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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밥 딜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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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은 결코 스스로 구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과도 같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혁시켜온 다작가(多作家)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 부를 만한 예술가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밥 딜런은 피카소, 앤디 워홀, 마일즈 데이비스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아티스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60년대 초반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40여 년에 걸쳐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음악적 정체성은 시대에 따라 몇 번이고 큰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러한 그의 연대기 속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의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1965년이다.

포크의 지지자들은 통기타와 각종 어쿠스틱 악기들이 가지는 소박한 선율만이 그들의 고결한 정신을 대변한다고 굳게 믿었다. 1962년 데뷔 이래 딜런은 컨트리 포크의 전설적 영웅 ‘우디 거스리’의 계승자로서 그 무렵 절정을 맞이하고 있던 ‘포크 리바이벌 붐’을 타고 ‘포크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4년을 기점으로 딜런에겐 음악적, 외향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시는 비틀즈의 성공적인 미국 상륙에 힘입어 대대적인 영국 밴드의 침공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포크 특유의 고루함에 슬슬 염증을 느껴가던 딜런은 ‘메이드 인 잉글랜드’의 새로운 사운드와 스타일에 점차 매료되어 갔다. (패션 스타일 또한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모즈룩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64년 발표한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과 65년 4월의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이미 변화의 조짐을 보였던 딜런은 같은 해 여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해 가히 충격적인 변신을 감행한다. 그는 포크의 정석에 다름 아니었던 통기타 한 대만의 연주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록 밴드의 대형을 꾸려 무대에 섰다. 당시 백 밴드의 구성원이었던 알 쿠퍼(키보디스트)와 마이크 블룸필드(기타리스트)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의 멤버이기도 했다. (이들은 향후 블루스 록계를 석권하는 콤비가 된다. 1968년 작 <Super Session>을 들어보시라!)

그 무대에서 딜런은 사실상 포크의 ‘용도 폐기’를 선언했다. 록 뮤지션으로 전향한 새로운 딜런의 모습에 포크 팬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와 그의 밴드는 야유 세례가 퍼부어지는 가운데 공연을 강행해야만 했다(단 세 곡을 마친 채 무대에서 내려옴). 강한 메시지 전달에 음악적 가치를 둔 급진적 뮤지션의 팬이면서도 그 변화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자는 포크 팬들 사이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딜런은 이에 아랑곳 않고 같은 해 7월 곧바로 싱글 발표를 한다. 60년대 서구 청년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전설적인 싱글 <Like A Rolling Stone>. 그렇게 그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것은 곧 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사실 <Like A Rolling Stone>은 러닝타임이 6분 이상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긴 싱글 컷이었음에도, 전미 차트 2위에 까지 오르는 (영국에서는 4위에 랭크)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것은 당시 라디오 방송 관례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때가지 방송되던 팝 싱글은 3분 내외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시대는 그러한 다양성을 필요로 하고 있던 것이리라. ‘시대정신의 발현’ 또는 ‘시대를 지배하던 정신에 대한 강력한 반항’의 표현으로서, 록 음악은 밥 딜런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65년 11월 딜런은 25세의 전직 모델 ‘사라 라운즈’와 극비리에 혼인식을 치르고 이듬해 1966년 봄 호주와 유럽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딜런의 연주 여행에 동참하게 된 새로운 백업 밴드의 이름은 ‘더 혹스’(유명한 The Band의 전신). 전후반으로 나뉜 공연 프로그램에서 1부는 딜런 홀로 플레이하는 어쿠스틱 스테이지, 2부는 ‘더 혹스’를 대동한 로큰롤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1966년 7월, 딜런은 자택인 우드스탁 근처의 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몰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기나긴 요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고는 당시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와 달리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가 뮤직 비즈니스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의도로 자의에 의해 부풀려진 부분이 크다고 전해진다. 매니저인 ‘앨버트 그로스맨’에 대한 불신감과 무리한 투어 일정에 따른 심신의 피로, 그러한 와중에도 강행해야 했던 앨범 제작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신격화하는 언론 공세에 대한 초조감…… 모터사이클 사고는 그런 딜런에 있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후 몇 개 정도의 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외하곤 1974년까지 콘서트 활동을 일체 중단하기에 이른다.

그는 우드스탁에 집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마치 은둔자와도 같은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 그와 마찬가지로 우드스탁에 정착한 ‘더 밴드’의 멤버들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다. 한때 ‘로니 호킨스’라는 블루스 록계의 보컬리스트의 백 밴드(이 시기 밴드명은 ‘더 혹스’ the Hawks)로서 4년 가까이 투어 활동을 한 ‘더 밴드’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베테랑 투어 밴드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기교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음악적 지식을 갖춘 훌륭한 아티스트의 집합체였다.

