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때문에 무작정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던 『예술가를 학대하라』 같은 책이 그렇다. 물론 작가의 이름 때문에 읽게 되는 책도 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쓴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가 그랬다. 오랜만에 작법 책을 읽는 건 역시 재밌는 일이었다. 그건 소설가가 되고 나서 『소설가의 각오』같은 제목의 책을 읽는 것만큼 정색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건 사실이니까.
사실 소설가들의 모임에선 종종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꺼린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사항 비슷한 것이어서 그런 얘길 하는 것이 다소 촌스럽다거나 다소 거친 형태의 모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설의 구조나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거나 쓰고 있는 소설의 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라고해도 좋을만큼 없다. 그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다가 짐짓 천장을 쳐다보거나 상대의 눈길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하는 것이다.
“소설은 이빨로 쓰지.”
“엉덩이로 쓰거나.”
“무슨 소리! 귀로 쓰는 거야.”
발로, 치통으로, 편두통으로 쓰는 작가들의 황당무개한 소설론은 전등갓 위에 달려드는 먼지처럼 고요히 술집 천장을 날아다닌다. 이토록 쓸쓸하고 멜랑꼴리한 레토릭이라니! 하지만 그건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씹어대며 자학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이빨로, 귀로, 치통으로 쓰는 소설이 어떨지는 독자들 나름대로 상상해보시길.)
그러나 소설가들이야말로 ‘소설작법’의 열렬한 독자들이다. 소설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무관심’이라는 세련된 도시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누군가의 비밀 창작노트에는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작법들과 이야기 공학을 다룬 책들의 메모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내 소설은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한탄하며 제임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이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등을 뒤지며 힘주어 밑줄을 긋는 것이다.
제목과 이름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나는 소설가입니다.
서점에 나가면 내가 쓴 소설이 있으니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단지 내 소설은 자칫하면 스포츠 코너에 가 있거나 (제목이『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였던 탓에), 문학사 코너에 놓여 있거나(제목이『일본문학 성쇠사』였던 탓에), 음악사 코너에 놓여 있거나 (제목이 『존 레논 대 화성인』이었던 탓에, 이 책은 SF 코너에 놓였던 적도 있습니다.)
황당한 일이긴 하지만 유머러스한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책이 엉뚱한 코너에 꽂혀 있는 것을 엄청난 모험담처럼 즐겁게 얘기하기도 한다. 가령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냈던 소설가 이기호는 다양한 장정의 성경책과 간증집이 가득 쌓여 있는 종교 코너에 꽂혀 있는 자신의 책을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소설이 유달리 재밌는 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런 멋진 유머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교는 양호하네. 만화코너에 꽂혀 있?도 하니까.”
“만화요? 아무리 그래도 소설가 책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기호란 이름을 가진 아주 훌륭한 만화가 분이 계시거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소설가들 중에는 비슷한 이름의 작가들이 꽤나 많다. 이것만 가지고 소설을 써도 될 정도의 에피소드들도 무궁무진하다. 각기 다른 색깔의 다른 감수성의 소설을 쓰는 훌륭한 작가들이건만 김연수와 김언수, 김도연과 김도언, 박민규와 박진규처럼 자칫 방심하는 순간 이름을 바꿔 부르거나, 엉뚱한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만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에 소설을 출간한 김언수 작가에게 보내는 축전을 김연수 작가에게 잘못 보낸 나로선 이 자리를 빌어 두 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거듭 사과하고 싶다. (허이쿠. 죄송합니다, 작가님들! 제 손가락이 몹쓸 고질이라.)
그런데 이런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니, 꽤 재밌단 생각이 든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말할 것도 없이 야구코너에 꽂히는 상황 말이다. 그러니 1990년대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이 낚시 코너에 꽂혀 있었다는 그 기념비적인 사실은 새삼 놀라울 일도 아니다.
나로 말하면 제목의 희생자 리스트에 가히 이름을 적어 넣을 만하다. 첫 장편이었던
『스타일』은 소설 아닌 패션 코너에(뭐야! 스타일북인 줄 알고 샀는데 망했어! 라는 서평이 종종 보였었다.)
『다이어트의 여왕』은 문학 아닌 ‘건강’ 코너에(이건 또 뭐야! 다이어트 하려고 샀는데 소설이었어. 망했어! 라는 푸념도 꽤나 보였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에 보면 이런 몹쓸 현상들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촌철살인할 멘트가 있긴 하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거칠게 정리하면 이런 정도의 말이 될 수 있겠다.
