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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알퐁스 드 툴루즈-로트레크 백작부인」 캔버스에 유채, 93.5x81cm, 1883, 알비, 툴루즈-로트레크 박물관 | |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년)의 어머니
알퐁스 드 툴루즈-로트레크 백작부인(Countess Alphonse de Toulouse-Lautrec)
결혼 전 이름은 아델 조에 타피에 드 셀레랑(Adele Zoe Tapie de Celeyran)
로트레크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자매간이었다. 그의 아버지 알퐁스는 중세 이래로 프랑스 남서부의 막강한 영주였던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델의 가문은 지중해 가까운 곳에 성과 포도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종사촌간이었던 부모의 결합은 그의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충동적인 격정”의 발로였으나, 이 근친결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심한 신체적 기형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알퐁스 백작이 사냥과 엽색에 탐닉하여 알비 인근의 성을 비우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결혼 생활이 힘들어지자 로트레크의 어머니는 신앙 생활과 아들의 양육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앙리는 비록 활발한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서 기쁨을 발견했다. 훗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필요가 없었던 그가 파리에 눌러 살면서 화가가 되어 가문의 위신에 누가 될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의 부모는 적잖은 우려를 나타냈다.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통속적인 사창가, 외설적인 카페, 시끄러운 카바레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즐겨 드나들었다. 그의 인상파 화풍은 “대강 썰어놓은 채소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에서 가지고 다니기 쉬운 마분지 조각에 잰 솜씨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그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선명하고 눈길을 끄는 포스터들을 그렸으며, 이 방면에서 그의 영향은 20세기에까지 미친다. 그러나 그가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들은 도회지의 격렬한 환락에 지친 그가 어머니에게서 구하던 고즈넉한 평안을 잘 보여준다.
알퐁스 백작부인은 아들이 그린 거의 모든 초상화에서 묵직한 눈까풀에 덮인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때로는 책을 읽고 있으므로 그럴 때도 있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인 그 표정은 그녀의 절제된 성격을 말해준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3년에 그녀는 보르도 인근의 말로메에 또 한 채의 성을 샀고, 그곳 포도원을 돌보는 일로 소일했다. 로트레크는 이곳으로 종종 어머니를 찾아갔으며, 찻잔을 앞에 놓고 있는 이 유명한 초상화도 아마 그곳에서 그려졌을 것이다. 마지막에도 그는 말로메의 어머니 곁을 찾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이 남긴 그림들을 보잘것없는 습작이라며 치워버리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리는 데 여생을 바쳤으며, 가문의 본거지인 알비 시에 툴루즈-로트레크 박물관을 건립해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