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긍정론 >>> 거짓말 부정론
이거 정말이야? 거짓말이지!
참말을 압도하는 거짓말의 위세가 당당한 요즘 시속의 반영인가, 아니면 예전부터 그래온 지당한 결과인가?
약간 신경을 썼다고는 해도 거의 무작위로 뽑아든 거나 다름없는 거짓말 관련서 네 권의 속내가 ‘거짓말 긍정론 우세’로 드러난다면 이를 어찌 봐야 하나? 생각을 갖고 대충 집어든 거짓말 관련서는 3대 1로 긍정론이 부정론을 앞지른다. 참말을 압도하는 거짓말의 위세가 당당한 요즘 시속의 반영인가, 아니면 예전부터 그래온 지당한 결과인가?
로렌 슬레이터의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이상원 옮김, 에코의서재, 2008)는 난해하다. 책의 구성부터 그렇다. “전개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책”이라는 뒤표지에 실린 <워싱턴 포스트>의 말마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1장은 달랑 한 문장에 불과하다. “나는 과장한다.”
전체 분량으로 따져 3분의 1 지점에 약간 못 미치는 80쪽에다 ‘감사의 말’을 껴놓은 책은 처음 본다. 그것도 이야기의 가짜 끝 앞이다. “독자들께”로 시작해 “1998년 1월 18일/사랑을 담아, 로렌”으로 마무리되는 4장 「빛과 아우라」는 43쪽에 걸친 긴 편지글일까? 아니다. 일반적인 평서문이다. 사실 나는 뭔가 감춘 느낌을 주는 편지글투를 신뢰하지도 선호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편지 아닌 편지에 인용된 어느 목사의 ‘-ㅂ니다’ 어투는 공감한다. 말투가 아니라 거기 담긴 내용 말이다. “죄란 책임의 회피입니다.” 이상한 서간문 다음에는 짧은 논문이 실려 있다. 5장의 제목은 이렇다. 「뇌량 절개 수술 이후에 나타난 생물심리학 결과」.
가장 황당한 구성은 아마도 필시 7장 「이 책의 마케팅 전략」이리라. 저자의 마케팅 전략에 나타난 저자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목적은 소설과 회고록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결국 이 글은 한 거짓말쟁이의 초상, 강박에 사로잡힌 병든 마음, 스스로 짜놓은 덫, 그럴싸하게 꾸민 이야기, 현실의 신화화, 그뿐입니다.”
또한 “제가 여러분을 가지고 노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단지 독자라는 이유만으로 저자의 노리개가 되는 것은 불쾌하다. 하여 나는 이에 응징한다. 마케팅 전략 양편에 놓인 두 장을 건너뛴다. 6장 「섹스, 거짓말, 벚나무」는 혹시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 8장 「놀라운 은총」은 혹시 간증?
이 책을 통해 아우라(aura)는 발터 베냐민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우라는 간질 발작에 앞서 나타나는 전초 현상을 일컫기도 한다. 번역자는 107쪽에서 사전을 찾게 한다. “욧잇”은 오자가 아니었다. “요의 거죽을 싸서 등 쪽으로 넘어오게 하여 시치는 흰 천.” 욧잇의 국어사전 풀이다. [욧닛]이라고 발음한다.
204쪽의 “진실된다”는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오자다. 어색한 표현이다. ‘진실하다’가 적절하다. 굳이 피동을 고집한다면 ‘진실되다’가 맞다. “좋은 책들이 다 그렇듯 이 역시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다만 내 안에 늘 있던 지혜를 끌어냈을 뿐이다.” ‘독서자극론’은 내가 읽은 이 책의 부분 중 가장 공감하는 대목이다.
거짓말 긍정론의 나머지 두 권은 비슷한 점이 여럿 있다. 앞표지 그림의 피노키오 인형, 1인당 하루 평균 거짓말 200번, ‘하얀 거짓말’과 그것의 사례 두 가지 등이 그렇다. 하얀 거짓말의 보기 두 가지는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베낀 것으로 여겨진다. 이게 흠으로 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거짓말 긍정론이기에. 물론 거짓말 긍정론의 나머지 두 권은 다른 점이 더 많다.
