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가 글 제목은 맨 나중에 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나도 그렇다. 그러면 시작은? 당연히 첫 문장이다. 내게 첫 문장은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시작이 반, 그 이상이다. 첫 문장을 작성하면 글을 다 쓴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첫 문장을 거의 직관에 의존한다. 불현듯 첫 문장의 실마리나 완성된 문형이 떠오른다.
직관은 직감과 구별된다. 예스24의 도서 일반검색에서 제목에 직감이 들어간 책은 한 자리 숫자다. 직관이 포함된 책은 세 자리 숫자로 거의 백배나 된다. 직관을 상세검색하면, ‘조직관리’가 제목에 있는 책이 딸려오긴 하지만, 검색결과의 폭은 열배로 좁혀진다. 이런 격차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비슷해 보여도 감각과 인지의 차이, 일상적 기능과 연구 대상의 차이 때문은 아닐는지.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박영태 옮김, 이학사, 2000)에서 직관에 한 장을 할애한다. 이 책의 11장 「직관적인 지식에 대하여」에서 러셀은 직관을 약간 다르게 표현한다. “일반적 원리들 이외의, 또 다른 종류의 자명한 진리들 중에는 감각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도출되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진리들을 ‘지각적인 진리들truths of perception’이라고 부르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판단들을 우리는 ‘지각적인 판단들judgements of perception’이라고 부른다.”
러셀이 말하는 직관은 “감각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기억과 관련된 직관은 “정신에 즉각 떠올린다”는 얘기다. “완전히 거짓이면서도 기억 속에 매우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믿음의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믿음의 경우들에서 실제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정신에 즉각 떠올린다는 의미에서 그 기억에 의해 일반적으로 연상되어지는 어떤 내용이 있기 때문에, 거짓되게 믿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막스 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 소장인 게르트 기거렌처의 『생각이 직관에 묻다-논리의 허를 찌르는 직관의 심리학』(안의정 옮김, 추수밭, 2008)은 직관적인 느낌들이 어디서 오는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탐구한다. 직관이란 논리와 동떨어진 과정을 토대로 하여 이뤄지는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을 일컫는다.
기거렌처는 직관을 이렇게 정의한다.
1. 의식에서 재빨리 떠오르는 것
2.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들
3.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동기를 수반하는 것
직관의 특성을 살펴보면 “직관은 놀랍도록 적은 정보에 의존한다.” 이것은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원리와 연결된다. 메뉴판이 다종다양한 먹을거리로 채워진 식당은 아니 가는 게 좋다는 속설은 빈말이 아니다. 메뉴가 한두 개에 불과한 식당과 수십 가지 음식을 제공한다는 식당의 음식 맛은 큰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부분적인 무지가 늘 바람직한 건 아니다. ‘적을수록 높은 효율성’ 효과가 사라지는 국면을 설명한 대목은 꽤 까다롭다(156-157쪽).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대신, 내 나름의 해석을 하면 이렇다. 잘 나가는 기업도 단일 품목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면 레고 블록 본사마냥 기업 소유주가 바뀐달지.
