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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 하니프 쿠레이시의 『친밀감』

내 인생에 해피 엔딩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선택의 순간, 누구도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다.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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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 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 샤를 보들레르(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늦은 저녁 퇴근길 지하철역. 열차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승강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열차는 서지 않고 곧장 역을 통과해 지나가버린다. 가끔씩 이렇게 역을 그냥 통과해서 지나가는 지하철이 있다. 빠르게 스쳐가는 열차의 내부는 온통 어둡고 텅 비어 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어디로 가는 걸까. 불 꺼진 텅 빈 열차의 질주는 어떤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종종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끔씩, 삶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면 가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욕망이 문득 눈을 뜨고 충동질을 시작한다. 그럴 때면 나도 보들레르처럼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먼 곳에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리셋(reset) 버튼을 누르듯 간단히 처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공상은 공상일 뿐이다. 화학적으로 안정된 물질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려면 그만큼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듯이, 삶의 조건들이 안정돼 있을수록 새로운 삶을 향한 충동은 그만큼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기대감이나 설렘보다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원리다. 그래서였을까. 하니프 쿠레이시의 소설 『친밀감』은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제이’는 하룻밤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비현실적인 계획’을 진짜로 저질러버림으로써 ‘현실’로 만든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떠나지 않는다면 새로움을 맞을 여지는 없을 것이다. 옮겨 간다는 건 당연히 사람들과 과거와 옛 자아에 대한 배반이다.
- 본문 중에서

그 남자의 이름은 ‘제이’. 소설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그는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중년 남자다. 그에게는 10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파트너 ‘수전’(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과 어린 두 아들이 있다. 런던의 여느 중산층 가정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지만, 사실 제이와 수전 사이의 애정은 식은 지 오래다. 한때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엘리트 여성 수전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그건 과거지사일 뿐이다. 그는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일상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그녀가 말한다.
“욕실 문 좀 닫지 그래?”
“뭐라고?”
“그래 줄래?”
그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소설은 가족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어느 중년 남자의 미묘한 심경 변화를 추적한다. 그것은 단 하룻밤의 기록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슬픈 밤이다. 나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며 고민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다. 제이의 결심을 알 리 없는 수전과 아이들에게 그 밤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수많은 밤중에 하나일 뿐. 그 간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다.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은 대개 비슷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은 슬프고 가끔은 즐겁고 때론 화가 나고 때론 우울하고 그러나 대부분은 지리멸렬한 그런 일상들. 고만고만한 하루하루를 어찌어찌 통과하면서 우리는 크게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행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안정된 생활과 거기서 파생되는 권태를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 영혼을 불태우는 사람들. 제이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내게 좌절감을 주는 건 침울함이 아니라, 침울함의 깊이와 끝 모를 지속이라는 건 알아냈다. (중략) 오늘 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내 감정을 뒤덮는다.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뭔가 두려운 것이 지겨운 것보다는 낫고, 사랑 없는 인생은 길고 긴 권태라고.
- 본문 중에서

아침이면 나는 떠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른 건 더 많은 삶을 향한 내 갈망 때문이다. 우리가 집요한 결핍감에 시달리는 갈망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충동이 일어난다고 모두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고, 괜찮은 여자마다 따라갈 일은 없다고 분별력은 말한다. 하지만 어떤 영광이 뒤따를지 짐작할 수 없다 해도 그 가운데 어떤 건 좇아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 본문 중에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물론 그도 완전한 철면피는 아니다. 두 아이에 대한 애정, 안락한 집, 사회적 평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그 밖에 이미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훌쩍 떠난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내일 아침 떠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도 그는 계속 흔들린다. 잠든 아내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 ‘그녀가 깨어나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를 안아 준다면, 나는 베개에 몸을 파묻듯 무너져 내려선 집을 떠나지 않게 되리라.’ 하지만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가 있다. 샘 멘데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

존: 댁들 같은 사람들이 뭐가 겁나서 도망가요?
에이프릴: 도망 아니에요.
존: 파리에 뭐가 있는데요?
에이프릴: 다른 삶이요.
프랭크: 도망일 수도 있죠.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으로부터의…….
존: 공허하고 희망 없는? 이제 실토하네. 공허한 건 많이들 인정하지만 ‘희망 없다’고까진 말 못하는데…….
-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중에서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미국.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교외 지역에 살고 있는 30대 중산층 부부다. 프랭크는 사무기기 판매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이고, 한때 연극배우를 꿈꿨던 에이프릴은 현재 전업 주부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사실 그들은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일상에 찌들어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프릴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한다. 파리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는 것. 처음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프랭크도 점점 마음이 움직인다.

