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진영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원류 격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조준 했다. 지난주 출간된 <창작과비평> 가을 호를 통해서다. <창작과비평>은 1990년대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특집?논단 등의 꼭지를 통해 그 ‘현실적 공허함’을 이따금 지적하긴 했지만, 앤더슨의 저작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가하기는 처음이다.
창비의 달라진 행보 뒤에는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하고 시장근본주의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탈민족 담론의 확산을 방치할 경우 자칫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이나 국가를 매개로 한 공공적 실천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한겨레> 2009년 8월 28일자 23면)
베네딕트 앤더슨 저자 리뷰의 계기가 된 신문기사의 일부다. 기자가 추측하는 “창비의 달라진 행보” 이면은 내게 별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이 기사 덕분에 ‘읽어야지’ 하는 마음만 굴뚝같던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윤형숙 옮김, 나남출판, 2002)을 읽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앞표지 책날개의 저자 소개 글만으론 베네딕트 앤더슨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좀 헷갈린다. “이 책의 저자인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1936년 중국의 유난(Younan)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리스라틴 고전을 공부하고 코넬 대학에서 인도네시아를 전공했다. 현재는 코넬 대학에서 정부학과 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튼 「감사의 말씀」은 그의 ‘장사’ 밑천을 드러낸다. “독자들도 알아보겠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사고는 에릭 아우얼바흐(Eric Auerbach), 발터 벤야민(Water Benjamin) 그리고 빅터 터너(Victer Turner)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역자 서문」에 따르면 『상상의 공동체』는 1991년 출간된 개정증보판을 우리말로 옮겼다. 초판은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윤형숙 옮김, 나남출판, 1991)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개정증보판 저자 서문」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갖춘 학자로서의 양심과 지적 정직성을 엿보게 한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을 준비하면서 피했어야 할 사실, 개념, 그리고 해석에서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 1983년(초판 발간연도)의 기본정신을 살리기 위해 별도 부록의 성격을 갖는 두 장을 추가하고 초판을 조금 바꾸었다.” 이정도야 개정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백’이다. 그런데 이를 잇는 문장은 많이 다르다. “본문에서 나는 번역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 두 개, 최소한 하나의 지키지 못한 약속, 잘못된 강조 하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우선 마르크스주의(다른 말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통찰이 인상적이다. 그는 에릭 홉스봄을 인용하여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명실상부하게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민족주의는 불편한 변칙적 현상이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족주의를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러한 “민족주의의 ‘변칙성’에 대해 더 만족할 만한 해석을 할 수 있기 위하여 몇 가지 잠정적인 제안을 하려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출발점은 민족성(nationality), 민족됨(nationness)과 민족주의(nationalism)는 특수한 종류의 문화적 조형물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대다수의 다른 주의들(isms)과는 다르게 자신을 대변하는 대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상적 ‘공허함’이 세계주의적이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지성인들 사이에 쉽게 일종의 겸양을” 불러왔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우리가 민족주의를 ‘자유주의’나 ‘전체주의’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취급했다면 문제는 더 쉬워졌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가 제안하는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민족주의는 18세기 서유럽에서 싹텄다. “서유럽에서 18세기는 민족주의의 여명기일 뿐 아니라 종교적 사고양태(思考樣態)의 황혼기”였다. 그런데 “종교적 믿음이 쇠퇴했다고 해서 믿음이 일부 진정시켰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여 새로운 진정제가 필요했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는 민족주의는 신종 ‘아편’으로 제격이었다.
그렇다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18세기 후반 민족주의가 나타난 배경으로 종교적 확실성의 쇠퇴를 주장하거나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종교를 ‘대체했다’고 강변하진 않는다. “민족주의는 의식적으로 주장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 이전에 있었던 더 큰 문화체계와의 결합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그 문화체계로부터 나왔고 또한 그 문화체계에 대항하여 나온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적절한 두 문화체계는 종교 공동체와 왕조국가이다. 이 둘은 전성기에 오늘날의 국적처럼 당연시되는 준거였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창작과비평>에 실린 어느 외국 교수의 글은 민족주의를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시각과 그 안에 담긴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고 한다.
나는 ‘문화주의’에 공감하지 않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론’이 ‘문화주의’로 기울어 있는 것 같진 않다. ‘유럽 중심적인’ 색채는 어느 정도 있다. 「감사의 말씀」을 통해 “나는 학문적 훈련이나 직업에서 동남아시아 전문가임을 밝혀둔다” 한 것이 무색하게 베네딕트 앤더슨의 논의는 유럽에 치중한다.