‘어떤 장르인지 결정하는 건 사실 작가도, 출판사도, 독자도 아닌 거죠. 그건 단지 교보문고 언니들의 손에 달린 겁니다.’
책방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서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책방 관련 책은 많이 읽어서 이젠 별로 읽고 싶지 않을 것처럼 말하다가도 나는 ‘헌책방’이란 말이 들어간 책만 보면 눈을 번쩍이며 읽게 된다. 며칠 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같은 경우에도 처음에는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성북구 정릉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강원도 황지에서 보냈다. 존 레넌을 좋아하지만 오노 요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닉 드레이크와 커트 코베인, 김광석을 좋아하지만 빨리 죽는 건 별로다. 대학을 졸업하고 IT 업계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게 좋아서 잘 나가던 회사를 관두고 헌책방을 두리번거렸다’라는 저자 설명을 읽자 문득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혹은 ‘그러나’로 이어지는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와 접속사 사이의 여러 가지 행간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늘 헌책방을 뻔질나게 다녔던 내게 이 책의 책방 이야기는 너무 익숙하고 일상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고전적인 헌책방 이야기라기 보단 책을 통해 지역사회에 헌신하는 따뜻한 내용의 사회참여기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또 다른 책이 떠올랐다.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이란 부제가 붙은
『전작주의자의 꿈』이었다. ‘전작주의’란 한 작가가 쓴 모든 책을 보며 그것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일종의 편집증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에선 언뜻 아카데미즘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활동이라는 점에선 아마추어리즘이다. 나는 이런 진지하면? 동시에 느슨한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오는 전작이 모두 ‘이윤기’ 선생의 책이라는 점이나, 저자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경제학을 전공한 회사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자를 만나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만약 이 책이 조금만 더 일찍 나왔더라도 할 말이 더 많았을 거예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책방마다 독특한 풍경들이 살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헌책방들은 점점 비슷해지고 있어요. 문화가 사라지고, 동시에 아우라도 사라지는 겁니다. 이제 헌책방 주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새 책을 조금 더 싼 가격에 빼와서 빨리 파느냐가 중요한 문제예요. 그리고 그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구요. 밥은 어떤 견고한 논리나 문화도 앞섭니다. 이젠 이런 책은 더 이상 쓰지 않을 겁니다. 쓸 수도 없구요.
훌쩍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시간을 기억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금호동에는 ‘고구마’ 같은 서점이 있고, 신촌의 ‘숨어있는 책’이나 ‘공씨책방’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의 풍경은 조금 더 쓸쓸해지고 외로워졌다. 이제는 헌책방도 인터넷으로 책을 판다. 조금 더 기업화됐고 더 특화되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고 있고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아주 구석에서 그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그 옛날 홍대의 온고당 서점에서 돈이 궁해 서점에선 직접 구입할 수 없었던 과월호 < GEO >와 < VOGUE >를 사들이곤 했었다. 신림동 녹두거리의 ‘책창고’에선 니체전집의 초판본을 사고 만세삼창을 불렀었다. 일찌감치 절판된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살 수 있었던 것도 고시준비생이던 ‘현대서점’ 아르바이트생의 눈물겨운 헌신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헌책방은 사람이 아닌 책 위주로 천장 끝까지 책들이 들어차 있고, 오래된 나무 사다리를 타고 책을 찾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헌책방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안다. 그곳이 동굴 같은 음영과 인위적인 음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먼지 구덩이 속에서 나달거리기 시작한 헌책은 함부로 버려진 시체더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들의 무덤이며 책들의 부활소, 헌책방은 그런 곳이다. 시간에 더께져 썩기 시작한 활자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사람은 사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회귀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시계는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헌책을 통해 시간을 포개고 복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한다.
헌책방이 있던 오래된 동네 골목을 지나가던 중 나는 우연히 뉴욕제과의 ‘욕’ 자가 떨어져 ‘뉴제과’ 라고 남아 있는 허름한 간판을 보게 되었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간판을 오래도록 바라봤었다. 새로움과 낡음, 그것은 의도적으로 구성해 놓은 오브제처럼 낯설고 경이로웠다. 무던히 오래된 것은 새롭다. 마치 티벳의 ‘라다르’라는 오래된 미래의 존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