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다시 보고 싶은 책
영상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평가 속에 폭발적 흥행을 기록한 영화, <아바타>는 그 제목의 기원이 인도 신화입니다. 고대 인도 신화에서 신이 인간 또는 동물과 같은 형상을 취하고 현실 세계에 내려오는 것을 ‘아바따라avatar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넘어와 오늘날 온라인과 영화에서 익숙한 ‘아바타’가 되었습니다.
영화, 책, 게임, 드라마 같은 콘텐츠 산업이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콘텐츠의 핵심인 ‘이야깃거리’를 찾는 작업의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로는 성공을 볼 수 없는 문화 산업의 현장은 콘텐츠 소재를 찾기 위한 방대한 배경 이야기 탐색을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신화는 다시 주목받습니다. 최근 개봉한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은 그 기원을 그리스 신화에 두고 있습니다. 사실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듯이, 많은 콘텐츠들은 역사와 신화에서 발견했던 인간사의 흥미로운 요소들에 대한 변주입니다. 미래 우주의 대서사시를 그려낸 영화 <스타워즈>는 명백한 시점을 드러내기 위해 첫 시작을 이렇게 연 바 있습니다.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그런 의미로 오늘은 신화를 읽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합니다. 다만 널리 알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는 좀 천천히 다루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갈수록 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북유럽 신화를 다뤄 보고자 합니다. 사실 명백하게는 책으로 분류되지 않는 구전 전승의 이야기가 신화이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가 필독 도서의 범주에 들어가는 점을 감안하여 ‘다시 보고 싶은 책’의 목록에 올려 봅니다.
북유럽 신화란 기독교가 유럽에서 보편화되기 전, 노르만 민족에서 전승되어 온 신에 관한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기독교 중심의 중세 유럽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춥고 황량한 북쪽의 이야기는 그러나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바이킹의 유럽 원정이라는 사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중세 즈음부터 노르만인들의 유럽 진출이 본격화합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전통에 의하면 재산과 토지의 상속은 모조리 장자에게만 귀속되도록 되어 있었기에, 장자가 아닌 자식들은 뭔가 다른 살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배를 타고 원정을 떠나는데, 이 모험과 약탈을 병행하는 함대가 바이킹vkings이었습니다.
뿔 투구에 벌꿀술, 거친 수염과 도끼로 상징되는 바이킹들은 용맹과 호전성으로 금세 북유럽 해안을 장악하고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지금의 독일 근방에 자리 잡았던 게르만족 또한 점차 영토 확장을 위해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북유럽인들의 이러한 확산에 의해 북구 신화 또한 그 영역을 넓혀 가지만, 정착에 성공한 북유럽인들이 결국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북구 신화의 영향력은 오히려 정착 이전보다 약해지면서 마침내 소멸하게 됩니다.
구전으로 주로 전승되던 북구 신화는 여기서 사실상 대부분의 전승을 잃어버립니다. 라틴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기독교 앞에서 구전 전승의 북유럽 신화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개종이 주로 지배 계급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단으로 낙인찍힌 북유럽 신화는 절멸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나마 오늘날 우리가 북유럽 신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일부 몇몇의 사람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스노리 스튀르들뤼손이라는 작가는 『산문 에다』라는 작품 속에서 흩어진 북구 신화의 편린들을 모아 정리합니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바이킹의 후손이자 역사가, 작가였던 그는 오늘날 북구 신화의 기본이 되는 뼈대 서사를 모두 문헌으로 정리했으며, 이 『산문 에다』를 바탕으로 하여 13세기경에는 아예 구전 전승에 사용되던 운율을 포함한 서사시 형태의 『운문 에다』가 기록되면서 북구 신화의 유일한 문헌 전승 구성이 완료됩니다.
