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어서 빨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쭉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 년 정도 전부터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침대 옆에 두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영화 <다크 나이트>를 보고 난 뒤였다. 보라색 양복을 입고 찢어진 빨간 입술을 핥으며 고담시를 사뿐사뿐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조커는 “나를 왜 죽이려 하느냐?”고 고통스럽게 소리 지르는 배트맨에게 “내가 널 왜 죽여? 너 없이 누구랑 놀아?”라고 대답한다. <다크 나이트> 최고의 명언 “You complete me!(너는 나를 완전하게 해.)” 역시 조커가 그 순간 배트맨에게 한 말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조커의 말과 행동들은 나에게 묘한 기시감을 줬다. 그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5장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와 11편 9장 악마가 이반을 찾아온 장면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11편에서 이반은 한밤에 찾아온 악마에게 “너는 나의 환각에 불과해. 너는 나 자신의 구현, 고작해야 나의 한 측면, 가장 역겹고 어리석은 부분이야!”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악마는 “고통이란 게 없으면 인생에 무슨 낙이 있겠나? 모든 것이 끝없는 기도의 연속으로 바뀔 텐데, 그건 거룩하긴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부정방정식의 엑스라네. 나는 모든 시작과 끝을 잃어버린 삶의 어떤 환영이지.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악을 원하지만 정작 선만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했지. 하지만 나는 완전히 반대야. 나는 어쩌면 자연 전체를 통틀어 진리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선을 바라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라. 내게 주어진 소명은 바로 한 명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수천 명을 파멸시키는 것이지. 나에게는 두 가지 진리가 있지. 하나는 저 세계의 진리,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의 진리가 있어. 어떤 것이 더 순수한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날 밤 이반을 찾아온 악마의 이 외침은 무척 고단한 조커가 탈취한 경찰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마치 미인이 긴 머리칼을 말리듯 밤바람에 내맡기며 고담시를 파괴하러 가는 장면까지 내 머릿속에서 쭉 겹쳐졌다. 진정으로 선을 원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 범죄와 광기라 하더라도 그 방법을 쓰겠다는, 그리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이런 이상에 헌신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다는 도스토예프스키식 논리(『죄와 벌』에서처럼)와 히스 레저의 조커는 묘하게 연결되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의 줄로 고층 빌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은 잘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진리이자 소명은 돈도 권력도 아니고, 인간은 모두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 자기 자신도 전체 인류와 더불어 파멸하는 것이었단 것만은 분명하다.
조커는 인간은 약하고, 비열하고, 세상은 불공정하고, 오로지 광기만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타락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것을 전 인류를 대표해서 증명해 볼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조커 역시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인류가 정의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궁극적으로는 원했던 것일까? 그는 이반의 악마처럼 홀로 외로이 지독한 불명예를 거머쥐기로 작정한 것이었을까? 그가 인류를 위한 희망일 수는 없지만 인류를 위한 그로테스크한 순교자일 수는 있는 것일까? 이반의 악마가 그 자신의 역겹고 위선적인 환각의 총합이었듯이 조커도 우리 안에 있는 허무주의와 광기와 악마성의 총합인 것 아닐까? 구원은 거의 악마적인 세월 같은 고통 끝에 오는 것이란 것을 도스토예프스키만큼 길고 선정적으로 쓴 작가는 없었던 것 같기 때문에, 결코 조커의 것에 떨어지지 않는 온통 극단적이고 광기 어린 이야기 투성이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어서 빨리 다시 읽고 싶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어서 빨리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두 번째 이유는 레오니드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이란 소설을 오랫동안 조금씩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은 겨울의 절정인 12월에 한낮의 열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때 주인공의 손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의 『안나의 일기』가 들려 있었다. 남편보다 무척 어린 안나는 정성껏, 사려 깊게 남편을 사랑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그들 부부는 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 때문에 곧잘 싸웠다. 그런 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서재에 틀어박혀버리지만 밤이 되면 밤 인사를 하러 왔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깨워서 쓰다듬고 입을 맞춘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가슴에 키스를 하고는 이제 항해를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밤 인사이자 부부간의 섹스는 ‘항해’로 묘사되는데, 잊을 수 없을 만큼 슬프다.
