연한 거겠지만 부모님께는 말로 대하고, 학생들에게는 매 아니면 주먹으로 대하는 그런 쌤이다. 선과 악. 학원 쌤이지만 당당히 나와 3년을 동반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인연을 함께하다 보니 다른 선생님을 못 만날 지경에 이르렀다. 나의 수학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결국 엄마가 보낸 OO수학학원, 그곳에서 불행하게도 바닥에 판을 치는 맨 아랫반인 에스반을 제치고 꼴찌에서 두 번째 반으로 등록이 되고, 처음 만난 쌤이 바로 ‘윤쌤’.

그분은 뭔가 처음 만날 때부터 근육질 몸매에, 좀 험악(?)한 얼굴 때문에 아이들이 보는 시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시험지를 받아 들자, 역시 어려웠다. 어려우다 보니 잘 못 풀고, 계속 틀리고, 그때 처음 본 쌤의 폭력은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였다. 가끔 펜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때리기도 하였고, 숙제를 안해 올 경우 아주 세게, 근육질 몸매의 100%를 활용하여 매로 손을 때렸다. 나도 맞아 보았다. 손 안의 세포가 죽어나간 느낌?

그리고 첫 시험을 보자 바로 중반으로 갔다. 그런데 얼마나 삶을 포기한 채 친구 만나러 온 아이들이 많던지. 나는 그 때부터 상반으로 가야겠다는 큰 결심을 하였는데, 그 때부터 잠시 장 쌤과는 바이~, 아이들이 점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도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엔 올라갔다. 6학년 1학기 때의 일이었다.

6학년 1학기가 시작되면서, 윤쌤과의 좀 개인적인 인연도 시작되었다. 6학년은 사실 내 초등 시절 최고의 학년이었다. 반에서 인정받고, 공부도 잘 했고, 친구들의 신뢰도 많이 얻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 1’ 과정이었다.

나는 6학년 시험지는 대부분 80점 이상은 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중학교 과정 시험지는, 특히 함수나 집합 같은 경우 30점대로 바닥에 쐐기를 박기 시작하였다. 윤쌤은 말한다. ‘넌 6학년 것은 잘 하는데 중 1학년을 왜 이렇게 못하냐.’ 나도 너무 고민했다. 아 진짜 왜 이리 못하지? 짜증났다.

윤쌤에게 혁신이 벌어졌다. 항상 머리카락만 잡아당기던 선생님이 볼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에 들어와 중 2학년 시험지를 풀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참 혼란도 많이 왔겠다. 중 2는 너무나 어려웠다. 특히 올림 같은 것. 지긋지긋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이 내 볼을 계속 잡아당긴다. 어떨 때는(가장 최근) 내 한쪽 볼만 네 번 잡아당겼다나.

그런데 어느 날, 나는 혼자서 끝까지 학원에 남아 있게 되고, 내가 갈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알아? 네가 니반에서 몇 등일 것 같아? 꼴찌야 꼴찌 알겠냐?’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별 치욕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슴에 와 닿기는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관계가 조금은 원만해지기는 하였다. 수학 시험도 한개 틀렸고, 다른 시험 성적도 나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중 2는 여전히 중간 지대이다. 앞으로는 어떤 친구들이 올지 기대된다. 중 2 형들만 오지 말고 중 1친구들이 좀 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정말 언제쯤, 나는 그 학원을 그만둘지 정말 정말 궁금하다. 과연 기네스북을 세울 것인가? 윤쌤과 초딩 고학년과 중딩 시절을 함께 동반하게 될 것인가? 이야기를 기대해 달라.

장황해, 장황해, 장황해

이렇게 고생하는 줄 처음 알았다. 수학학원을 3년이나 다니는 줄 까맣게 몰랐으니 한심한 아빠로서 돌을 맞아도 싸다. 글이 나아지긴 했다. 이 선생님 저 선생님 다 건드리지 않고 수학학원 ‘윤쌤’ 딱 한 사람만 이야기했다. “그래 이거야”라고 벌떡 일어나 미? 듯 박수는 못 치겠다. 역시 장황해서 탈이다. ‘묘사’를 해야 하는데 ‘서술’만 한다.(이 부분은 다다음주에) 이토록 지루할 수가!

오늘의 결론을 내릴 시간이다.
“준석아, 다짐하지 말자”는 말부터 나오려고 한다. 이걸 다시 비유적으로 표현해보겠다.

‘비도덕적’으로 쓰자

‘도덕’은 사회의 통념을 상징한다. 과격한 반(反)도덕적 논리를 쓰라고 선동하려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가슴에도 와닿지도 않는 고리타분한 교훈이나 주장을 결론 삼지 말자는 얘기다. 어설프게 ‘도덕적인 척’하는 글쓰기는 재수없다! 아니 재미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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