‘더 밴드’의 멤버들은 ‘빅 핑크’라 이름 붙인 임대주택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곳 지하에는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스튜디오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한 딜런이 ‘더 밴드’의 멤버들과 즉흥적인 세션을 가지게 되는데, 그때 녹음한 마스터 테이프가 어느샌가 해적판으로 나돌게 되며 그때까지 완전한 무명이었던 ‘더 밴드’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대망의 데뷔 앨범 <Music From The Pink>을 발매하게 된다.

더 밴드와의 세션 후, 활동을 재개한 딜런은 컨트리 뮤직의 성지 내슈빌에서 새 앨범 녹음에 착수한다. (역시나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전작 <Blond On Blond>(1966년) 또한 내슈빌에서 녹음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새로운 경향에 눈 돌릴 무렵, 굳이 보수적이고 한물간 음악으로 취급받고 있던 컨트리 뮤직을 선택한 것이었다.

서부 개척 시대 무법자의 이름에서 착안한 앨범 <John Wesley Harding>은 같은 내슈빌에서 녹음을 했음에도 전작인 <Blond On Blond>(약물 사용의 영향이 농후한 작품)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하나의 테마로서 등장시킨 작품으로, 이러한 방향성은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더욱 극명해지며 많은 팬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후 1969년 <Nashville Skyline>(1969년), <Self Portrait><New Morning>(1970년),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1971년)를 연이어 발표한 뿐, 공연 일정도 없이 앨범도 발표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계속된다.

딜런의 부활은 ‘더 밴드’와 함께 시작한 콘서트 투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공연의 호평에 힘입어 같은 시기 발매한 오랜만의 정규 앨범 <Planet Waves>가 무려 전미 앨범 차트 넘버원에 랭크되었다. (이 시기의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은 <Before the Flood>라는 타이틀로 1974년 발매되었다. 이것 또한 필청 아이템!)

다시금 예전 활력을 되찾은 딜런은 75년 새 앨범 <Blood On The Tracks>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당시 이혼 직전 상태에 있던 ‘사라 딜런’과의 갈등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고통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임에도, 그의 7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Bob Dylan - 「Hurricane」

이듬해 발표한 앨범 <Desire>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살인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흑인 프로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석방을 기원하며 만든 노래 <Hurricane>은 딜런에게 있어 오랜만의 히트 싱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라이브 투어 ‘롤링 썬더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롤링 썬더 리뷰’는 콘서트 투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쇼였다. 주역은 물론 딜런이었지만, ‘더 버즈’의 ‘로저 맥귄’, ‘존 바에즈’, ‘티 본 버넷’, ‘로니 브레이클리’, ‘앨런 긴즈버그’, ‘로버타 플랙’, ‘죠니 미첼’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가 게스트로 대거 출연했다. 딜런은 훌륭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호평을 얻었으며, 투어를 배경으로 한 세미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투어는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점차 예전의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매회 네 시간에 걸친 기나긴 콘서트는 점차 멤버들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시켜 갔으며 멤버들 사이에 코카인이나 각성제 등의 약물 사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딜런 또한 오랜 친구였던 ‘필 오크스’(Phil ochs, 1940~1976, 미국 출신 포크 락 싱어송 라이터. 1960년대 월남전 반대, 인종차별 반대, 반핵 등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던 ‘프로테스트 포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하나)의 자살과 아내 사라와의 이혼 문제로 인해 점차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Bob Dylan - 「Knockin' On Heaven's Door」

그렇게 반짝하는 황홀한 순간이 지나고 딜런에게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예전처럼 활동을 멈출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사라와의 이혼 소송, 앨버트 그로스맨의 법정 투쟁은 모두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 자금은 로열티 수익만으론 도저히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앨범은 기독교 색채가 너무 강한 나머지 기존 팬들에게마저 외면당하는 등, 그의 수익은 점점 감소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 유일한 해결책이란 투어를 돌며 현금을 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 그는 대대적인 월드 투어에 나서게 된다.