“그들은 물에서 동시에 손을 쭉 내어 뻗고 동시에 숨을 폐에 모으면서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해변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저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지만 거의 매번 그는 자신을 옆으로 밀어내거나 심지어 뒤로 가게 만드는 맞파도에 부딪혔다. 그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리드미컬하게 팔을 저으면서 어느 먼 곳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미 수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겨우 물속에서 발을 바닥에 대보려고 버둥거릴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녀와 함께 헤엄칠 수 없게 만드는 이 파도는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간수 장교의 누런 눈빛과 탐욕스럽게 팽창하는 동공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초소 한가운데 놓여 있는 수많은 몸뚱이가 닿아 반질반질해진 낮은 참나무 책상에 눕기 위해 죄수복의 호크를 황급히 끌렀다. 달구어진 철사로 근육과 뼈들을 조이는 듯한 채찍의 충격이 가해지자 그는 견딜 수 없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십여 년에 걸친 수형 생활을 했었고, 그때 채찍질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똑같은 느낌을 다른 여자와 있을 때도 받았다. 그에게 여자들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 문으로 들어오려고 애쓰지만 저지당한 사람들의 이미지다. 결국 여자들은 그가 받은 치욕의 증인들이다. 그는 이 치욕 때문에 자기가 모든 감각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항해 중에 다시 손을 리드미컬하게 저으면서 공기를 마시려고 얼굴을 내밀 때, 이번엔 물살이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먼 수평선, 말할 수 없이 푸른 곳까지 헤엄쳐 갔다. 그때 그의 눈앞에 어두운 빛깔의 삼각형이 나타났다. 삼각형의 정점, 그는 그 정점에 달콤하고 어두운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리드미컬하게 헤엄쳐 그 정점에 다가가고 싶어 했다. 징역과 가난과 간질, 자학적인 열정, 질투심, 치욕, 이등변삼각형, 결코 닿을 것 같지 않은 정점에 대한 욕구는 한평생 도스토예프스키를 따라다녔다. 그가 노름판에서 손에 5프랑을 꼭 쥐고 자기 앞에 쌓일 동전의 더미가 이등변삼각형의 정점을 이루는 순간을 기다리며, 그때야말로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일 거라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5프랑을 단숨에 잃고 집에 돌아와 하숙비 지불을 요구하는 하숙집 안주인과 싸우는 아내 안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또 ‘어서 빨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살해당하는 아버지의 이름 표도르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이름과 똑같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속에서 가장 파렴치한 인물에게 자기의 이름을 내주었다. 내 상상 속에서 세 아들은 이등변삼각형의 꼭짓점에 하나씩 서 있다. 세 아들의 이름은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다. 가장 어린 알료샤는 스무 살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사랑한 아들은 드미트리인 듯하고, 내가 가장 사랑한 아들은 이반이다. 그리고 전 인류가 사랑한 아들은 알료샤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꼭짓점이 달콤하고 어두운 정점을 이룰지, 사실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어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부만을 마치고 숨을 거둬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역시 리드미컬하게 팔을 움직여 닿을 수 없는 해답이 손짓하는 곳으로 항해하고 싶었다. 푸르고 어두운 한 차원 높은 곳으로.
‘프로이트식’으로 개인의 속마음을 공식화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세련되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들에게 도저히 공식화할 수 없는, 원시적인 러시아의 대지 같은 ‘카라마조프식’ 마음은 어느 순간엔 당혹함을 주고, 어느 순간엔 쾌감과 묘한 해방감과 흥분을 주기도 한다. 그들의 세계는 기괴하긴 해도 생명력이 펄펄 끓어 넘친다. 그들의 마음은 극심한 비상과 추락, 범법자와 성자, 악과 구원 사이를 절대로 중간 과정 없이 오락가락한다. 한심하고 비열하고 누런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눈동자가 성자의 신비롭고 연민에 가득 찬 눈동자로 변해 있는 것을 본 듯한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범죄 애호가이자 병적인 자존심의 소유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두운 마음 안에 있는 신성, 품격, 고결함, 더 어두워지려는 욕망, 더 추락하고 싶은 욕망 등을 저 어슴푸레한 안개에 쌓인 위태로운 나무 끝에 앉아서 우리를 향해 마구 내던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그건 치욕과 자존심의 볼레로이고, 악과 구원의 볼레로이다. 그는 늘 ‘한 차원 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 과정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추구했다. 그동안 삶은 마치 잃기 위해서 계속 돈을 거는 도박사의 그것처럼 한없이 더 까마득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어느 해 오랫동안 흩어져 살던 다섯 명의 카라마조프가 운명의 장난 탓인지 다시 만나게 된다. 