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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앞두고 이게 뭔가요?

안티민족·비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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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8년 전 이맘때, 어느 기초자치단체에서 펴내는 행정홍보용 소식지에 싣고자 썼던 리뷰를 ‘공개’한다. 이 글은 그 매체에 실리지 못했다.

먼저 8년 전 이맘 때, 어느 기초자치단체에서 펴내는 행정홍보용 소식지에 싣고자 썼던 리뷰를 ‘공개’한다. 이 글은 그 매체에 실리지 못했다. 어느 기초자치단체의 관계자께서 내가 고른 책과 리뷰의 내용이 ‘시의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해서다. 아마도 책제목이 그 기초자치단체 관계자의 심기를 거슬렀으리라.

명절을 앞두고 이게 뭡니까?

소로우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나는 제사가 싫다』(이프, 2000)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다. 소로우는 그의 대표작 『월든』에서 자신이 담배의 해로움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이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제사다운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다. 설날과 추석에 차례만 지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집안 제사를 구실로 술자리를 빠져나가는 동료가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내가 『나는 제사가 싫다』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 책을 언급한 신문 칼럼 덕분이다. 나는 『나는 제사가 싫다』는 책 제목보다 「‘나는 제사가 싫다’니…」라는 칼럼 제목이 더 이상했다.

이건 순전히 내 탓이다. 나는 제사라는 행사에서 비교적 자유롭거니와, 우리 식구들은 차례 상을 물린 다음, 정치를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화투판을 벌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림대 전상인 교수가 쓴 <문화일보> 칼럼(2000년 2월 3일자)을 스크랩한 것을 찾아 읽는데, 내용이 아주 낯설다. 아마도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스크랩만 해놨던 모양이다.

제목에 비해 칼럼 내용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방금 언급한 “우리들의 솔직한 명절 풍경”만 해도 그렇다. 내가 하지 않는다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아무튼 나 말고도 이 사회학 교수ㅡ그런데 우리나라 사회학 교수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다ㅡ의 칼럼을 눈여겨본 이가 또 있다.

부정기간행물 <아웃사이더>의 필자 홍월이 그 주인공이다. 홍월은 내가 뒤늦게 읽은 칼럼에서 강한 자극을 받기는커녕 ‘김빠진 맥주’ 꼴이 된 연유를 보란 듯이 설명한다.

“전에 다루었던 소재들이 시종일관 숨 쉴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로 자신의 망언을 내뱉었다면, 전 교수는 가끔 옳은 소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색깔을 드러내는 고도의 전술을 전개합니다. 즉 옳은 소리들을 적절한 곳에 늘어놓음으로써 일단 글 읽는 사람들의 신뢰를 확보한 다음, 그 신뢰를 바탕으로 독자들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것이지요.”(<아웃사이더_03>에서)

소설가 이하천의 『나는 제사가 싫다』는 강한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하지만 사물은 보는 관점은 수긍키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지지한다. 우선 제사가 싫다는 당당한 선언이 맘에 든다. 토씨 하나만 붙여ㅡ신문사 편집기자가 개입했을 수도 있으나ㅡ남의 말을 비꼬는 태도보다는.

여기에 우리 사회 위기의 근원을 ‘가부장제’에 두고, 또 가부장제의 핵심을 제사와 호주제로 파악하는 명확한 현실인식이 돋보인다. 물론 가부장제가 혁파된다고 모든 사회 문제가 눈 녹듯 풀릴 리는 없겠지만.

나는 상기한 미발표 글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

“2002년 2월 <○○○○○>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담당자의 이야기인즉슨 상부에서 ‘명절을 앞두고 적절하지 못한 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다. 담당자는 다른 책으로 교체하길 바랐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와 아울러 독서 칼럼 연재를 접었다. 『나는 제사가 싫다』를 명절을 앞두고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언제 다루는 게 시의적절한 것인지. 사실 제사에 관련된 이 책의 주장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Who Sings the Nation-state?)』(주해연 옮김, 산책자, 2008)는 “2006년 5월 6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주최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Global States)’라는 학회에서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이 나눈 대담에 뿌리를 두고 있다.”(「옮긴이의 말」) 책은 대담자 두 사람의 수정을 거쳐 출간되었다.

