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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서 삶의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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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다시 말해 취미가 직업이 된 부류에 들어간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마냥 즐거운가?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늘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일은 일, 취미는 취미가 바람직하다.

나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예증하는, 전거가 풍부한 책을 선호한다. 조안 B. 시울라의 『일의 발견』(안재진 옮김, 다우출판사, 2005)은 바로 그런 책이다. “이솝 우화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철학, 피터 드러커의 경영 이론과 스콧 애덤스의 딜버트 만화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변화해온 일의 개념과 본질, 그리고 현대의 비즈니스 환경에서 분투하는 인간 현실에 대한 숨겨진 블랙 파일을 철저히 해부한다!”

한국어판 표지 설명글엔 빠졌어도 시울라는 마르크스를 여러 번 인용한다. 마르크스의 이름은 ‘프롤로그’에서부터 언급된다. 시울라는 1978년 야간대학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학생들이 수강했던 그녀의 ‘노동철학’ 강의를 떠올린다.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는 철학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첫 시간에는 ‘소외’와 ‘잉여노동가치’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은 마르크스를 읽는 데 특별히 열광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경영학 전공자들로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였으니까. 학생들은 자본가를 꿈꾸는 근로자들이었다.”

103쪽에선 마르크스가 그린 이상향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용한다. “내가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나 어부, 소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인용문 앞 문장에 나오는 “루소를 흉내 내어”라는 표현이 약간 못마땅하지만, 뒷면에서 시울라의 분명한 해석을 읽고 이를 ‘눈감아주기’로 했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의 널리 알려진 구호와 관련한 시울라의 냉철한 현실인식은 그저 우울할 따름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불화의 유일한 조짐은 사무실 벽과 칸막이 안을 장식하고 있는 딜버트 만화뿐이다.”

시울라의 잦은 마르크스 인용은 한국어판 표지의 헤드카피를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 ‘일’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 내가 다양한 사례를 들면서 주제를 예증하는 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변죽을 울리지 않아서다. 전거가 풍부한 책은 대저 본질을 파고든다. 그리고 비판적이다. 『일의 발견』은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시울라는 “일이 실제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은 또한 우리 삶을 파괴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일을 필요로 하는가?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는 점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일이란 무엇인가? “‘일’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 활동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과 관련된 생각과 가치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때로는 어렵거나 불쾌한 활동, 혹은 특정 시간에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을 일이라 부른다. 때로는 어떤 과업이나 활동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좌우되기도 한다. “일은 진지하지만 놀이는 진지하지 않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의 역사는 꽤 길다. 예나 지금이나 몸을 덜 움직이는 일이 환영받는다. “우리의 언어조차도 ‘앉아서 일하는 것’이 특권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의장(chairman)을 존경하고, 왕좌(王座, throne)에 영광을 돌리며, 교수 자리(chair)를 얻고자 하고, 의회에서 한 자리(seat)를 차지하기 위해 입후보한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1980년대 운동가요)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0)는 같은 메시지를 담았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한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나는 두 번째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족’이니, ‘○○, 또 하나의 가족’이니 하는 따위의 수작은 국산이 아니라 수입품이다.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었다.” 다음은 이 책의 인상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다.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r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시울라는 책을 이렇게 매듭짓는다. “이 책은 다만 일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일 뿐이며, 새로운 직업 현실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효과적인 삶의 토대는 궁극적으로 일이란 무엇이고, 지구상에서의 제한된 시간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일한다는 것』(니혼게이자이신문 취재반 지음, 이규원 옮김, 리더스북, 2005)은 2003년 4월부터 2004년 8월까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9부에 걸쳐 연재된 기획취재물을 책으로 엮었다. 기획연재물을 책으로 엮으면서 전면 재구성하고, 대폭 가필?수정했다지만 신문기사에 바탕을 둔 한계는 역력하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계속 늘어나는데 일자리는 오히려 더 줄어들고 있는 현재의 고용 불안 상태도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으리란 것이,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판단일 것입니다.”(‘시작하는 글’에서) 하지만 이것은 『일의 발견』에 비하면 안이한 인식이다.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의미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듦에 따라 그에 대한 수요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일의 발견』, ‘프롤로그’에서)

표지에 나오고 속표지에 또 나오는 “일하는 사람들의 일과 인생에 대한 백인백색 인터뷰”는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다. 책 내용은 인터뷰의 다채로움보다 단편적이라는 느낌이 앞선다. 기획취재의 시점이 꽤 지났다. “일하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번뇌의 모습들”은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취재한 것의 정리는 잘 돼 있다.

“기존의 고용?임금 제도가 붕괴하고 있다. 이는 일하는 사람들 개개인이 자신의 시장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시장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낡았다. 시장경제가 최고인 양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뇐 자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실력만 있으면, 정규직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어느 파견사원의 자신감은 큰 착각이다. 이 파견사원이 정규직원보다 높은 급료를 받는 건 예외적인 경우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동일한 일을 같은 시간 동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적을 뿐더러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거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먹고살기』(양병무 지음, 비전과리더십, 2009)는 경제경영 실용처세서 분야의 자기개발서다. 또 그것은 이 책의 부제목대로 ‘모든 직장인의 로망’일 수 있다. 이 책이 속한 출판 장르의 속성상 이 책은 다소 느슨하다. 엄밀하지 못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꿈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도 10%를 넘지 못할 것이다. 많아야 20% 미만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좀 오래된 다른 나라의 조사결과이긴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은 1천 명 중 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겨우 0.3%다. 꿈의 직업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아무리 많아도 2%를 넘지 않으리라.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은 정말 행복한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다시 말해 취미가 직업이 된 부류에 들어간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마냥 즐거운가?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늘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일은 일, 취미는 취미가 바람직하다.

“취미를 직업으로 전환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결단의 순간이 올 때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삶의 윤활유로 취미를 즐기면 된다. 그러나 만약 취미를 직업으로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도전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단 취미를 직업으로 바꾸겠다는 결심이 서면 양다리 걸치기가 아니라 ‘배수진’을 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 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해야 한다.”

한 연기파 배우는 최근 인터뷰에서 “(나에게 연기란) 목숨 걸고 하는 취미다. … 재미있어서 하는데, 목숨 걸고 하는 취미”라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런 결의가 낯설지만은 않다. 바둑의 명인은 진즉에 이러지 않았는가. “목숨 걸고 (바둑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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