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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가 선물한 우리의 인연

그해 초에 프랑스 보르도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 인터넷 펜팔 사이트에 가입했는데, 그 사이트에서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지 않은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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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초에 프랑스 보르도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 인터넷 펜팔 사이트에 가입했는데, 그 사이트에서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지 않은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겨울, 내 인생을 바꾼 두 번째 우연이 찾아왔다.

그해 초에 프랑스 보르도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 인터넷 펜팔 사이트에 가입했는데, 그 사이트에서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지 않은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백일 전 보르도로 떠났다가, 이국의 땅에서 태평하게 공부하는 내 모습에 알 수 없는 환멸을 느껴 한 달 만에 서울로 돌아와 버린 이후 처음으로 받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 메시지 하나가 향후 4년 간 내 인생을 통째로 흔들어놓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무언의 메일에 흥미를 느껴 메시지 하단에 연결되어 있던 보낸 이의 프로필을 무심코 확인했다. 그리고 몇 줄 되지도 않던 그의 짧은 프로필을 읽어 내려가는 사이 그만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마치 갑작스러운 데자뷔처럼,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던 글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자기소개: 태양과 비, 고요와 소음을 동시에 좋아함.
신체 사항: 짙은 갈색 머리에 녹색 눈.
외형 묘사: 구멍 난 바지에 짝 다른 양말.
구사 언어: 프랑스어, 영어, 우르두어.’

메시지를 받기 며칠 전이었던 랭보의 기일에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떤 글귀를 적어내려 갔었다. 보르도 유학을 파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랭보는 더욱더 슬픈 존재가 되어 있었고, 나는 두 달 동안 혼란과 아쉬움으로 얼룩진 두서없는 글들을 써 내려갔다. 그것도 그런 글들 중 하나였다. 랭보를 향한 절망적인 마음을 구겨진 백지 위에 토로하던 나는 불현듯 그가 현시대에 환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기대감에 휩싸였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뻗어가는 직감의 힘에 의해 그의 환생을 서술하기에 이르렀다. 휘갈기듯 적어 내려갔던 그 글귀, 내가 랭보의 환생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태양과 비, 그리고 고요와 소음을 동시에 좋아할 것이 분명해. 지금 이 순간 구멍 난 바지에 짝이 다른 양말을 신은 채 낡은 계단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그는, 곧 태양이 질 때 여명처럼 남길 붉은 흔적 너머로 영롱한 녹색 눈을 반짝일 거야……. 그는 유럽도 아프리카도 지겨워져서 이젠 파키스탄에 가려고 우르두어를 배우고 있을 거야…….’

놀랍게도 내가 상상했던 랭보의 환생을 그대로 연상케 하는 이 미지의 인물의 프로필은 컴퓨터를 끈 후에도 머릿속에 아른거리며 나를 괴롭혔다. 랭보, 그 랭보가 나와 같은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덧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기에 나는 죽은 랭보를 위해 더 슬피 울게 될 뿐이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2005년 11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 나는 이 미지의 인물에게 용기를 내어 답장했다. 나는 그에게 랭보의 환생과 관련해 가슴을 쓸어내린 사건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도 장문의 메일로 답장을 보내왔다.

사실 그는 우르두어는 배울 계획조차 없던 스무 살의 평범한 프랑스 청년이었다. 그가 장난 삼아 만들었던 프로필,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냈던 메시지 한 통이 내게는 더없이 결정적인 우연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리도 자주 얘기하는 ‘운명’이라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첫 메일 교환 이후로도 계속해서 진지한 메일들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메일을 통해 삶과 자유, 세계와 자연을 논했고, 서로가 꿈꾸는 여행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랭보를 향한 그리움에 지쳐 있던 나는 이렇듯 우연히 만난 낯선 이와의 메일 교환으로 천천히 미소를 되찾게 되었다. 순수하면서도 깊이 있는 그의 메일로 아침을 여는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기에, 나는 그가 혹시 랭보가 보낸 작은 선물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내게 뜻하지 않은 선물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내 허파 밖에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나이자 아프리카라는 궁극의 땅을 찾아, 아니 그보다 더한 극단도 찾아 함께 떠날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내가 이듬해 동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메일을 통해 간헐적으로 연락을 유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도 부르키나파소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동아프리카에서 랭보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사이,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레오의 농부들과 젖은 이마를 닦으며 푸른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아프리카를 떠난 우리 두 사람은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작은 도시, 생브리외Saint-Brieuc의 기차역 앞에서 처음 만났다. 구멍 난 바지에 짝 다른 양말을 신고 나타났던 그는 내가 상상했던 아름다운 미소를 갖고 있었다. 그를 알게 된 지 4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비로소 랭보라는 심연의 존재를 가슴 한켠에 고요히 묻어둘 수 있게 되었다. 열여덟 살, 꿈 많던 나날 폭풍처럼 나타났던 내 19세기의 연인은 이제 오랜 감정의 화석이 되어 기억의 언저리를 한없이 맴돌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로 인해 알게 되었던 슬픔이 찬란하게 아름다웠노라 혼잣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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