나는 버틀러와 스피박이 나눈 대화의 핵심어라 할 수 있는 “국가 없음”을 따라잡기도 벅차다. “‘국가 없음’이란 20세기에 특정한 형태로 발흥된 민족국가의 정치구조의 문제”란다. 대담을 주도하는 버틀러가 논의의 근거로 삼은 한나 아렌트의 「민족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에서도 “민족국가의 쇠퇴”는 내게 만만찮은 주제다. 그러나 적어도 ‘민족국가’는 내가 숙지해야 한다.

“국가는 권력이 집약되는 지점이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또 항상 민족과 일치한다고 여겨지는 민족국가(nation-state)도 아니지요. 민족에 기반하지 않은 국가도 있고, 한 국가 안에서 민족적 기반의 차이 때문에 안보 문제로 경합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라는 단어는 ‘민족(nation)’이라는 단어와 분리될 수 있습니다.”

잠시 버틀러의 말을 끊고, 두 여성철학자가 나눈 대담의 특성에 대해 옮긴이의 설명을 듣는다.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버틀러와 스피박이 나누는 대화이자, 그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학술논문이 아니라, 둘 사이에 주고받는 대담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책장을 덮은 후에도 풍부한 생각거리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책이다.”

다시 버틀러다. “영어에서 민족국가(nation-state)는 민족과 국가를 하이픈(-)으로 연결해서 표기합니다. 여기서 하이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설명할 때, 하이픈은 이 둘의 관계를 정교하게 이어주는 걸까요? 역사적으로 국가와 민족이 결합된 방식을 표시하고 있는 걸까요? 이 둘의 관계의 핵심에 있는 오류의 개연성을 지적하는 걸까요?”

버틀러의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주의와 무관한 소속양식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비민족주의적 소속양식이란 어떤 것일까요?”

버틀러는 동음어 state를 의도적으로 섞갈리게 쓰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책제목에도 두 가지 뜻으로 쓰이는 낱말이 있다. 국가는 國家이고, 國歌다. “2006년 봄,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에서 ‘불법’ 거주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가 있었습니다. 규모로는 로스앤젤레스 시위대가 가장 컸지요. 이때 사람들은 거리에서 미국 국가를 멕시코 국가와 함께 스페인어로 노래했습니다.”

멕시코계 불법 이민자들이 스페인어로 부른 미국 국가는 누구에게 속하는 거냐는 물음을 던지며 버틀러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단일언어가 민족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미국 국가가 스페인어로 울려 퍼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서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그 국가가 영어 아닌 다른 어떤 언어로 불릴 가능성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말이 많은 편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다변을 의식한다. “제가 너무 오래 얘기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네요.” 대담 전반부에서 사회자 역할을 ‘떠맡은’ 스피박은 대담 상대자를 줄곧 배려한다. “하고 싶은 만큼 말씀하세요.” 이제 드디어 스피박이 말할 순서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널리 불리는 <인터내셔널가>나 흑인영가인 <우리 승리하리라>와는 달리 원칙적으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연전에 누군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여러 언어로 된 <인터내셔널가>를 하나하나 들어본 일이 있다. 중국어 버전은 행진곡 풍이었고, 베트남어 버전엔 고뇌가 서려 있었다. 우리말 가사는 영 시원찮았으며, 역량 있는 민중가수의 창법은 좀 오버하는 듯했다. 나는 영국 가수 빌리 브래그(Billy Bragg)의 음반 <The Internationale>를 ‘합법적으로’ 구입해 잘 듣고 있다.

다시 스피박이다. “우리는 국가라는 추상적인 구조를 민족주의의 편견에서 자유롭게 유지하고자 하는 겁니다.…민족주의란 달리 말해, 그 민족의 인식론적 작용이 국가가 하는 일과 잘 맞고, 그래서 국가의 혜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가정입니다.”

스피박은 “민족에 기반한 국가의 쇠퇴는 추상적인 복지구조가 개별 국가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비판적 지역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박은 우리가 “자본을 민족적이지 않고 국가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으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아무튼 버틀러와 스피박은 적어? 서로 말쳀 통하는 대화 상대다.

스피박 마르크스는 혁명의 순간을 허황된 약속의 순간이라고 했지요. 유럽과 미국 젊은이들이 보편주의를 다시 원하는 요즘, 저는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렌트의 역사인식이 무에서 시작된다면 마르크스는 그 정반대라는 것 외에, 이 문제는 당분간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지요.

버틀러 조르주 소렐(Geroge Sorel,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사상가-옮긴이)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급진적 투쟁을 위해서는 허황된 미래상이 필요하지만, 그 미래상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럼 오늘 우리는 이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얘기하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할까요?

