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광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아마도 이것은 필 스펙터를 이르는 말일 게다. 록계의 리하르트 바그너라 칭해지며, 가수 중심의 음악계에 총괄자로서의 프로듀서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발전시킨 개척자적 존재인 동시에 강렬한 에고와 기이한 행동으로 얼룩진 삶을 산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월 오브 사운드의 발명은 그의 비길 데 없이 빼어난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스펙터 아미라고 명명된 일렉트릭 오케스트라(일렉 기타, 베이스, 드럼의 록 밴드 대형에 관현악 풀 오케스트라를 접목)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며 최대한 많은 악기의 하모니를 겹겹이 쌓아 올려 그 위에 따뜻하고 풍부한 에코 챔버(음장 효과를 얻기 위한 음향기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면서 거대하고도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를 창조해 냈다. 그의 황금기였던 60년대 초반에서 67년도까지, 단 몇 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진 그의 명곡들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독창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여러 대중음악 관련 문헌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에서 발전한 수많은 장르와 아티스트들의 역사 속에서도 월 오브 사운드는 하나의 독립된 챕터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 명의 아티스트를 위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필 스펙터가 스스로 틴에이저를 위한 심포니라 불렀던 월 오브 사운드는 동시대 브릴 빌딩의 틴 팬 앨리 팝(전통적인 재즈 팝을 계승하여 록큰롤과 접목을 시도. 제리 고핀과 캐롤 킹 두 작곡 콤비가 주축이었다), 모타운 사운드(백인 취향의 리듬 앤 블루스로 현대적인 팝의 근간을 이루었음. 역시 홀랜드-도지어-홀랜드의 작곡 트리오가 주축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를 배출)보다 혁신적인 것이었다. 사실 60년 이후 오리지널 록큰롤이 쇠퇴하며 무주공산이 된 음악 신에서 맨 처음 패권을 장악한 것은 예쁘장하고 반듯한 이미지의 백인 아이돌 가수들이었다. 그렇게 생기를 잃어가던 음악 신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필 스펙터가 창조해 낸 극상의 팝이었다. 미국적인 팝의 전통과, 록큰롤의 활기 넘치는 비트, 기름기를 쏙 뺀 도시적 R&B 감성, 그 모든 것을 솜씨 좋게 버무려 그야말로 거대한 소리의 벽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거의 모든 음악 장르가 같은 시대에 나온 예술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탄생했던 것인 반면에 월 오브 사운드는 단 한명의 아티스트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 스펙터는 194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949년 부친이 사망하고 그의 가족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페어팩스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학교는 허브 앨버트, 진 앤 딘, 제리 리버 등 무수한 음악인을 배출한 곳이었다. (레니 크레비츠, 건스 앤 로지스의 슬래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앤서니 키디스와 마이클 발자리 또한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와우!) 필 스펙터도 이곳에 재학 중인 무렵 밴드 활동을 시작하여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음향기기와 녹음 기술에 관해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무렵 고교 동창들과 테디 베어스를 결성해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 되던 해인 1958년, 테디 베어스는 데뷔 싱글을 발매한다. 싱글의 B사이드 곡이었던 「To Know Him Is to Love Him」이 예상치 않은 대박을 터뜨리며 무려 빌보드 1위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에 큰 자신감을 얻은 필과 그의 밴드는 곧바로 데뷔 앨범 <the Teddy Bears Sing!>을 발표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첫 앨범 제작 현장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필 스펙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프로듀서 레스터 씰의 조수로서 음향과 레코딩 기술의 노하우를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드높은 이상에 비해 당시 로스앤젤레스 음악 산업의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당시로선 뉴욕 정도가 음악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던 시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은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고교 선배인 제리 리버와 그의 파트너인 마이크 스톨러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줄 것을 간청한다. 당시의 음악계에 있어 리버&스톨러의 영향력이란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드리프터스의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기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흑인 R&B, 두왑 그룹) 곡을 비롯해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전미 넘버원의 송라이터 콤비였다. 그들은 흑인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를 백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 뿐더러, 백인으로서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곡을 제공하고 전반적인 프로듀스까지 해내고 있었다. 그들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배우며 프로듀서로서의 재능을 넓혀가고 있던 찰나, 필은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리버&스톨러와 그들이 작업을 전담하고 있던 거대 레이블 애틀랜틱 레코드 사이에 금전적인 갈등이 발생하며 시작되었다. 어느덧 시대의 총아가 된 그들은 이전까지 음악 업계에 전례가 없던 프로듀스 비용을 애틀랜틱 레코드에 청구한다. 그것이 인정되자, 그들은 과거 작업했던 작품들에 대한 비용까지 요구하며 나선 것이다. 그들의 이악스러움에 일은 점점 더 꼬여가고 있었다. 애틀랜틱의 경영자인 하메드 아티건과 제리 웩슬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그들은 리버&스톨러의 요구에 응하여 모든 비용을 지불하지만 곧바로 해고를 통보, 후임으로 그들의 제자였던 필을 채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견습생에 불과했던 그가 곧바로 진가를 드러내긴 힘들었다. 사실 그것은 그의 탓이라기 보단 애틀랜틱 전체의 문제였다.