소설의 중간 부분에 전 러시아를 떠들썩하게 하는 패륜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아버지 살인 사건이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큰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 돈을 탈취해 그 돈으로 흥청망청 술자리를 벌이다 바로 다음날 체포되는 걸로 보도된다. 그 가문의 역사는 이렇다.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젊어서 두 번 결혼해 세 아들을 뒀다. 첫 결혼에서 낳은 아이가 드미트리,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가 이반과 알료샤다. 아버지는 그들을 낳자마자 낳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 집 뒤뜰에 방치한다. 늘 술에 절어 치마 입은 여자라면 아무나 치근덕거리고 심술궂게 돈놀이나 하던 것이 극도로 파렴치하고 젠체하는 그의 인생이었다. 그 아이들을 먼 친척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둬 기른다. 아버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예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그들이 자기 몫의 유산이나 요구하지 않았으면 싶어 한다. 아버지 카라마조프는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어 하고, 오래 사내구실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에겐 돈이 필요하다. 그는 끝까지 세상의 추잡함 속에 허덕이며 살고 싶어 한다. 그는 고결하게 사는 것보다 추악함 속에 허덕이며 사는 것이 더 달콤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몰래 하는 짓을 그만은 터놓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속마음은 아마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천국에 관해서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의 철학은 단 하나, ‘돈만 있으면 다 된다.’이다. 그는 사건이 나던 그해에 그루센카라는 풍만한 처자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단 한 번만 그의 집을 밤에 찾아와 준다면 3,000루블을 줄 작정이었다. 그는 그 돈을 봉투에 넣고 장밋빛 리본으로 묶고 ‘병아리에게.’라는 말을 써두었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사건 사고가 많은 술주정뱅이, 허풍선이, 방탕한 장교였고, 황당무계한 떠버리였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고,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에든 몰두하는 열정적인 사람이기도 했고, 기분파로 남에게 질펀하게 퍼주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는 사건 무렵 유산 문제를 담판 지으러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자기에게 별로 남은 게 없단 걸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저주하면서도 “나는 카라마조프니까!”라는 말을 자주한다. 어차피 심연 속으로 떨어질 거라면 차라리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발뒤꿈치를 위로 든 채 곤두박질치는 편이 낫고, 굴욕적인 자세로 추락하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치욕으로 느껴질 만한 일이 속마음으론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은 바로 소돔에 있는 것 아닐까?’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라는 아름답고 부유한 약혼녀가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버지가 열을 올리는 그루센카에게 홀딱 빠져버리고 만다. “그루센카, 이 망할 년의 몸에는 기가 막힌 곡선이 하나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약혼녀 카체리나와 파혼할 생각을 한다. 파혼하고 그루센카와 어디 멀리 딴 곳에 가서 살림을 차리자고 맘먹고 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그는 빈털터리였다. 그는 약혼녀의 돈 3,000루블을 살짝 가로챘기 때문에 그 돈을 갚고 새출발을 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은 도둑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느 날, 그루센카 문제로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발로 짓이기게 된다. 그는 여자를 두고 친아버지와 싸우느라 온갖 추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적어도 사건 발생 한 달 전에는 온 동네에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가 아버지를 죽인 거란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천 명이 넘을 지경이 되었다. 결국 이런 모든 증거들과 증언들이 모아져서 그는 그루센카의 사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찰나에 “퇴역 중위 카라마조프 씨, 당신이 간밤에 일어난 당신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고소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예심판사 일행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루센카를 향한 그의 사랑 안에는 그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인생 전체가 난장판이란 걸 알고 있었고, 이제야말로 드높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던 참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비열하고 추잡한 일만 해온 사람이지만 자신만의 고결함을 찾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날마다 개과천선하리라 가슴을 치면서도 그것이 잘 안 되었던 자신에게 결국 운명이 정신 차리라고 이런 망치를 휘두르는구나, 생각한다. 드미트리는 이렇게 자신을 변론한다. “불행히도 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불행히도, 불행히도.” “죽이고 싶었으나 죽이진 않았다…….”