서양 중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패트릭 J. 기어리의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The Myth of Nations: The Medieval Origins of Europe)』(이종경 옮김, 지식의풍경, 2004)은 숙고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옮긴이는 이 책을 “민족과 민족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위협의 방지를 위해 이 시대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본다.

옮긴이가 파악한 이 책의 목표는 “유럽의 민족은 고대에 영구히 확정된 것이 아니며 민족의 형성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과정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옮긴이는 기어리가 “민족에 관한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작업에서 요구되는 학문적 역량과 전달 능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역사가들 중의 하나”라며 높게 평가한다. 학문적 역량 못잖게 “유럽 민족 형성에 관한 미국 및 대륙 학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저자의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기어리 교수는 먼저 19세기에 종족적 민족주의가 탄생되는 과정과 민족에 대한 지적, 문화적 범주가 발전되는 양상을 검토한 후에 유럽의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유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비교적 짧은 책의 내용을 굳이 요약하여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옮긴이의 말」)

내가 요약을 포기한 까닭은 번역자와 정반대다. 이 책의 본문은 241쪽밖에 안되지만 알찬 내용이 집약돼 있어서다. 1장(31-63쪽)에서 내가 밑줄을 긋지 않은 면은 단 한 면도 없다. 하여 나는 (밑줄의 경중을 따져 내용을 요약할 수도 있지만) 1장에서 새로 알게 된 언어와 관련된 사실 두 가지를 확인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에피소드 하나와 번역자가 제시한 민족에 대한 통념을 덧붙이련다.

이 책 1장을 통해 새롭게 안 언어 관련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독일의 전신(前身)으로 간주하는 프로이센에서 “독일어를 포함해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폴란드어, 라트비아어, 루시타니아어, 그리고 에스토니아어 등이 사용되었으며” 지식 계급의 다수는 프랑스어를 썼다.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정치적 국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언어의 사용법이 수백 년 동안 발달되어 왔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조차도 1900년에 전체 인구의 약 50% 정도의 남성과 여성만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

프로이센의 재상을 지낸 프라이헤르 폰 슈타인(1804-1808년 재임)이 1819년 설립한 ‘독일고대사연구학회’에서 편집하고 간행한 『게르마니아 역사 문헌집』 편집자들은 “플랑드르 카운티와 스헬데 강 동쪽의 네덜란드 전부를 단지 그곳에 게르만 어를 사용하던 프리지아 인이 거주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 영토로 삼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의적인 영토 설정은 영국 작가 에이단 체임버스의 소설 『노 맨스 랜드』(고정아 옮김, 생각과느낌, 2009)에 언급된 2차 대전 나치 점령기에 형성돼 지금껏 남아있는 네덜란드의 뚜렷한 반독 성향과 대조적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한 민족은 공동의 조상과 운명을 공유하고 동일한 언어를 말하고 동일한 영토에서 살아가는,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이다.”(『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 「옮긴이의 말」)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민족은 없다(民族という虛構)』(방광석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3)는 약간 자극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본문은 차분하다. 일본인 재불 사회심리학자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래 문장에 함축돼 있다.

“민족은 허구의 이야기라고 일관해서 주장해왔다. 인간의 생활은 개인 심리의 기능에서 사회질서의 성립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허구가 뒤얽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생활의 허구성을 거듭해서 확인한 것은, 허구에 눈을 뜨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자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허구가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고자카이 도시아키는 ‘정체성’보다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질성보다도 동질성이 오히려 차별을 유발하기 쉽다는” 것은 맞다. 내 경우, 고등학교 동기동창을 내세워 전화로 친근감을 표시한 A출판사 대표의 동일성은 좀 거북했다. 반면 초중고교 선배인 B출판사 대표의 다소 거리를 둔 동질감은 같은 학교 세 곳을 다닌 ‘우연의 중첩’을 희석시켰다.

『민족은 없다』에서도 프랑스에서 프랑스어의 모국어 ‘확산’의 지체를 거론한다. ‘유대인 정체성 혹은 동일성’은 의외로 순도가 낮다. ‘실정법’은 ‘자연법’보다 ‘고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2장의 본문 주석과 후주 사이의 불일치는 이 책의 가독성을 훼손한다. 단순히 편집 실수라고 하기엔 그 여파가 너무 크다.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설날과 한가위는 둘 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진짜 민족 최대의 명절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음력설에는 설날이, 추석 때는 한가위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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