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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중음악의 이단아, 세르쥬 갱스부르

Serge Gains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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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듀오 에어(Air)의 니콜라스 고댕(Nicolas Godain)은 지난 2001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세르쥬 갱스부르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세르쥬 갱스부르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

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듀오 에어(Air)의 니콜라스 고댕(Nicolas Godain)은 지난 2001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세르쥬 갱스부르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세르쥬 갱스부르의 죽음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는 항상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텔레비전에서 괴상한 행동을 했다. 그는 시인이었으며, 펑크였다. 그리고 그는 휘트니 휴스턴과 섹스하기를 원했다.” 니콜라스 고댕의 말에 세르쥬 갱스부르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르쥬 갱스부르는 프랑스 대중문화의 위대한 아이콘이다. 그는 30년 넘는 활동기간 동안 음악,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음악적인 면에서의 성취는 놀랄만하다. 그는 전설적인 음유시인 보리스 비앙(Boris Vian)의 정통 샹송의 영향을 받아 출발했지만, 재즈, 록, 레게, 펑크(Funk), 일렉트로니카 등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들을 섭렵했고, 그것을 자신만의 특유의 색깔로 칠해 세상에 토해냈다. 또 아무리 자유분방한 프랑스라고 해도 선뜻 시도하기 힘든,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노랫말은 논란의 중심에 서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술, 담배, 여자로 대표되는 그의 또 다른 이미지는 ‘더럽고 추한 늙은이’라는 불명예의 인장을 찍었다. 생전에 알코올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술에 빠졌고, 지땅이라는 노필터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또 미녀들과의 계속되는 염문설로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러나 세르쥬 갱스부르의 여인들에 대한 뜨거운 갈망은 주옥같은 명곡들을 쏟아낸 밑거름이었다.

첫 번째 여인은 1960년대 최고의 섹스 심벌로 각광을 받았던 배우 겸 가수 브리지뜨 바르도(Brigitte Bardot). 세르쥬 갱스부르는 BB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브리지뜨 바르도와 1967년에 뜨거운 사랑을 했다. BB가 유부녀였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세르쥬는 BB를 위해 「Harley-Davidson」 「Bonnie and clyde」 「Comic strip」 「Initials B.B.」 등의 노래들을 작곡했고, 연인은 톱 스타로 우뚝 섰다.

‘사랑의 여름’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그 유명한 노래 「Je t'aime... moi non plus(당신을 사랑해... 난 아냐)」와 관련된 갈등 때문이었다. 1967년 겨울, 두 사람은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BB에게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라며 설득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당시 녹음을 맡았던 엔지니어는 노래를 “진지한 애무”라고 묘사했고, 일요 신문인 <프랑스-다망쉐(France-Dimance)>는 “신음소리와 한숨소리, 그리고 바르도의 기쁨의 울부짖음으로 채워진 4분 35초”라고 평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당시 BB의 남편이었던 독일의 백만장자 군터 자크(Gunter Sachs)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이후 “격노한 군터 자크, 노래 발표 철회를 요구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등 논란을 부추겼다. 인기 추락이 두려웠던 BB는 세르쥬 갱스부르에게 싱글을 발표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세르쥬는 “이 노래는 매우 순수한 작품이다. 내 인생 처음으로 만든 사랑 노래이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BB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테이프를 서랍 속에 넣었다(20년 뒤인 1986년 BB가 허락을 하면서 싱글이 발표됐다).


BB는 떠나갔지만, 새로운 사랑이 바로 찾아왔다. 긴 갈색머리, 커다란 눈, 야성적인 몸매와 미니 스커트를 입은 1960년대 「흔들리는 런던(Swining London)」의 완벽한 모델, 제인 버킨(Jane Birkin)이었다. 영화 촬영차 파리에 온 스물두 살의 제인 버킨을 보고, 세르쥬 갱스부르는 작업본능에 충실했고, 결국 사랑을 쟁취했다. 1969년에 발표된 「Je t'aime... moi non plus」는 커플의 완벽한 섹스 스토리였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 아니에요. 오 내 사랑
흐느적대는 물결처럼 저는 들어가고 또 오죠
당신의 허리 사이를 저는 들어가고 또 와요
당신의 허리 사이에 저는 매달려요
- 「Je t'aime... moi non plus」 중에서