파리에서의 멋진 생활을 상상하며 장밋빛 꿈에 부풀어 오른 프랭크와 에이프릴. 그러나 현실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떠날 준비로 분주하던 어느 날, 프랭크는 회사로부터 파격적인 승진 제안을 받게 되고, 에이프릴이 셋째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데…….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에이프릴과 달리, 프랭크는 결국 현실에 안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쉐프: 파리에 못 가서 안됐어요. 기대가 컸을 텐데……. 오해 말고 들어요. 난 거기에 가봤어요. 여기와 다를 거 없어요.
에이프릴: 꼭 파리를 원한 건 아니었어요.
쉐프: 그냥 벗어나고 싶었군요.
에이프릴: 행복하고 싶었어요.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난 그이도 그럴 줄 알았죠. 근사한 삶을 꿈꿀 거라고……. 방법은 몰라도 어쨌든 그 희망으로 살았어요. 나 참 한심하죠? 난 바보예요. 약속되지도 않은 일에 모든 희망을 걸다니……. (중략) 난 다른 삶을 꿈꿨어요. 지금도 포기가 안 돼요.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어요. 무의미한 인생이죠.
-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중에서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할리우드 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타이타닉> 이후 10년 만에 공연한 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두 배우 모두 참 멋지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특별한 세트나 조명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촬영 장비가 동원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두 주연배우가 격렬한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와 팽팽한 긴장감, 소름끼치는 전율 등이 전달됐다. 아주 생생하게. 이런 분위기는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 등으로 이미 실력을 검증받은 샘 멘데스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말고 멍하니 창문을 응시한다거나, 머뭇거리며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 등 소소한 일상의 장면 속에서 풍부하고도 섬세한 감정들을 잘도 포착해낸다. 그런 작은 정경들이 모여 보는 이의 공감대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특히 꿈이 좌절된 후 에이프릴이 보여준 반응은 압권이다. 나는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동경과 갈망이다. 그것이 영화의 주제가 되길 바랐다. 모든 캐릭터들이 어떤 것을 갈망하고 동경하는 느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에이프릴은 그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의 동경은 파리로 표현된다. 하지만 파리는 은유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들의 파리, 우리의 도피처, 우리의 에덴을 각자 가지고 있다.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가능한 때가 있다. 에이프릴은 다시 그런 시기로 돌아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대에도 30대인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정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도 어렵다. 그냥 현실에 맞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고민이다.”
- 샘 멘데스 감독 인터뷰 중에서(『무비위크』, 2009년 1월)

『친밀감』은 1998년 출간 당시, 그 내용이 작가의 실제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저자인 하니프 쿠레이시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다. 그는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4)의 시나리오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이후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 제작자 등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쌓아왔다. 『친밀감』 역시 <정사>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베를린 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그러나 윤리적 논란을 비껴갈 수는 없었던 듯. 쿠레이시의 전 파트너이자 아이들 엄마인 트레이시 스코필드는 자신들의 사생활을 고스란히 옮긴 이 작품에 대해 이 책을 소설이라고 부르느니 ‘차라리 생선이라 부르는 게 낫다.’며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사실 이 소설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저버린 뻔뻔하고 이기적인 어느 중년 남자의 이야기’ 정도로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다. 세간의 시각으로 봤을 때 주인공 제이는 가장으로서 책임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몹쓸 남편이자 무정한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감정이입의 대상을 제이에게로 맞춰보자.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게다가 한 번뿐인, 심지어 짧기까지 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의 행복이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따져보면 그의 선택을 왠지 이해할 것도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아닌 척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이미 식어버린 사랑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며 선택을 유예한다.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은 때로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내 인생에 해피 엔딩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선택의 순간, 누구도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다. 떠날 춰인가, 머물 것인가.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제 다른 무언가에 충실해지길 바라는 것 같다. 혹은 다른 누구에게. 그래, 나 자신에게.
-본문 중에서

***

<이선희 PD의 책갈피>로 예스24와 인연을 맺게 된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동안 제 칼럼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칼럼을 통해서 제 삶이 좀더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들께도 제 글이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선희 드림


※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선희 PD의 책갈피> 연재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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