당시 애틀랜틱 레코드는 벤 E. 킹(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Stand by Me」의 오리지널 싱어)과 드리프터스 등의 잘나가는 스타들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회사를 지탱해 온 간판스타 레이 찰스과 백인 아이돌 스타 바비 다린이 잇달아 경쟁사로 이적했고 거액을 들여 교섭 중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마저 RCA레코드에 양보해야 했다. 결국 남은 이들은 래번 베이커나 루스 브라운과 같은 전형적인 R&B 계열의 흑인 가수뿐이었다. 필은 그들의 프로듀스를 맡으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애석하게도 음반사의 매출 신장에는 조금의 성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애틀랜틱 아티스트들의 스타일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검은 것 이었으리라. 결국 이 시기 그가 제작한 히트곡이란 벤 E. 킹의 「Spanish Harlem」이 전부였다. 실의에 빠진 필은 애틀랜틱에 사표를 내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게 된다.
1961년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온 후, 절치부심한 필 스펙터는 옛 스승 레스터 씰과 함께 필레스 레코드를 설립, 드디어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던 사운드 메이킹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는 흑인 걸 그룹인 크리스털스로서, 그후 다렌 러브와 그에 대한 평가를 부동의 것으로 만든 더 로네츠 , 백인 소울 듀오 레이처스 브라더스가 차례차례 대박 행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필 스펙터의 황금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편곡자 잭 니체나 레온 러셀. 래리 넥텔 등의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초일류 뮤지션들, 거기에 뉴욕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가던 캐롤 킹이나 배리 만 등의 위대한 송라이터들을 한데 규합하여 그들의 재능이 빚어내는 사운드를 다중 녹음과 전례 없는 장시간의 녹음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소리의 벽을 만들어나가는 그의 독자적인 결과물, 필 스펙터는 단순한 구조의 팝 음악에 격정과 감동을 주입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소리의 마법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월 오브 사운드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한 사운드 메이킹은 수많은 추종자와 아류를 낳으며, 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명실상부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대중 음악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흐름은 밴드 사운드를 골자로 하는 록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오직 스튜디오에서의 고된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한 완벽한 사운드보다 단순하고 원시적인 에너지를 중시하는 흐름이었고, 그 덕분에 필의 존재는 점차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인생사새옹지마라 했던가. 그가 그렇게 부정했던 히피들의 여름에 이르자 그의 음악적 위업은 다시 세인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틀즈가 66년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끝으로 라이브 활동을 중단,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같은 시기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도 스튜디오에 처박혀 ‘화학’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앨범들이 바로 양 밴드 불후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Pet sounds>(1966)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이다. 이 두 앨범은 레코딩 기술의 측면에서 월 오브 사운드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후 비틀즈 최후의 앨범
<Let It Be> 프로듀스와 (이것은 존 레논의 의뢰에 의한 것으로 폴 매카트니는 필 스펙터가 작업한 곡들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해산 이후,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 각각의 솔로 앨범에 프로듀스를 맡게 된다.
70년대에 접어들어 그의 주요 활동으로서 역시 존 레논, 조지 해리슨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장의 앨범과 싱글 작업에 참여하지만, 프로듀서로서의 전성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마약 중독이 심각한 상태였으며, 기벽은 점점 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 기행과 난폭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한 사람이라는 낙인마저 찍힌 터였다. 권총에 대한 집착이 이상할 정도로 강해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러시안 룰렛을 즐겼고, 종종 스튜디오에서 연주자들을 위협하거나 폭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는 레코딩 작업 중 의견 대립 끝에 존 레논을 권총으로 겨누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스터 테이프(레코딩의 모든 과정이 끝난 발매 직전의 음원)를 가지고 잠적해 버리는 등 이상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1980년에 들어 뉴욕의 펑크록 밴드 라몬즈의 레코딩에 참여하며 오랜만에 관심을 모았으며 1989년에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그러나 2003년 자택에서 여배우 라나 클락슨의 시신이 발견되는데, 그는 즉각 살해 혐의로 체포됐지만 보석금 100만 달러를 내고 석방된다. 그는 약 6년에 걸쳐 자유로운 몸으로 재판을 받으며 라나 클랙슨은 자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홀로 월 오브 사운드라는 경이적인 사운드를 발명해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자신의 어떤 편집광적인 면모가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이상할 정도의 자기중심적 성향과 고독벽은 명백히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고도 보인다(그의 누이는 여러 해 동안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전성기에는 다행히 그러한 이상심리가 자신의 창작욕에 결합된 상태였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마음속의 심연은 점점 그를 잠식해 갔고, 결국엔 비벌리힐스의 커다란 저택에 틀어박혀 집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치 소리의 벽 저 깊은 곳까지 침잠해가듯 말이다. 그 탓인지 나는 월 오브 사운드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소리의 벽’이라는 원래의 의미보다, ‘마음의 벽’이라는 폐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그의 업적은 수많은 뮤지션과 프로듀서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현재에 이르러 그만의 독자적인 사운드는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 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자신은 언제나 그와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어느 순간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6년에 이르는 재판 끝에 결국 작년 4월 배심원단으로부터 2급 살인 유죄 평결을 받았다. 여러 정황과 증거를 통해 클럽에서 만난 클락슨을 자신의 맨션으로 초대한 후 입 안에 총을 넣고 쏴 죽인 혐의가 명백하다는 것이 검찰 측의 주장이었다. 필 스펙터는 최소 19년 동안 가석방이 불가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