노래는 즉각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골적인 신음소리와 가사를 문제삼아 방송 금지조치를 취했고(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청에서도 항의 성명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외국어로 부른 노래로는 처음으로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억압할수록 더 찾아듣게 된다!! 영국 여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은 “이 곡은 제인을 위한 완벽한 노래다. 그녀는 이 곡을 부르기 위해 태어났다”며 극찬했다.

2년 뒤인 1971년 세르쥬 갱스부르는 프랑스 중년 남성과 젊은 영국 여성과의 사랑을 음악으로 풀어낸 컨셉트 앨범 <L'Histoire De Melody Nelson>을 내놓았다. 바로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였다. 이후에도 갱스부르는 제인 버킨을 위해 때론 낭만적이고(Ex fan des sixties), 때론 감미로우며(Yesterday yes a day), 때론 몽환적인(Jane B.) 보석들을 계속해서 제공해줬다. 두 사람은 1980년 공식 결별을 했다.

세르쥬 갱스부르의 마지막 여인은 신비의 젊은 여인 밤부(Bambou). 아시아와 유럽 혈통이 섞여있는 밤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군을 진두지휘했던 독일 장군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손녀로 알려져 있다. 갱스부르는 밤부를 제2의 제인 버킨으로 만들기 위해 「Made in china」 등의 노래를 만들어줬지만,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1991년 갱스부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밤부는 그의 곁을 지킨 유일한 여인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

세르쥬 갱스부르는 루시앙 긴스부르(Lucien Ginzburg)라는 이름으로 1928년 4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 긴스부르(Joseph Ginzburg)와 어머니 올리아 베스만(Olia Bessman)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유대인들이었다. 특히 아버지 조셉은 화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아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아버지의 예술 세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세르쥬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과 재즈 피아노를 섭렵했다. 미국의 위대한 작곡가 조지 거시윈이 첫 번째 음악 영웅이었다. 그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제2의 고야와 피카소를 꿈꾸며 미술 공부에 매진했지만, 실력의 한계를 깨닫고 곧바로 포기했다.

1947년 러시아 귀족의 딸 엘리자베스 레비츠키와 사랑에 빠진 세르쥬는 4년 뒤인 1951년 결혼을 했다. 1954년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한 그는 1959년 피아 콜롬보(Pia Colombo)에게 「Defense d'afficher(붙이지 마세요)」, 1961년에 줄리엣 그레꼬(Juliette Greco)에게 「Les amours perdues (잃어버린 연인들)」을 만들어주며 작곡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카바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7년 파경을 맞은 그는 이듬해 이름을 루시앙 긴스부르에서 '세르쥬 갱스부르'로 바꿨다. 갱스부르는 평소 존경해왔던 18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에서 가져왔고, 세르쥬는 세르게이라는 러시아의 전형적인 이름에서 따왔다.

개명과 함께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같은 해 바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중 프랑스 재즈의 최고봉이자 시인이었던 보리스 비앙(Boris Vian)을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음악적 사사는 물론이고, 보리스 비앙 특유의 냉소와 까칠함 등을 곁에서 지켜보며 체화했다. <필립스>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세르쥬는 보리스 비앙의 오랜 파트너 알랭 고라게(Alain Goraguer)와 함께 데뷔 앨범 <Du Chant A La Une! (노래를 하고 있다!)>(1958)를 내놓았다. 비록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음반에 수록된 「Le poinconneur des lilas (릴라역의 매표원)」은 샹송의 위대한 클래식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1959년 별다른 존재감을 얻지 못한 두 번째 음반 <No2>를 내놓은 후 그는 곧바로 쟈끄 도니올 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감독의 영화 <L'eau A La Bouche(입 속의 물)>의 스코어를 맡으며 사운드트랙 작업도 병행했다. 그 와중에 미셸 브아롱(Michel Boisrond)의 영화 <Voulez-vous Danser Avec Moi(나와 함께 춤을 춰주시겠어요?)> 촬영?에서 당대 최고의 섹스 심볼 브리지뜨 바르도를 만났다.