『거짓말의 딜레마-거짓말, 기만, 사기, 속임수의 심리학』(클라우디아 마이어 지음, 조경수 옮김, 열대림, 2008)은 한국어판 부제목이 보여주듯 거짓말 백과의 측면이 있다. 머리말 「거짓말을 위한 변명」에선 예의 거짓말 빈도를 거론한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누구나 하루 평균 200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심리학자들은 10분의 대화에서 대략 2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다. 정확한 수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짓말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거짓말을 하며 생각보다 훨씬 자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사말과 침묵에서까지 거짓말을 적발하는 거짓말 연구자들의 철두철미함은 납득이 안 가는 면이 없지 않다. 낯익은 이웃과 주고받는 인사치레에 거짓이 스며있다는 주장은 좀 억지스럽다. 나는 제법 친숙한 누군가가 내 안부를 물으면 정확히 답하려 노력한다. 나는 컨디션이 안 좋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인간관계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침묵이 거짓이라면 묵언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유렉 베커의 소설 『거짓말쟁이 야콥』은 하얀 거짓말 현상을 바탕으로 하고, 이어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도 하얀 거짓말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대목은 표절이 아니다. 볼프강 라인하르트의 『거짓말하는 사회』는 이 책의 참고문헌 중 하나다. 그리고 “거짓말의 이미지가 항상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는 ‘거짓말’을 뜻하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착오와 허구, 거짓말을 구분하지 않았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거짓말 연구의 개척자 폴 에크만에 따르면 징벌에 대한 불안감, 이득을 보려는 것, 남을 징벌로부터 지켜주고자 함이 그 이유다. 클라우디아 마이어는 지금까지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중요한 동기에 주목한다. “바로 거짓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이다. 누군가를 속여 넘겨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나는 내가 정직하게 대하는 누군가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와의 인간관계를 끊겠다. 클라우디아 마이어가 머리말에서 예로 든 흔한 거짓말 12가지 가운데 “텔레비전 잘 안 보는데”와 “아니, 난 네가 안젤리나 졸리보다 예쁘다고 생각해”는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집은 TV가 없다. 나는 존 보이트의 따님이 예뻐 보인 적이 거의 없다.
『거짓말하는 사회-우리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김현정 옮김, 플래닛미디어, 2006)는 겉보기보다 내실 있다. 비밀투표의 역설(63쪽)과 ‘공개적’의 아니러니(120-121쪽)는 상반되는 모순을 증폭시킨다.
하얀 거짓말은 위약 효과를 떠올린다. “선의의 거짓말이 지닌 약점은 거짓말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이 밝혀지면 사태는 거짓말을 하기 이전보다 악화된다.” 환자가 위약이 가짜임을 아는 순간부터 위약의 효능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거짓말 현실론에서 출발해 거짓말 인정론을 거쳐 거짓말 당위론에 이르는 논리 전개까지 공감하는 건 아니다. 정작 나를 불편하게 하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모든 기관과 가치는 유연성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시스템은 자기지시적이다. 즉, 모든 시스템은 보편적 구속력을 지닌 기본 원칙을 더 이상 따르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의 논리를 따른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에서, 유럽에서, 세계 전역에서 나치즘을 뺨칠 억압체제가 발흥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럴 개연성이 매우 높다. 또 적어도 대여섯 번 나오는 “앞에서 언급한”은 한두 개 빼고는 우리말에선 불필요한 군말이다. 지적한 것이 가깝게 있거나 굳이 그런 토를 달지 않아도 지시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지난 대통령선거 직전 『100년 동안의 거짓말-식품과 약이 어떻게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가?』(랜덜 피츠제럴드 지음, 신현승 옮김, 시공사, 2007)를 읽었으니 다소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나는 어느 매체로부터 또 다른 거짓(말) 관련서와 함께 이 책의 서평을 청탁받았다.
나는 선거결과를 핑계로 서평을 쓰지 않았다. 그 매체에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허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은 거짓말 긍정론의 세련됨과 당당함에 질린 뒤끝이어서.
이 책은 가공식품, 처방약품(전문의약품), 처방이 필요 없는 약품(일반의약품)의 급증에 따른 독성물질의 상승작용을 다룬다. 이제 우리 사회에선 참말이 자취를 감췄다. 거짓말의 득세를 넘어 거짓말의 정당화와 합법화가 실현되었달지. 그래도 별 일은 없을 모양이다. 예전에 줄그은 대목 하나를 옮겨 적는다.
“그들의 발표를 보고 나는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일종의 문화로서, 우리가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지는 그릇된 통념 중 하나다. 이러한 상황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무조건 좋은 쪽으로 상황을 재정의한다. 그 결과 20세기 이전에는 인체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았던 수백 종에 달하는 잠재적인 독성 합성 화학물질을 보유하고 있어도 정상이며,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누가 그랬지. 10만년이면 우리 몸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발언을 더 긍정한다. 10만년이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거라는. 한글2007프로그램으로 작성한 이 글의 파일이름은 “거짓말 긍정론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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