월드 투어를 마친 그는 쉴 새 없이 앨범 제작에 매진한다. <Slow Train Coming>(1979년), <Saved>(1980년), <Short of love>(1981년), <Infidels>(1983년), <Empire Burlesque>(1984년), 그리고 무려 LP 다섯 장짜리의 대작이 된 미발표 곡을 포함한 베스트 앨범 <Biograph>(1985년), <Knock out loaded>(1986년), <Down in the groove>(1988년), <Dylan & The Dead>(1989년) 등 차례차례 앨범을 발표하지만 개중에 높은 평가를 얻고, 만족할 만한 판매고를 올린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노래를 집대성한 작품인 <Biograph>와 ‘로이 오비슨’ 그리고 ‘조지 해리슨’ 등 예전의 동료들과 함께 놀이 감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앨범 <Traveling Wilburys Vol. 2>(1988) 정도였다.

그 즈음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하던 그는 수많은 용병(?)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데뷔 당시 ‘뉴웨이브계의 밥 딜런’이라 불렸던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는 <Slow Train Coming>의 작업에 본격 투입되었고, ‘톰 페티 앤 더 핫브레이커스’가 딜런의 투어 밴드로 참가했으며,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백 밴드 ‘E 스트리트 밴드’가 리코딩에 참가, 레게 뮤직계 최고의 리듬 콤비 ‘슬라이 던바 앤 로비 셰익스피어’가 리듬 파트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를로스 산타나’와 함께 투어를 개최, 거기에 ‘그레이트풀 데드’가 참가하기도 하였다. 일견 화려한 라인업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밥 딜런의 단독 라이브라고 하기엔 집계가 곤란할 만큼 일종의 궁여지책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Bob Dylan - 「Like a Rolling Stone」

이 시기 딜런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게 되며 당시 그러한 상황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딜런은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투어 도중, ‘그레이트풀 데드’의 멤버로부터 아예 자신들의 밴드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게 되고 이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그 건에 관해 ‘데드’의 멤버들은 논쟁을 벌이며, 급기야 찬반 투표까지 벌였다고 하는데, 만약 그때 ‘데드’의 멤버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면 과연 그의 향후 행보는 어떠했을까? 음악계에서 밥 딜런은 사라질 뻔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1989년 발표된 앨범 <Oh Mercy>는 ‘다니엘 라노아’를 프로듀서로 기용한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지만, 역시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다. 1990년에는 당시 주가를 높이던 ‘워즈 형제’가 프로듀서로 참가한 앨범 <Under the red sky>를 발표하지만 이것 또한 전혀 판매고에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이후 7년간 앨범 작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딜런은 그런 악재 속에서 ‘네버 엔딩 투어’라 명명한 투어를 시작한다. 이것은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 문제와 음악적인 영감 부족으로 고민하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도피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1992년 그는 연간 통산 105회 공연을 실시했다. 3일에 한 번꼴로 세계 어딘가에서 노래하고 있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연간 100회에 가까운 속도로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97년 딜런은 <Oh Mercy> 이후 오랜만에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와 콤비를 짜고 마이애미의 ‘밤 테리어 스튜디오’에서 7년 만에 정규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 이 앨범 <Time out of mind>는 블루스 색채가 짙은 포크 록 스타일의 악곡에 과거의 걸작 <Blood on track>을 더욱 심화시킨 듯한 심오한 노랫말이 담겨 있으며, 거기에 ‘다니엘 라노아’의 프로듀스가 창출해낸 독특한 무드가 결합되어 따스하고 예스러우면서도 딜런 특유의 날 선 예리함과 진보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이 앨범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 또 한번 록 음악계의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그러한 성공의 기쁨에 도취할 새도 없이 즉시 투어를 재개한다. 앨범 타이틀과 동명인 <Time out of mind>라 명명된 투어를 개시하며 1998년 연간 통상 103회에 이르는 공연을 가졌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그는 여전히 콘서트 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철저히 사생활을 숨겨왔던 과거의 영웅은 스스로 그 사생활을 지워버릴 듯이 여생을 공연에 바치고 있다. 사생활을 잃어버린 천재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오늘도 세상 어딘가의 관객과 마주하며 예의 그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1993년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콘서트에 출연했던 아티스트 중 단연 돋보였던 인물은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보컬리스트인 ‘시네이드 오코너’였다. 반체제적이고 급진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했는데, 역시나 그 콘서트 직전에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에서 로마교황의 사진을 카메라 정면에서 찢어버리는 행동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것이었다. 그것은 여성의 낙태를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항의 표시였지만 그날 콘서트에 온 관중은 그런 그녀에 대한 반감에서 가혹하게 야유를 퍼부어댔다. 결국 그녀는 야유의 폭풍 속에 ‘밥 말리’의 <War>를 단 몇 소절 무반주로 부르고는 무대를 내려와야 했다. 이때 그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을 밥 딜런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천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은 결코 스스로 구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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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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