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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화가의 어머니」 종이에 콩테 연필, 31.2x24.1cm, 1882~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 | |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91년)의 어머니
에르네스틴 쇠라(Ernestine Seurat)
결혼 전 성은 페브르(Faivre)
쇠라는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창작에만 전념했고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극진했고,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밀리에 애인과 동거하고 있었지만 저녁식사는 날마다 어머니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멀리 시골에 살았고 손위 누이들과는 열 살 이상 나이 차가 났으므로, 아들과 어머니 두 사람만의 파리 살림이었다. 쇠라 부인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훌륭한 대화 상대였고, 아들의 작품뿐 아니라 동시대 미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다. 일례로, 그녀는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에게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쇠라는 인상파로부터 발전한 점묘법을 사용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시대 이전에 발전한 과학적 이론 덕분에 그와 그의 동시대 화가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할 수 있었다. 물감은 꼭 팔레트 위에서 섞을 필요 없이, 튜브에서 곧장 캔버스 위의 작은 점들로 옮겨질 수도 있었다. 그런 다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눈이 물감을 섞게 될 것이었다.
그의 회화 속 인물과 사물들은 이런 기법 상의 제약 때문에 정적으로 보이지만, 스케치는 훨씬 더 부드럽다. 그는 두껍고 거친 종이 위에 숯과 비슷한 콩테 연필을 사용했다. 그는 종종 어머니를 그렸는데, 이 초상화에서는 이마와 머리칼의 경계선, 턱선과 이목구비, 이 모든 것의 흐릿한 윤곽이 불분명한 배경 속으로 녹아든다. 손의 윤곽 역시 선명하지 않다. 명암의 대조는 뚜렷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림자처럼 희미한 영상이 조용한 위엄을 띠고 있다. 종이의 우둘투둘한 질감 덕분에 콩테의 먹빛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점묘화와도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 초상화는 1883년의 <살롱>에서 낙선했지만, 입선한 또 한 점의 그림에 대해 비평가 로제 마르크스는 “명암에 대한 탁월한 탐구이며, 뚜렷한 존재 가치를 갖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쇠라는 이른 나이에, 어머니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작품이 잊히지 않게끔 그의 명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는 편지와 신문 기사, 그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이 보내온 각종 문서들을 모아두었다. 오늘날 그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회화의 기술적 접근에 변화를 일으켜 20세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