이렇게 험난한 시절을 넘어서 간신히 이어져 온 북구 신화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주축이 되어 이어 온 유럽의 주류 문화 이면에서 일종의 민간 양식으로 살아남아 이어집니다. 건축과 사회 제도 같은 부문에서는 기독교와 그리스의 양식만이 두드러졌지만, 미술이나 민간 설화 등에서는 북구 신화가 품었던 내용들이 상당수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서양 비기독교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숲의 종족 엘프와 산속의 종족 드워프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까지의 명확함은 아니지만, 숲에 사는 가냘픈 요정의 형태와 땅 밑에서 쇠를 다루는 작고 강건한 난쟁이라는 개념은 북구 신화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특히 북구 신화는 20세기 이후부터 이른바 판타지라는 대중적 장르가 성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판타지의 시작이라 불릴 수 있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는 엘프가 쓰는 마법의 문자로 룬rune 문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북유럽에서 주술용 언어로 쓰던 루네rune 문자의 형태를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북구 신화는 기본적으로 대단히 호전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에,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영화나 게임 등의 소재로 매우 즐겨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딱히 이렇다 할 전투가 없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다채로운 전투와 용맹한 영웅들, 놀라운 무기들이 쏟아지는 북유럽 신화는 여러모로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SF 대중소설 『은하영웅전설』은 등장하는 사건과 사물 상당수에 북구 신화로부터 따온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젤론 요새의 주무기는 ‘토르의 해머’라는 거대한 양자포인데, 이는 북유럽 신화의 전쟁신 토르와 그가 들고 다니는 망치 ‘묠니르’로부터 가져온 이름입니다. 이 밖에도 소형 전투기에 신화 속에서 전사의 영혼을 건져 올리는 천사인 발키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북구 신화에 친숙하게 닿아 있는 이름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는 다른 판타지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물들의 작명이나 관계 설정에서 북구 신화는 이제 보편적인 차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보다 역동적이어야 하는 게임 분야에서는 더욱 북구 신화의 영향력이 강력합니다. 온라인 게임의 초창기에 해외까지 어마어마한 매출을 이끌었던 국산 게임 <라그나로크>는 아예 제목부터 북구 신화의 맨 마지막 장면인 라그나뢰크(신들의 숙명)라는 최후의 전쟁을 걸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유명한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는 북구 신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회사로, 대부분의 지형이나 지도, 사물에 북구 신화를 사용할 뿐 아니라 아예 최근작에서는 전체 스토리에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과 오딘의 아내 시프, 그리고 둘 사이를 갈라놓은 늑대 신 로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이름도 비슷하게) 넣기까지 합니다.
북구 신화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교류하는 신의 형태라기보다는 신들과 거인들이라는 두 종족 간의 대립 이야기를 다루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화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북구의 신들은 화를 잘 내고, 툭하면 싸우며, 늘 복잡하고 어려운 난관 앞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북구 신화는 사실 신화라는 이름보다도 영웅담으로 구성된 서사시인 사가saga 문학에 가까운 편입니다. 북구 신화에서 신들의 대장 격인 주신 오딘은 신이면서도 다른 신과 함께 멀리 모험을 떠나기도 하고, 심지어 라그나뢰크에서는 적에게 잡아먹히면서 종말을 맞습니다. 전사이자 마법사인 지혜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오딘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만큼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합니다.
오딘과 함께 신의 세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전투의 신 토르는 힘의 상징입니다. 지혜 다음의 서열에 서 있는 힘의 화신인 토르는 ‘묠니르’라는 던져도 돌아오는 망치를 통해 무적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화를 잘 내고, 두려움이 없는 이 신 또한 그 힘으로 다른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주로 신과 거인 간의 다툼에서 무력을 관장하는 정도의 모습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인간 같은 신들은 결국 늘상 대립하던 거인족과 마지막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라그나뢰크(신들의 숙명)라 예언된 최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세계는 모두 파괴되고, 신과 거인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한 채 세계는 멸망합니다. 그리고 멸망한 세계에서 새롭게 시작된 문명이 바로 지금의 우리 문명이라는 형태로 신화는 큰 예언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렇게 보면 북구 신화는 사실 구조상으로는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문명 앞에 존재했던 또 다른 문명이 가졌던 시작과 종말의 역사에 대한 예언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북구 신화의 신에 대한 숭배는 현재 시간대의 우리와 함께 하는 신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혜와 용맹의 가치에 대한 숭배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북구 신화는 신앙으로서의 뉘앙스보다는 영웅담에 대한 추앙의 형태, 다시 말해 영웅 전설로서의 의미가 더욱 두드러지는 형태입니다.
사실 신화의 재미는 이러한 영웅 전설로서의 재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는 주신 제우스보다 영웅 헤라클레스에 잡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신의 이야기, 또는 신과 인간이 교감하는 이야기가 중심인 기독교의 신화는 신성성에 비해 대중적인 재미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실제 인간의 감정과 유사한 신들의 행동과 용기에서 동질감과 교훈을 얻는 것이지,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징벌하고 칭찬하는 데서는 공감보다는 숭앙과 찬양만을 얻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대중문화의 시대에 급격히 부각되는 콘텐츠도 북구 신화와 같은 영웅담인 것입니다.
겨울이면 해도 잘 보이지 않는 설원 가득한 북유럽 어딘가에서 긴 겨울밤 내내 난롯가에서 이어져 오던 영웅들의 모험담은 신화가 되었고, 그 신화는 이제 한참 재미있는 거리를 찾는 대중문화 시장에서 다시 한번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험이 사라진 합리의 시대에 다시금 모험을 그리워하는 인간이야말로 그 본성을 타고 가자면 사실 신과 영웅이 아니었을까요. 설원을 가르던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21세기의 독자들에게 넘실거리는 상상력의 바다를 열어 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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