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름이 끝날 무렵, 키 140cm 남짓에 동그란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허름한 레코드점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한참을 서성이더니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보다 보라색 케이스의 테이프를 집는다. 그 아이는 가격을 지불하고 총총히 걸어 나간다. 먼지 낀 레코드점 유리문 밖 자그마하게 찍히던 발걸음 뒤로, 무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자아이는 스물넷이 되었지만 여전히 키가 작고 안경을 쓴다. 그리고 여전히, 서태지의 팬이다.
모습을 숨긴 채 음반을 낸 사람의 팬이 된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이제껏 서태지가 시도한 음악적 변신 중 가장 난해하고도 본격적이라 회자되곤 하는 <5집> ‘Take 시리즈’에 초등학생이 매료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전교를 통틀어 주변에 서태지의 팬이 한 명도 없었던 상황에서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사람을 집중케 하는 힘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팬이 되었고, 따라서 그를 알아야만 했다. 나름대로 아주 논리적인 절차라고 생각했지만, 어찌됐건 “쟤는 비정상적인 노래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이전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어린애의 역주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0년대,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
다음은 나의 역주행 보고서다.
1992년 서태지의 데뷔를 설명할 때면 언제나 “혜성같이 등장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 말 그대로, 서태지의 등장은 마치 혜성과도 같았다. ‘기존에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 ‘기존 체제를 반역하는 통렬한 가사’ 덕이 컸지만, 기실 서태지가 당시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음악계의 변혁은 문화계의 변혁이었고, 의식의 변혁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사회를 보는 눈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기존의 틀을 깨어 버린 그의 과감한 패션들과 쏟아지는 사회의 화살에 맞서는 그의 자세는 당시 청소년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라 울부짖는 당시 한 소녀의 발악처럼 서태지는 가려운 곳 긁듯 시원하게, 청소년들의 코드를 바깥으로 내질러줬고, 마찬가지로 청소년들 역시 그들 자신을 대변하기 위해 서태지라는 카드를 내세웠다.
그래서 일명 ‘서태지 세대’들은 그저 그런 신세대가 아닌 ‘X세대’이기도 하다. 기존 대중문화가 기성세대의 낭만을 좇는 데 주력했다면, 서태지를 필두로 한 X세대들은 탈권위주의적이고 개성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몹시 반항적이다. 그러나 단지 서태지가 함의하는 어떠한 반항성 때문에 X세대가 그에게 열광한 것은 아니다.
일정 부분 그러한 면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반항이 ‘결국엔 정당했다’는 데 있다. 서태지와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이루어낸 저 사전심의 철폐며 저작권 투쟁을 보라. ‘정당한 반역’을 보고 자란 세대는 지금, 30대 혹은 40대인 ‘어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서태지에게 열광한다. 그렇다면 서태지 혁명은 거기서 멈추는가. 그 시대를 겪지 못한 나의 역주행은 거기까지이지만, 그를 겪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백 명의 대중보다 한 명의 마니아를 원한다
6집으로 돌아온 서태지는 또 다른 파격을 선보인다. 매우 강렬한 록음악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이전 ‘아이들’ 시절에서 볼 수 없었던 차갑고 강렬한 이미지를 내보였고,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이전 곡들과는 다르게 매우 난해하고 시적인 가사를 내놓았다(물론 이 특징들은 5집에서도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앳되던 ‘어린 왕자’의 모습은 어디 가고 붉은 레게머리에 과격한 액션을 취하던 서태지에게 쏟아지던 비난은 이전의 그 어떤 비난들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대중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은 물론, 인디밴드며 여타 대중가수들도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음악적 변신이나 비주얼 변신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는 굉장한 변화였다. 더 이상 ‘서태지 세대’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던 팬들은 오히려 그를 중심으로 더욱 응집력이 강해지면서 ‘마니아 문화’를 탄생시켰다. “나는 백 명의 대중보다 한 명의 마니아를 원한다”는 서태지의 말마따나 ‘서태지 세대’가 아닌, ‘서태지 마니아’가 등장한 것이다. ‘서태지 마니아’는 ‘서태지 세대’와는 달리 시간의 범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니아’라는 개념은 언뜻 좁은 범위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사실 ‘세대’보다 훨씬 개방적이고도 강력한 의미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역사에 여러 세대를 포섭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대중이 서태지에게 등을 돌린 상황에서 그들에게 “서태지를 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들 내부에 들어온 ‘신생’들에게는 서태지를 겪을 수 있는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다. 사전심의 폐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은퇴를 겪지도 않은 포실한 N세대들은 X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일들을 자기 일처럼 추억하고 그들의 역사에 감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서태지와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어 행복하다.
2010, 아직도 우리는 서태지를 원해요
7집의 이모코어와 8집의 네이처 파운드를 들어보면 확실히 서태지는 편해진 것 같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아마 ‘유해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로소 내보이는 그 부드러움이 결코 유약하지는 않다. 여전히 그는 거대한 사회적 의미이며 그가 만들어 내놓는 결과물들 역시 ‘괴물’이라는 평가가 어울릴 정도다.
자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거나 ‘서태지 심포니’를 통해 거장 톨가 카쉬프와 협연하는 등, 그는 아직도 깨부수고 공정(工程)하며 시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가 ‘아이들’일 때,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깨워온 사회의식들은 그것을 겪은 현대 한국사회의 주역들로 인해 유효하다.
나이를 들먹이기 무색하게, 그를 흡수하는 팬들은 이미 우리 사회를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이지 않은가. 오래된 팬들이면 오래된 대로, 새로운 팬들은 새로운 대로 수많은 서태지가 창조되고 발견된다.
그런데 서태지 혁명론은 왜 언제나 1집에서 4집까지에만 머무는가. 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만이 ‘혜성 같은 등장’이며, ‘신선한 충격’인가. 그의 8집 전국 투어 ‘뫼비우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팬들은 과연, 저 ‘어른들’뿐인가.
이젠 ‘태지 마니아’다. 서태지의 영향력은 그래서 ‘세대’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문화대통령’이라는 오래된 별명답게 그는 대한민국 문화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엎은 장본인이자, 그의 노래 가사대로 ‘이젠 너를 통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회인들의 의식, 그 기저의 깊은 숨소리인 것이다.
글: ‘태지 마니아’ 성지선
사진: 서태지컴퍼니 제공
2010/05 성지선(luvkelly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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