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be
아리기의 20세기와 21세기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2009)는 아마도 지난 10년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 같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 미국이 지는 해라면, 중국은 떠오르는 해다. (아리기는 페르낭 브로델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세계체계론자 중 하나다.
세 번째 밀레니엄의 첫 10년이라 하는 건 좀 거창하고 21세기의 첫 10년이 후딱 지나갔다. 지난 10년이 지닌 세월의 부피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 그 전의 10년, 또 그 전의 10년과 다를 게 없지만 벌써 2010년이라니! 21세기 첫 10년은 여느 디케이드(decade)마냥, 상투적 표현이나, 다사다난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2009)는 아마도 지난 10년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 같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 미국이 지는 해라면, 중국은 떠오르는 해다. (아리기는 페르낭 브로델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세계체계론자 중 하나다. 아리기, 이매뉴얼 월러스틴, 안드레 군더 프랑크 등의 예전 직함은 종속이론가 혹은 세계체제론자였다.)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21세기의 계보』(강진아 옮김, 길, 2009)는 “두 편의 앞선 저작, 『장기 20세기』와 『근대 세계 체계의 카오스와 거버넌스』를 정교화한 속편이다.” 아리기가 비벌리 실버와 공저한 『Chaos and Governance in the Modern World System』은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최흥주 옮김, 모티브북, 2008)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목적은, 현재 진행 중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경제 발전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동시에 『국부론』(Wealth of Nations)을 바로 이 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전체적인 테제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의 실패와 중국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이 결합된 결과, 세계 문명들 사이의 더 큰 평등성에 기초한 스미스 식 세계-시장 사회가 『국부론』 출판 이래 250여 년간 어느 때보다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근면혁명으로 열린 발전 경로가 세계 사회에 계속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스기하라 가오루의 테제를 정식화하는 것과 함께 어떤 오해를 이론적으로 불식하고자 한다. 그것은 덩샤오핑의 개혁을 둘러싼 논란이다. 그것은 시장 경제,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를 말한다.
1980년대 사회과학출판의 열기가 푹석 꺼진 것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외부 요인보다 혁명적 고양과는 거리가 있었던 우리 사회의 내부 요인 탓이 크다.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혁명적] 고양이 있다고 해서, 사회 현실이 정말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고양이 현실 사회 혁명의 고조를 반영한다고 주장되지만, 사실 그런 만큼이나 그런 현실이 없다는 것을 표시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에게서 연원한다. 1968년 직후, 트론티는 그의 논문 「디트로이트의 마르크스」에서 유럽이 계급투쟁의 진원지가 될 거라는 ‘바람’을 일소했다는 거다. 그가 생각한 계급투쟁의 진정한 진원지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더 높은 임금 요구를 수용하고 자본 자신을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데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로서 계속 살아남았지만, 노자(勞資) 관계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적’이었던 것은 미국에서였다.”
트론티가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채용한 것은 유럽이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을 정확히 해석하는 데는 미국 노동계급의 역사가 더 적합하다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간파한 것처럼, “웡, 프랑크와 포머런츠는 자유 시장을 이데올로기로 채용한 것은 유럽이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을 정확히 해석하기에는 후기 중화 제국이 사실상 더 적합하다는 것 사이에 똑같이 근본적인 불일치를 간파했다.”
트론티를 빌려 쓰자면, “그들은 베이징에서 스미스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윤을 추구하여 시장 교환이 확대되더라도, 중국에서 발전의 성격은 꼭 자본주의적이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공산 중국에 사회주의가 살아 있고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 그것이 사회적 행동의 결과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거다.
아리기는 “중국의 거대한 근대화 노력의 사회적 결과는 여전히 불확실하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앞으로 전개되어가는 상황을 관측하고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아리기가 생각하는 정말 흥미롭고 어려운 질문은 중국 경제의 권토중래가 늦었다기보다 빨랐다는 거다.
아리기가 보여준 “위대한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대해 진정 통찰력 있는 분석”(브루스 커밍스)은 신선하다. 하지만 ‘고도 균형의 함정’(a highlevel equilibrium trap)을 효과적으로 재해석하는 게 버거운 나로선 아리기가 애덤 스미스한테서 발견한 것 가운데 내 사고범위 안에 있는 것들로 만족하련다.
과거 경제학의 거장 중에서 스미스는 ‘가장 널리 언급되면서도 가장 드물게 읽힌 편에 속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아리기는 스미스의 유산을 둘러싼 신화 세 가지는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애덤 스미스는 ‘자기조정적인’ 시장의 이론가이자 옹호자도, 자본주의의 이론가이자 옹호자도, 노동 분업의 이론가이자 옹호자도 아니었다.
“만약 한 나라가 완벽한 자유와 완벽한 정의를 누리지 않는 한 번영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서 번영할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아리기의 스미스 인용은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을 떠올린다. 벌린은 군주제 국가가 공화국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미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국익을 추구하는 중앙 정부의 능력을 확립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무엇인가 혹은 어느 누군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과 제도의 적절한 변화를 통한 정부의 보이는 손이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윤율을 하락시키고 결국 경제 팽창을 종결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생각이 아니라 스미스의 것이다.”
아리기는 네 번의 체계적 축적 순환의 ‘근원’을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찾는다. “국채와 함께 국제적인 신용제도도 생겨났는데, 거기에는 종종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본원적 축적의 한 원천이 숨겨져 있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약탈 제도가 보인 갖가지 비열 행위는 쇠퇴해가는 베네치아에서 거액의 화폐를 빌렸던 네덜란드가 거두어들인 자본적 부의 한 숨겨진 기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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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아리기> 저/<강진아> 역29,700원(10% + 5%)
세계체제론자 아리기의 마지막 역작 20세기는 자본주의의 시대였고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사회과학에서 학자들은 주로 민족국가 단위로 상황을 분석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전세계적인 역사의 진행과정이었고 이를 간과한다면 자본주의를 제대로 기술할 수 없다는 게 월러스틴을 위시한 세계체제론자들의 입장이었다. 아리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