심리학에 대한 기거렌처의 견해는 다소 이율배반적이다. “정신이나 환경 한쪽만 연구해서는 결코 인간 행위를 파악할 수 없다. 양쪽을 다 봐야 하는 것이 극히 상식적인데도, 심리학에서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인간이 사는 환경의 구조는 무시하면서 태도와 선호, 논리, 두뇌 연상 작용 같은 것만으로 인간 행위를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이러는 한편 “심리학자들은 단순한 논리를 위해 심리학을 버리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여긴다. 2부의 표제를 장식한 막스 플랑크의 격언은 언제 봐도 후련하다. “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반대자들을 설득해 그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언젠가 죽은 뒤 새로운 세대가 그 빛에 친숙해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는 한편 “심리학자들은 단순한 논리를 위해 심리학을 버리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여긴다. 2부의 표제를 장식한 막스 플랑크의 격언은 언제 봐도 후련하다. “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반대자들을 설득해 그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언젠가 죽은 뒤 새로운 세대가 그 빛에 친숙해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데이비드 G. 마이어스의 『직관의 두 얼굴』(이주영 옮김, 궁리, 2008) 겉표지와 속표지는 두 줄로 나눈 큰 글자 제목 사이에 이런 글귀가 있다. “투자, 스포츠, 의료, 면접 등 순간의 선택을 좌우하는 본능적 직감의 힘과 위험.” 나는 이 책을 심리학의 두 얼굴로 읽는다. 심리학에 뾰로통한 내게 직관의 장점은 심리학의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웹스터 사전과 이 책에서 말하는 직관은 직접적으로 지식을 얻는 능력, 즉 관찰하거나 생각해보지 않고 즉각 알아채는 능력을 뜻한다.” 직관에 대한 찬사는 건너뛴다. 나는 심리학을 경탄하지 않는다. 직관의 힘과 위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심리학의 실체와 한계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사회적 직관은 여러 가지 다른 사회심리학 연구를 통해 심층적으로 탐구되고 있다.”(67쪽) ‘사회심리학 연구의 심층적 탐구’(특히 ‘심층적’에)라는 표현을 보면 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수십 차례에 걸친 선구적인”이 거슬리긴 하나, 어느 심리학자가 그런 실험을 통해 밝혀낸 사실은 수긍한다. “사람들은 친숙한 것을 좋아하게 된다.
저자가 예로 든 친숙함과 호감의 연관성에 관한 더욱 놀라운 이야기는 꽤 인상적이다. “대만의 한 젊은 남자는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700통 이상 보내 결혼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녀는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기로 한 남자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아니라 편지를 전해준 우편배달부였다.”
직관 전문지에서 저자가 인용한 내용은 크게 공감한다. “직관은 항상 부드럽고 조용한 상태에서 떠오른다.” 나는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보다 이불을 깔거나 개킬 때(주로 갤 때) 직관이 발동한다. “합리주의적 회의론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인식방법을 관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직관주의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더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는 충고는 지당하다.
한편 “기억에 대한 우리의 직감은 분명 직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직감은 분명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기억에 대한 직감은 웹스터 사전과 이 책에서 말하는 직관의 정의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러한 직감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직관은 어떤 감정의 정도나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을 예측하는 데 실패할 때가 훨씬 더 많다”지만, 이는 직관의 한계만은 아니다. 심리학의 한계만도 아니다.
아무튼 심리학에 대한 나의 불만은 심리학의 주된 연구방식에서 비롯한다. 나는 사고실험과 행동실험을 불신한다. 그 결과를 거의 믿지 않는다.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고문지시 이행 실험은 과연 인간의 ‘수동적 잔인성’을 입증하는가? 무엇보다 나는 실험결과를 뒷받침하는 퍼센트 놀음에 질린다. “그러나 밀그램이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을 때 65%가 그 지시를 따랐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단순한 통계수치’마저 의심하는 건 아니다. 1987년 미국 텍사스의 한 우물에 빠진 소녀가 구조를 기다리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흘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자료 어느 곳엔가 숫자로만 나열된 채 예방 가능한 기아와 설사,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우물에 빠진 소녀의 목숨 또한 소중하다.)
하여 나는 149쪽에 제시된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보다 199쪽의 소박한 조언에 더 끌린다.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은 그런 것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굶주리고 있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아무래도 영어권의 덧셈 기본형은 2 2=4인 듯싶다. “‘2 2’라는 덧셈을 배우기도 전에, 독창적이면서도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만들었을 것이다.”(33쪽) “‘2 더하기 2는 4이다.’라는 산수셈의 단순한 명제는 논리학의 원리처럼 자명하다.”(『철학의 문제들』, 159쪽) 조지 오웰의 『1984』(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09)에선 자유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자유란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이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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