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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신뢰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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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럼에도 법 관련서 리뷰를 ‘강행’하는 까닭은 필자가 훑어본 올해 나온 법 관련 국내서와 번역서가 기괴한 법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서다.

아무래도 주제를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럼에도 법 관련서 리뷰를 ‘강행’하는 까닭은 필자가 훑어본 올해 나온 법 관련 국내서와 번역서가 기괴한 법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서다. (참고로 필자는 교수와 기자가 구사하는 그들만의 레토릭이 꽤나 거북하다. 이른바 ‘법조인’ 특유의 수사(修辭)를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들의 고유한 어투 역시 무척이나 부담스러울 거다.)

김두식 교수의 저서 두 권을 통독한 바 있으나, 그가 올해 펴낸 『불멸의 신성가족-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창비, 2009)은 그러질 못했다. 조금밖에 못 읽었다. 아니, 더는 읽을 수 없었다. 법조계 구성원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한 이 책의 본론을 건너뛴 것은 우선, 이 나라 사법 패밀리가 어찌 사는지 궁금하지 않거니와 그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어서다.

혹시 모르겠다. 프랑스의 여러 계층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 결과물인 『세계의 비참(전 3권)』(피에르 부르디외 기획, 김주경 옮김, 동문선, 2000-2002)에 등장하는 앙드레 판사 같은 ‘법조인’을 보게 될지는? ‘한국형’ 앙드레 판사의 서슴없는 의견을 듣게 될지는? (설마 그럴 리야.)

“나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함께 파업을 해요. 때에 따라서 파업이 옳다고 생각하고, 양식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비난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에요. 즉 파업이란 것이 실상은 일이야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다는 식의 법관이 너무 많다는 사실과, 아무도 투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입니다.”(『세계의 비참Ⅰ』, 476쪽. 이번에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의 법 현실 또한 별 게 아니긴 하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초지일관하는 경어체 문투는 그 속성상 뭔가를 감추거나 혹은 부풀리거나 어떤 것을 미화하는 듯싶어 거림직하다. 변호사 자격증을 소지한 저자는 전관을 예우한다. “이 책을 쓰면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었음을 미리 고백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좀 심하게 굽어 탈이지.

그렇다고 “사전조사 때 만난 전직 판사와 첫 번째 면담대상이었던 현직 판사가 각기 상반된 입장에서 보여준 깊은 통찰력”의 실체가 하나도 안 궁금한 건 아니다. “판검사들이 틀을 짜는 이유는 그들의 독선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건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판검사들이 격무에 시달린다고 한 것은 약간 우습다. “판검사들은 한결같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다고 하소연합니다. 사실 이는 법조계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판검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를 알면 누구라도 그들의 고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지기는커녕 이런 생각만 든다. 누가 그런 고생 사서 하라 그랬나!

“타인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체험이나 행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들어가는 글」을 이끄는 일본 작가의 자기 정직성에 관한 기율에 발맞추려는 뜻은 잘 알겠으나, 그래도 저자가 재직 중인 대학에서 정년을 보장받은 사실까지 굳이 밝힐 필요가 있었나?

프랑스의 법학 교수이자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인 에마뉘엘 피라의 『법은 사회의 브레이크인가, 엔진인가-거꾸로 읽는 법학』(이충민 옮김, 모티브북, 2009)은 다소 낯선 부류의 책이다. 법학 개론은 아닌데다 일반 독자를 위한 법 교양서라 하기도 좀 그렇다. 한국어판 부제목과 원제목이 책의 정체성을 알려주는데, 이 책의 원제목을 직역하면 ‘반(反)법학개론(Antimanuel de Droit)’일 듯싶다.

앞에 ‘안티’가 붙었지만 매뉴얼답게 수월하게 읽힌다. 각 장마다 뒤따라오는 「읽어보기」도 읽을 만하다. 에마뉘엘 피라는 처음부터 삐딱선을 탄다. “법이 정말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소송인이 지내고 있는 감방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 감방은 불결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완벽하게 균형 잡힌 공평무사한 ‘천칭’과는 거리가 멀다.”

법 자체의 자기모순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에마뉘엘 피라는 프랑스 법 체제에서 아직도 엄격히 준수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가 “언론?표현의 자유에 관한 1881년 7월 29일의 법률일” 거라면서도 도시 지역 거주자는 그 법률이 얼마나 이상한지 익히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문제의 법조문을 읽어 보면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1장에서는 자유의 원칙을 되풀이해 말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10여개의 항목에서는 중상?비방?국가원수 모독 등에 대해 엄벌을 명시하고 있다.”

법의 권위를 앞세우며 특권의식에 물든 ‘법조인’은 만국공통이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을 때 단체 행동에 나서는 법조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법조계의 특권과 위엄이 걸린 일이라면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사법부 신뢰도는 우리의 그것을 조금 웃돌 뿐이다.

엄친아들이 의대와 법대를 주름잡는 것 또한 이 나라나 저 나라나 다 마찬가지다. 뭐 세부적으로 약간 다른 점은 없지 않다. 프랑스에선 “안타깝게도 법철학, 법학사, 법률사회학 등을 전공할 경우 현실적 진로는 강의직이나 연구직밖에 없다. 자식을 의대에 보내지 못해서(‘우리 애가 과학 쪽에는 소질이 없어서요….’) 공증인이나 만들어볼까 하고(‘애 아버지처럼요.’) 법대에 보낸 학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 나라 엄친아 판사의 엄마 의존도는 다소 높게 나타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요즘 젊은 판사들 가운데 판결에 앞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어봐야 안심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위 ‘엄친아’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새로 임용되는 판사 열 명 가운데 네 명이 특목고와 강남 3구 출신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과연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한 근거가 있구나 싶었다.”(김선주 칼럼, 「‘엄친아’가 지배하는 세상」, <한겨레> 2009년 10월 20일자 30면.)