1961년 내놓은 3집 음반 <L'etonnant Serge Gainsbourg(놀랄만한 세르쥬 갱스부르)>는 세르쥬의 문학적 열정이 녹아 있는 놀랄 만한 작품이었다. 빅토르 위고에게 바치는 「La chanson de Maglia(말리아의 노래)」, 「고엽」의 작사가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자끄 프레베르(Jacques Prevert)에게 헌정한 「La chanson de Prevert(프레베르의 노래)」 등이 대표적인 수록곡이었다.

음반 작업을 하면서 갱스부르는 대중음악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첨단 사운드에 대한 동경을 가졌다. 1963년 명곡 「La javanaise(자바 여인)」부터는 십 년 넘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스튜디오 작업을 하며 새로운 사운드 기술을 접목시켰다.


1964년 재즈 스타일의 4집 <Gainsbourg Confidentiel(비밀의 갱스부르)>를 내놓은 후, 그는 곧바로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프랑수와즈 앙뚜아네뜨 팡크라찌(Francoise-Antoinette Pancrazzi)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같은 해 말에는 아프리카 리듬과 라틴 비트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5집 <Gainsbourg Percussions>를 내놓았다. 아직까지도 정말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있는 「Couleur cafe(커피색)」, 남아공 성가에서 영감을 받은 「New York USA」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솔로 음반 작업과 병행해서, 여가수와 여배우들에게도 많은 노래들을 작곡해줬다. 프랑스 걀(France Gall), 레진(Regine), 달리다(Dalida), 발레리 라그랑쥬(Valerie Lagrange), 미레이유 다르크(Mireille Darc),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coise Hardy) 같은 프랑스 여인들은 물론이고,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 페툴라 클락(Petula Clark) 등의 영국 여가수들에게도 노래를 제공했다. 아마조네스의 유일한 남성이었다!

1966년 두 번째 아내 베이트리체와 이혼한 그는 1968년 가을부터 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브리지뜨 바르도와 본격적인 사랑과 전쟁에 돌입했다. 세르쥬는 BB를 위해 「Harley Davison」 「Comic strip」 「Bonnie and Clyde」 「Initials BB」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 퍼레이드를 안겨줬다. 예쁘장한 바비 인형에 머물렀던 BB는 세르쥬를 만나면서 팔색조의 매력을 가진 톱스타로 환골탈태했다. 하지만 뜨거운 감자 「Je t'aime... moi non plus」의 발매 여부를 두고 서로 논란을 벌이다, 결국 BB는 남편의 품으로 돌아갔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비비와 헤어지기 무섭게 그는 삐에르 그랭블라(Pierre Grimblat)의 영화 <Slogan>의 촬영장에서 스물두 살의 영국 여성 제인 버킨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스윙잉 런던(Swinging London)을 대표하는 신여성 제인 버킨과의 사랑은 세르쥬 갱스부르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제인 버킨의 가녀린 음색과 세르쥬 갱스부르의 중후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1969년 싱글 「Je t'aime... moi non plus」는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며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제인 버킨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부터 세르쥬는 다른 여성 가수들에게 곡을 주는 것을 거의 중단했다(역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오직 제인을 위한 음악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71년 세르쥬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음반 <Histoire De Melody Nelson(멜로디 넬슨의 이야기)>이 탄생했다. 중년 남성 세르쥬와 성적 매력으로 둘러싸인 십 대 소녀 멜로디 넬슨의 ‘비정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테마로 한 작품은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해 4월 세르쥬 갱스부르에게 예술적 영감을 심어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세 달 후에는 제인 버킨과의 사이에서 딸 샤를로뜨(Charlotte)가 태어났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 이 글은 //www.rfimusique.com의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글 / 안재필(rocksacri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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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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