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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64괘에서 배우는 인간과 자연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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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러한 미래를 점치는 방식 중 가장 오래되었고, 또 모든 점술법의 근본이 되고 있는 서적이 『주역』입니다.

어느새 연말입니다. 이맘때면 온라인상에서는 무료 사주, 토정비결 같은 운세 서비스가 상당한 매출 성수기를 시작하곤 합니다. 한 치 앞날도 모르면서 천 년의 근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요즘 같이 뭔가 더 뒤숭숭한 시절이면 더욱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푼돈 투자를 쉽게 감행하곤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러한 미래를 점치는 방식 중 가장 오래되었고, 또 모든 점술법의 근본이 되고 있는 서적이 『주역』입니다. 『주역』 또는 역경, 역전 등으로 불리는 이 책은 저자도 불분명하고 그 근원도 아리송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의 사서삼경 중 삼경의 하나(시경, 서경, 역경)로 꼽히고 있습니다.

공자 이래의 유학자들이 바보가 아닌 한, ‘괴력난신(이상한 힘이나 난잡한 귀신 등)’을 논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넘어 점술 책 같은 것에 그리 오랜 세월 신경을 썼을 리는 없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인식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던 고대 동아시아의 시선과, 그 시선으로 읽어 낸 인간과 자연의 움직임에 대한 통찰로서 『주역』은 그저 그런 점술서 이상의 가치를 다하는 고전입니다.

『주역』의 시작은 중국 신화시대의 인물인 ‘복희씨’로부터입니다. 문자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 천하태평을 위한 제사를 복희씨가 지내고 나자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가진 동물이 강에서 나타났는데, 그 등에 알 수 없는 점과 선으로 구성된 특이한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복희씨가 그 도형을 유심히 살펴본바, 이는 천지 만물을 구성하는 원리를 나타낸 그림임을 깨닫고, 이를 하도河圖라 부르게 됩니다.


하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복희씨는 괘卦라는 표현으로 승화시킵니다. 복희씨는 세계를 구성하는 인자로서 하늘, 땅, 사람의 천지인 3주체를 깨닫고, 그 각각을 하나씩의 선으로 표현하여 효效로 나타냅니다. 이 효는 천, 지, 인 3개를 모아서 한 세트로 표현하고, 이를 괘라고 합니다.


하나의 효는 천지인 각각의 상태를 표현하는 두 가지의 모양을 가집니다. 이것이 음과 양을 나타내는 기본이며, 이 음과 양의 효를 섞어 나오는 여덟 가지의 괘 양식을 팔괘라고 부릅니다.


천지인 세 요소가 융화되어 만드는 여덟 가지의 양태가 바로 우주의 모습을 포함하는 팔괘입니다. 익숙한 그림을 느끼실 텐데, 한국의 태극기에도 팔괘 중 건, 곤, 감, 리 네 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기 하늘, 땅, 물, 불을 기본 상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천지일월, 춘하추동 등으로 읽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후 이야기되는 괘들이 상징하는 형상은 사실 정확히 그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태극기의 4괘도 건괘가 반드시 하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늘이 가진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 건괘의 의미라고 보시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 팔괘는 상괘와 하괘를 나란히 세움으로써 비로소 64괘가 됩니다. 8괘가 근본적인 구성에 대한 고찰이라면, 64괘는 비로소 물질이 물체와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형상을 나타내는 괘입니다. 8X8의 수로 나타난 이 64괘가 『주역』 괘의 완성판입니다.

『주역』은 괘를 형성하는 내용보다 그 괘의 해석과 이해에 보다 중점을 두므로, 본격적인 『주역』의 내용은 64괘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에 괘를 만든 것이 복희라면, 이 괘를 해석하는 방식을 제시한 것은 중국 왕조의 시조라 볼 수 있는 주나라 문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 문왕과 아들 주공은 복희의 팔괘가 갖는 의미를 문자로 풀어내 설명한 괘사卦辭와 64괘 속에 들어 있는 효의 의미를 풀어낸 효사爻辭를 완성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주역』은 이후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세상에서 잠시 잊혀지다가,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발생하는 훈고학에 의해 다시 서게 됩니다. 분서갱유로 인한 학문의 단절을 복원하기 위한 훈고학은 주로 주석과 해설을 통해 고전을 복원하는 형태였는데, 유학자들이 『주역』의 해석에 대한 추가 주석과 설명을 따로 정리하면서 이른바 역전, 십익이라는 형태의 추가 저작들이 완성됩니다.

『주역』이 형성된 역사를 이렇게 바라본다면, 『주역』이 단순히 점술서로만 머무를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애초에 『주역』의 괘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인식론적 테마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해석의 방식에 있어 달라붙은 괘사와 효사를 시작으로 한 풍부한 주석들은 『주역』이 품은 철학적 주제들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주역』은 다만 유교에만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태극 팔괘의 문양은 도교 계열에서 오히려 더 자주 쓰이곤 합니다. (80년대의 어린이 영화 돌풍을 일으켰던 강시 계열 영화에 보면 도사들이 늘 태극팔괘 거울을 쓰고 있습니다) 삼국지의 제갈량 같은 경우는 아예 군사진법에 팔괘를 도입하여 팔괘진을 완성해 사용하기도 하니 그 응용이란 다채롭기 그지없겠습니다.

유학, 도교에 머무르지 않고 『주역』은 동아시아의 사상 전반에 깔리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사주팔자 풀이 등에 나오는 음양오행 사상도 그 출발을 늘 『주역』에서 찾고 있으며, 유불선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의 여러 신흥 종교들 또한 『주역』과 하도의 해석에서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양과 달리 음과 양을 구별하고 그 둘 사이에 가치판단을 부여하지 않는 이원론적 습관은 동아시아인들의 사고와 문화 기저에 깊게 깔린 일종의 원류입니다.

음양으로부터 시작해 완성되는 괘는 하늘, 땅, 사람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섞어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양식으로 인간과 자연을 주?객체로 분리하는 사고가 아니라, 셋이 하나로 어우러진 상태 자체를 관찰하는 동아시아의 인식론입니다.

8괘로부터 나타나는 64괘는 그렇게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 숨 쉬는 자연현상과, 이를 거스르지 않고 융화되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자세까지를 이야기합니다. 비로소 우주 만물의 섭리가 관찰자이자 행동주체인 인간 중심으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가 역사를 타고 흘러와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인들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있다는 점은 『주역』 이 비록 널리 읽히진 않았지만 그 이해도가 절대 낮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느새 또 연말이 왔고, 토정비결과 사주와 신점들은 내년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느라 바쁠 것입니다. 『주역』도 그런 의미에서 꽤나 연말연시에 잘 팔리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주역』을 읽으면서 사실 대나무를 쪼개 산가지(점칠 때 흔들어 쓰는 기구)부터 만들고 점보는 법부터 연습했으니까요.

2010년은 경인년이고, 『주역』의 괘로 치면 ‘뇌지예’의 괘입니다. 59번 괘인 뇌지예는 대지 위에 천둥이 치는 형상으로, 대지는 오랜 잠을 깨고 변화를 예고 받으며, 하늘로부터 그 변화의 지침을 받는 형세라고 합니다. 『주역』의 괘 풀이가 맞다면, 많은 변화가 잠재될 해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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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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