그런데 둘째 아들 이반은 모스크바에서 만난 형의 약혼녀, 오만한 미인 카체리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반은 고향집에 잠시 집에 들른 뒤 유럽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그도 형처럼 아버지를 맘속 깊이 혐오하고 있었다. 그는 명석하고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반은 떠나기 전날 동생 알료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내 생각으론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에게는 고통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은 노트가 있었다. 그 이야기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농노제가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초엽, 부유한 장군이 한 명 있었는데, 그의 행랑채에 살던 기껏해야 여덟 살이나 될까 말까 한 소년이 돌을 갖고 놀다 그만 돌을 잘못 던져서 장군이 애지중지하는 사냥개의 다리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장군은 누가 그랬는지 캐물었고, 소년은 고백했는데, 장군은 아이를 그 어미에게서 빼앗아 밤새도록 유치장에 가두어 놓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장군은 사냥 갈 채비를 하고,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주리라 작정하고 행랑채 사람들을 전부 모아 놓고, 그 맨 앞에 죄지은 소년의 어머니를 세워 놓았다. 마침 날씨는 그런 사냥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안개 낀 음울하고 추운 가을날이었다. 장군은 소년의 옷을 벗기라고 명령하고 소년이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자 “뛰어라, 뛰어!” 하고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이 뛰자 장군은 이번엔 사냥개들에게 “달려들어!”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 소년을 향해 사냥개 무리 전부를 풀어버린 건데, 어머니 눈앞에서 수캐들이 소년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서 물어 죽여버렸다. 장군은 가벼운 보호관찰형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반은 오래전부터 더 이상 세상을 이해하지 않기로 맘먹었다. 이반은 어쩌면 아주 오래 살아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박해했던 장군과 얼싸안는 순간을 정말로 보게 될 지도, 그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부활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주님이 옳았습니다.”라고 외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자기 자신만은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눈물은 보상받아야 하고, 눈물이 보상받지 못한 채 남아 있다면 세상의 조화로움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생각들을 한다. ‘혹시 가해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용서하고 부둥켜안고 싶지만, 더 이상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원치 않지만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은 조화로운 세상은 원치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바로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 것이다. 그 자신은 차라리 복수의 순간을 맛보지 못한 고통들과 함께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비록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해도 “나는 나의 분노를 간직할 거야. 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세계로의 입장권을 거부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복수받지 못한 눈물 위에 그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사랑과 용서로 가득한 조화로운 세상은 자기에겐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반의 이런 생각은 그의 서사시 「대심문관」으로 이어진다.
대심문관 이야기도 이반은 알료샤에게 들려준다. 어느 날 이교도들을 화형 시킨, 연기 냄새 은은한 스페인의 세비야에 그리스도가 내려오는데,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해버린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만약 광야에서 광야의 돌들을 빵으로 바꿔 보이는 기적을 행했다면 인류가 은혜를 아는 온순한 양떼처럼 네 뒤를 따라왔을 터인데, 너는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아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인간들이 너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는 네가 정말로 그자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라고 외쳤을 때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너는 기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믿음을 갈망했기 때문인데, 너는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 인간은 맹세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게 창조되었다. 네가 인간을 덜 존경했더라면, 그래서 인간에게 더 적은 걸 요구했더라면 인간의 짐은 더 가벼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반의 이런 사유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에서 무서운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던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넷째 아들일지도 모르는 스메르쟈코프였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아이일까?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느 해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의 현관에서 잠자던 정신 나간 농아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처녀는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기를 쓰고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집으로 와 아이를 낳고 죽어버린다. 그 아이가 스메르쟈코프이다. 그는 표도르의 요리사로 일하는데, 어느 날 표도르가 술에 취해 떨어뜨린 돈을 찾아 주어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다. 그는 간질병 환자이고, 모욕을 받아 병들고 뒤틀린 절대 자존심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박약에 간질병을 앓는 병든 암탉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야말로 논리적이고 치밀한 음모가다. 그가 살인을 기획하고, 저지르고, 드미트리에게 뒤집어씌우는 치밀한 과정을 이반에게 묘사하는 장면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세계문학 사상 최고의 악당 반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일 거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론
『오셀로』의 이아고에 이어서 2등이다.)
