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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남 탓하기’ 놀이

도쿄에서 만난 책, 영화 그리고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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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만난 소설과 만화,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칼럼에서 나누고 싶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가끔 엿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연재를 시작하며

2010년 4월 1일부터, 도쿄에 살고 있다.

사소한 자랑질로 시작해보련다. 도쿄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동네는 ‘일드 폐인’들의 성지와도 같은 후지TV 본사가 있는 오다이바다. 날씨가 좋은 주말엔 운동복을 입고 후지TV를 출발해 비너스포트의 대관람차를 돌아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의 무대인 완간경찰서까지 산책을 하곤 한다. 가끔은 유리카모메를 타고 시내로 나가, 록본기 힐즈 근처 서점 츠타야에서 ‘스타바’(일본에선 스타벅스를 이렇게 부른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우아하게 잡지를 뒤적인다. 일본에 살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도쿄서 가장 세련된 이 서점에서 현지인의 여유 있는 포즈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10여 년간 그럭저럭 잘(?)해 오던 일을 그만두고 도쿄에 가서 살아보겠다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용기 있다” 아니면 “미쳤냐” 였다. 과연 용자(勇者)의 선택인지 광인(狂人)의 선택인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도쿄에 온 지 두 달,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역시 두 가지로 갈린다. “재밌니?” 혹은 “후회 안 해?”

뭐, 말하자면, 재밌기도 하고 후회도 한다. 서른 즈음을 지나간 이라면 알겠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늘, 웃고 있는 건 아니다. 올봄 도쿄에는 비가 유난히 잦았는데, 비 내리는 날이면 한국에서도 늘 그랬듯 히키코모리 놀이를 즐겼다. 맥주 한 캔과 함께 원조 건어물녀의 포즈로 늘어져 있자면, ‘내가, 지금, 여기서, 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육하원칙에 따라 정연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재미를 찾아내고야 말았으니, 이름하여 ‘남 탓하기’ 놀이다.

***

1. 이게 다 하루키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살게 된다면, 그게 도쿄일 거라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예감해 온 일이었다. 열몇 살 인근부터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이 죄다 일본제(製)였던 탓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해피』 『야와라』 『몬스터』에서 시작해 내 인생의 만화 『이나중 탁구부』 『엔젤전설』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를 만났고, 오쿠다 히데오, 가네시로 가즈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에 열광했다.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했고,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과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은 언제라도 다시 보고픈 드라마다. 그리고 ‘거적때기 속에 감춰진 완벽한 외모’의 배우 오다기리 조와 아이돌 팬질의 참맛을 알려줬던 ‘평균 나이 서른일곱의 아이돌’ 스맙(SMAP)까지. 주말마다 10화짜리 일본 드라마 시리즈를 두 세트씩 작살내고, 틈틈이 버라이어티를 챙겨보는 생활을 1여 년간 계속하다 보니, “귀가 뻥 뚫려요”라는 어학 학습기의 광고가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자연스레 생겨난 ‘언젠가 도쿄에 살아보리라’라는 꿈, 그 막연한 결심에 ‘마흔 살이 되기 전’이라는 구체적인 스케줄을 잡아 준 건,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보니 어디선가 멀리?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먼 북소리』)라고 하루키는 멋지게 말했지만, 이 구절이 딱히 마음을 움직인 건 아니었다. 북소리가 들린다고, 그것도 아득히 먼 곳에서 가냘프게 들리는 북소리에 굳이 귀를 기울여가며,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 하루키처럼 세계 어디에 가도 밥벌이 정도는 여유 있게 해결할 수 있는 재능(그는 유럽 여행 중 『상실의 시대』『댄스 댄스 댄스』를 썼다) 같은 건 없을 뿐 더러, 배짱도 없었다. 가냘픈 북소리가 아니라 고막을 찢는 꽹과리 소리가 들려온다 해도, 귀를 틀어막으며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타야 하는 게 바로 생활인의 자세 아니었던가.