18세기 서유럽은 민족주의의 조짐을 보였을 뿐이다. 민족주의는 18세기말 중남미에서 발원한다. “왜 바로 이 크리올 공동체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전에 그들의 민족됨(nationness)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는가? (중략) 왜 거의 3세기 동안이나 고요히 존재해 왔던 스페인령의 아메리카 대륙이 갑자기 18개국의 독립국으로 나누어졌는가?”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를 설명하는 정설인 마드리드 정부의 통제 강화와 진보적 계몽주의 사상 전파의 비중을 낮춰 본다. 그는 “새로운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독자적 행정단위였다”는 사실에서 대답의 단서를 찾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행정단위는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것들은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 더 확고한 실재(reality)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순수 유럽 계통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크리올’에 대한 마드리드 정부의 차별 또한 중남미에서의 민족주의 발흥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크리올은 스페인에선 요직을 얻을 수 없었다. “‘멕시코인’ 혹은 ‘칠레인’ 크리올은 전형적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인 멕시코나 칠레의 영토에서만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크리올은 길동이 마냥 양반이면서도 ‘호부호형’을 할 수 없었던 서자인 셈이다.
“비록 그가 자기 아버지가 이주해 온 후 1주일 안에 출생했다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출생이라는 우연은 그를 종속적 위치로 떨어뜨린다.” 이런 차별이 미국으로 하여금 ‘속지주의’를 택하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출생한 그는 진정한 스페인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난 ‘반도인’은 진정한 아메리카 대륙인이 될 수 없다.”
단편적이나마 한국/한국인/한반도가 여러 번 나온다. 한국/한국인/한반도에 관한 짧은 언급은 대체로 “스리랑카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불교세계의 광대한 영역”(33쪽)처럼 그런대로 무난하다. 그러나 1574년부터 1606년 사이에 아시아 예수회 선교단의 재건자인 알렉산더 발리그나노가 한국인에게 “사제직 기능을 허용하는 것을 적극 격려했다”(92쪽)는 것은 미심쩍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인쇄 출판문화의 원류』(전영표 옮김, 법경출판사, 1991)를 쓴 E. L. 아이젠슈타인의 이름을 접하는 것은 의외다. 민족주의와 신문, 활자어, 인쇄자본주의 등을 관련지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서술은 흥미를 돋우나, 이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만, 줄곧 같은 언어를 써야만 한 민족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민족을 만들려고(같은 민족이 되고자) 어떤 언어를 강요했기(자기 언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단일 민족 혹은 민족의 단일성은 “종족문화적(ethnocultural) 동질성”이라는 보다 엄밀한 표현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민족주의는 18세 후반 중남미 크리올 엘리트의 ‘발명품’이다.
『세 깃발 아래에서-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서지원 옮김, 길, 2009)의 표지커버 저자 소개 글은 새로운 내용이 덧붙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중국 윈난(雲南) 성의 쿤밍(昆明)에서 영국계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잉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베트남인 보모의 손에 자랐으며, 1941년 앤더슨 가족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중략) 2002년 은퇴하여 현재는 코넬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그와 더불어 세계적인 학자로 잘 알려진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그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학자로서 베네딕트-페리 앤더슨 형제의 ‘포스’는 칼-마이클 폴라니 형제한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베네딕트와 페리 앤더슨은 각자의 분야에서 학문적 성취가 뚜렷한 보기 드문 형제 학자다.
『세 깃발 아래에서』「옮긴이 해제」 전반부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삶을 간략하지만 충실하게 전한다. 아일랜드 국적의 그는 연구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10개를 넘는다.
“이 책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이 아나키즘을 비롯한 유럽의 급진적 운동 및 쿠바를 비롯한 변두리에서 진행되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흐름과 발맞추어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 깃발’ 중 첫 번째 것은 필리핀 민족주의 단체 카티푸난의 깃발이다. 붉은 색 바탕에 필리핀 국기의 삼각형 안에도 들어있는 필리핀 식 태양 그림과 그 아래 알파벳 대문자 K가 세 개 나란히 있다. 두 번째 깃발은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며, 세 번째 것은 독립전쟁시절부터 쓰여온 쿠바의 국기다.
저자 못잖은 「옮긴이의 말」의 ‘양심고백’은 옮긴이가 우리말 번역의 적임자임을 뒷받침한다. “한국어판의 초교에 ‘바이링구얼’(bilingual)의 번역으로 영한사전에 나오는 ‘2개 국어’를 그대로 썼을 정도로 옮긴이는 민족과 국가, 종족 경계의 불일치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된 오역을 바로잡느라고 했지만 ‘일로카노 애국심’(Ilocano patriotism) 등 마땅히 대안을 찾지 못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서론」에서 “얽혀 있는 뿌리의 광대한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가 필리핀에서 출발하는 이유를 두 가지 든다. 첫 번째는 자신이 필리핀에 깊은 애착이 있고, 20년간 간간이 연구해왔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890년대에는 세계체제의 주변부 가장자리에서나마 필리핀이 잠시” 세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가장 적합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연구를 ‘묶어두는’(anchor) 것은 천재적인 소설가 호세 리살(Jose Rizal)과 선구적인 인류학자이자 언론인 논객이었던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Isabelo de los Reyes), 조율을 맡은 조직가 마리아노 폰세(Mariano Ponce), 1860년대 초반에 태어난 걸출한 이 세 명의 필리핀인 애국자 청년의 삶이다.”
이 세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세계권투계를 주름잡는 필리핀의 천재복서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 1978- )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