그런데 그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한밤의 정원에서 이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묘한 시선을 던지며 살인 사건을 예고한다. “제가 내일 간질 발작을 일으킬 예정인데…….” 그렇게 해서 살인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그 살인을 방치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살인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다는 이반의 자의식이 결국 악마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법정에서 이반은 스메르쟈코프가 진짜 살인범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드미트리는 유죄로 판결되어 유형을 떠나게 된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사랑이 가득한 인물은 알료샤다. 그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고, 순진무구하고, 해맑고, 다른 무엇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을 탓하지 않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옥에 갇힌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는 진심을 말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소설 속에서 결정적으로 나를 두 번 실망시켰다. 첫 번째는 이반의 「대심문관」 서사시를 들을 때 “형!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거야?”라는 식의 겁먹고 상식적인 반응만 보였을 때이고(마치 조커 앞에 무력한 배트맨처럼), 두 번째는 이반이 스메르쟈코프의 범행을 자백받은 후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를 죽였다는 증거물로 내놓은 돈 3,000루블을 보여줬을 때 “형은 아픈 거야!”라고 말하며 이반의 이마에 찬 수건을 얹어 주며 형을 재우려고 애쓸 때이다. 그 장면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알료샤! 그게 아냐. 지금 돈을 들고 경찰서로 뛰어가야 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그 밤 스메르쟈코프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이반의 주장은 법정에서 가볍게 무시되어버린다. 이반이 내놓은 3,000루블의 정체에 대해선 누구나 의심을 품을 만하기 때문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뭔가 다른 이유로 치밀함을 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즉, 그는 치밀한 법정 드라마를 원치는 않았던 셈이다. 저명한 변호사는 재판장에서 배심원들에게 만약에 드미트리에게 무죄를 선고해 준다면 그는 ‘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죄인이고, 그 어떤 사람보다 무가치한 존재다. 사람들은 나보다 훌륭하다. 왜냐하면 나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라 한다. ‘죄악은 있으되 죄인은 없다.’ 이 말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악은 있으되 누구나 죄인이다.’라고 바꾸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죄인이란 생각이야말로 인간 마음속에 영원한 천국을 넣어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의 맨 마지막 장에서 일루샤라는 이름의 소년이 죽는다. 그 소년은 어느 날,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의 드미트리가 술에 취해 소년의 아버지의 수염을 질질 끌고 술집에서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을 보게 된다. 일루샤는 곧장 “아빠. 아빠!” 하고 외치면서 아버지를 껴안고 드미트리에게 “아버지를 놓아주세요. 제발 놓아주세요. 이분은 우리 아빠예요. 아빠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소리 지르며 고사리 손으로 드미트리의 손을 붙잡고 드미트리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 광경을 학교 친구들이 보고 친구들은 일루샤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은 아버지를 두둔하여 혼자 모든 아이들을 상대로 돌팔매질을 하는 전쟁을 시작한다. 소년의 누나는 꼽추였고, 엄마는 정신병자였고, 아빠는 알코올중독인 실업자였고, 소년은 병들어 있었는데, 친구들과 소년은 결국은 화해를 하게 된다. 그런데 화해를 하자마자 소년은 이내 죽고 만다. 그리고 소년이 묻히고 싶어 했던 바윗돌 옆에서 알료샤는 소년의 친구들에게 이런 연설을 한다.
“여러분, 우리는 곧 헤어질 겁니다. 내가 두 형님들과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형님은 유형을 떠날 것이고, 다른 형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까요. 나도 곧 이 도시를 떠날 것이고,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헤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하지만 여기 일루샤의 바윗돌 곁에서 첫째는 일루샤를, 둘째는 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약속합시다. 그리고 훗날 우리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 우리가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이나 서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한 가엾은 소년을 땅에 묻었다는 사실은 기억합시다. 전에 저기 다리 옆에서 이 소년에게 돌팔매질을 퍼부었던 일, 여러분은 기억하시죠? 그다음엔 다들 이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잖습니까! 멋진 소년, 선량하고 용맹스러운 소년이었으며, 명예를 존중했고, 아버지의 명예가 치욕을 겪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 이 소년을 평생토록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일에 몰두할지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를지라도, 아무리 큰 불행을 겪을지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한때 이곳에서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결합되고, 그것을 공유하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니다. 이런 감정을 갖고 이 가련한 소년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훌륭한 모습을 갖게 됐을 테니까요……. 어쩌면 바로 이 추억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으며 생각을 고쳐 보고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선량하고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일루샤의 얼굴, 그 옷, 초라한 신발, 그 관, 그 불행하고 죄 많은 아버지를, 일루샤가 아버지를 위해 혼자 용감하게 온 학급을 상대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음을 기억합시다.”
“기억할 거예요, 기억하고말고요!” 소년들이 다시 소리쳤다.
“사랑스러운 벗들이여,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뭐든 참되고 좋은 일을 한다면 삶이란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요, 카라마조프 씨. 우리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
“우리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다른 소년들이 전부 호응해 주었다.
대부분의 소년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반짝였다.
“카라마조프 만세!”
“그리고 죽은 소년을 기억합시다!”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을 잡고!”
이 장면 때문에 우리는 알료샤를 잊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 장면과 알료샤의 스승 조시마 장로의 말로 짐작컨대, 악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답은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에서 알료샤를 혁명가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 혁명가가 어느 날 자기 삶의 가장 가혹했던 한 부분을 회고하면 한 형은 끌려가고, 한 형은 죽어가고, 한 가난했고 고통받았던 소년이 묻혔을 때, 그때 다른 소년들이 눈물을 반짝이며 서 있던 장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조커나 이반에게 연민을 품는 것은 우리가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순수하게 고결해지고 싶어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조커의 기대를 배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 더 나은 사회나 한 차원 높은 깨달음으로 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커나 이반의 호소에 매혹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