이런 식의 조언 청취는 현실에 맞춰 합법화해야 마땅하다. 하여 앞으로 헌법 개정 시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밑에 다음과 같은 단서조항을 신설하는 건 어떨지. “단, 엄친아에 한하여 판결에 앞서 엄마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다.”

프랑스 판사들도 격무에 시달리며 편의주의가 판친다. “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재판을 좌지우지하며 신출내기 재판장은 경험 많은 늙은 서기에게 귓속말로 분쟁의 해결책을 듣는 것이다.” 10년 전 공중파 방송의 출판 관련뉴스에 코멘테이터로 10초가량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취재기자보다 나이 많은 카메라기자가 촬영을 주도하는 걸 보고 ‘숨은 손’의 위세를 실감했다.

법원과 학교와 병원은 닮은꼴이다. 법정에 들어서는 피의자 가족, 학교를 찾은 학부모, 병원 외래 환자와 그 보호자들의 옷차림은 단정할수록 유리하다. “천칭으로 상징되는 사법 기구가 이론적으로는 절대적으로 균형을 유지해야겠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옷차림, 태도 등이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치며 그 중에서도 천칭에 놓이는 가장 무거운 추는 바로 말과 말투이다.”

에마뉘엘 피라는 법의 속성으로 종교적인 측면을 꼽는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법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여러 상징물을 동원한다.” 위압적인 법원 건물은 그 단적인 보기다. 프랑스 재판정에서 판검사와 변호사들이 입는 법복은 사제복을 베낀 거란다. 또 재판 과정은 일종의 예식(禮式)이다. “무릎을 꿇지 않는 것만 빼면 미사와 비슷해진다.”

프랑스의 법 현실은 우리에게 낯익다. 그 나라 법률 용어도 난해하다. “고어(古語)나 사어(死語)를 사용해서라도 개념과 용어의 엄밀성을 준수하려는 노력은 정당하다. 하지만 법조계는 이런 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불투명성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어디나 ‘알고 있으시라’ 하지 않고 ‘양지하시라’ 방송한다. 왜 어려운 말을 골라서 쓸까?

“차라리 변호사 수임료와 법원의 과징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부유한 시민들에게만 재판을 허용하는 편이 덜 위선적일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거야 뭐. “더욱이 법관 집단 중 일부는 상급자의 명령, 즉 정치권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이것도 뭐.

프랑스의 재판 방식은 색다르다. 특히 ‘미결 구금’ 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재판 도중 어느 판사가 보여준 추태는 남다르다(143쪽).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별 다를 게 없다. “이 노출증 환자에게 최고사법위원회에서 내린 처벌은 30분간의 심리치료가 전부였다. 판사 집단의 저항정신과 단결심에 찬사를 보낸다!”

결정적으로 편파적인 법 적용은 범인(凡人)의 착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소용없게 만든다. 더구나 “분쟁을 점잖게 해결하던 시대는 갔다. 도시 지역에서는 이웃집에 가서 공손하게 텔레비전 볼륨을 낮춰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경찰을 부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보상금을 노린 소송으로 넘어가는 것은 금방이다.”

그러면 법은 과연 무엇인가? 적어도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는 아니다.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는 사람은 정의와 사법제도를 혼동하는 것이고 법과 도덕, 정확히는 법과 ‘자기의’ 도덕을 혼동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피라가 말하는 “법이란 투명하고 흠이 없는 순 법리적 추론이 아니다. 법은 살과 뼈(와 붕대와 상처)로 이루어진 실제 사건이며 대립되는 이해관계들이 표출되고 판사들을 설득시키려 하는 싸움이다.”

95쪽에서 96쪽으로 이어지는 「읽어보기」는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에” 실린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의의 여신 목판 삽화를 근거로 “무엇 때문인지 여신의 눈을 가린 안대는 사법기관의 공평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전한다. 그런데 「읽어보기」의 뉘앙스는 안대가 사법기관의 공평성을 상징한다기보다 ‘아무생각 없음’에 가깝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정의의 여신>(1494)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1494년판 『바보배』(노성두 옮김, 안티쿠스, 2006) 71장의 삽화다. 어째 한국어판 『바보배』 196쪽에 실려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정의의 여신>보다 그에 딸린 내용이 더 인상적이다. 71장 제목은 「시비 걸고 소송 거는 바보」다.

“이런 바보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네. / 사사건건 소송을 걸고, / 분쟁을 피하기 위해 / 남의 사정 봐주는 일이라곤 조금치도 없는 바보들. / 사건을 마냥 길게 끌어라, / 정의 따위 내가 알게 뭐람, / (중략) / 그런 바보가 모르는 게 있으니, / 자신이 법원 서기의 잉크 속에서 헤엄치는 토끼라는 사실. / 재판관, 변호사 그리고 법정에서 표결권을 행사하는 인간들이 /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다들 식탁에서 / 제 몫 생선을 한 짝씩 챙긴다네. / (중략) / 변호사 수임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네. / (중략) / 세월아 네월아 사건을 질질 끄니 / 소송비용 대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 (중략) / 바라건대,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람은/ 똥구멍에 쇠로 만든 삼빗이나 달고 다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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