그러나 문제는, 하루키에게 다가왔던 그 마흔 살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거였다. 서른일곱에 유럽으로 떠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적었다.

마흔 살이라는 나이는 우리 인생살이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생의 고비가 아닐까 하고, 나는 오래 전부터(라고 해도 서른 살이 지난 후부터지만) 줄곧 생각해왔다. 특별히 뭔가 실제로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좋든 싫든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시험해 보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략)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내가 외국으로 나가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그런 생활은 일본에서는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젠장. 세계적인 대문호에게도, 귀를 틀어막고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타는 나에게도, 똑같이 마흔이 다가온다는 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하루키가 떠나고 싶어했던 그 나라 일본으로, 나는 떠나왔다.

2. 이게 다 저질 운동신경 탓이다

박민규 님께서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역설하신 그 인생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꽤 어린 나이에 체득해버렸다. 타고난 몸치로 100m를 22초대에 끊던 나는,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의지 따윈 없이 일찌감치 ‘절대 달리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운동회 날, 달리기가 시작될 즈음이면, 늘 배가 아프거나 화장실이 급해지곤 했다. 그런 아이였기에, 사토 다카코의 소설 『노란 눈의 물고기』의 주인공 기지마에게 한없이 끌렸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기지마는, 하지만 ‘어떤 일이든 죽도록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축구 시합에 골키퍼로 서게 된 기지마는 이렇게 생각한다.

흉한 몰골을 보이긴 싫었다. 눈에 번쩍 띄게 멋지진 못해도 상관없지만 초라해지긴 싫었다. 진지해지기가 두려웠다. 진지하게 하면 결과가 나온다.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된다. 진짜로 승패를 겨루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다. 져서 초라해질 일도 없다. 모든 걸 애매하게 해두면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히죽히죽 웃고 있을 수 있다.
- 사토 다카코, 『노란 눈의 물고기』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워터』다. 이 소설에는 정말 매력적인 고등학생 쇼운이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이 대학을 가지 않고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굴해지지 말라고 남들은 말한다. 노력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갖은 노력을 다해서 남들과 엇비슷한 자리에 서게 돼봤자…… 예를 들면, 출발지점까지 죽기 살기로 달려가야만 하는 사람과 자동차에 편히 앉아 도착하는 사람이 있다. 달려온 사람은 헉헉거리면서 또다시 출발점부터 달려나가야만 한다.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나라면 출발지점과는 다른 장소로 달려간다.
- 요시다 슈이치, 『워터』

일 년에 겨우 한 두 권씩 출간돼 속을 태우는 만화 『피아노의 숲』에는 천재 소년 카이와 수재소년 슈헤이가 나온다. 슈헤이는 항상 카이의 등을 바라보며 열심히 연습하지만, 자신이 한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카이는 먼저 저 멀리 달아나 있음을 깨닫고 매번 절망한다. 치열한 방황을 지나 청년이 된 슈우헤이는 어느 날 환한 미소를 띠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전 앞으로 절대 카이의 뒤를 쫓지 않겠어요. 그러면 카이의 앞에 있는 것을 평생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잘 못할 것 같은 일은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겁쟁이기도 했지만, 어쩌다 기를 쓰고 허둥지둥 뛰어가도, 항상 저만치 앞서 앞을 달리는 이들에 절망하고 말았다. 그럴 땐 끝까지 뛰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겠지만, 그들과 다른 레이스를 펼쳐보는 것도, 뭐 괜찮지 않느냐는 것.

3. “뭔가를 시작할 때의 내가 가장 겁쟁이고, 그리고 가장 용감하다”(『워터』)

4월 1일부터 도쿄에 살고 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기숙사가 있는 오다이바의 공원을 산책하거나, 록뽄기 힐즈 근처에 있는, 도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츠타야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잡지를 뒤적인다. 이곳에서 만난 소설과 만화,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칼럼에서 나누고 싶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가끔 엿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영희의 도쿄를 읽다>는 격주 월요일에 연재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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