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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오독의 우려가 높은 탈근대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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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인 경제 발전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의 사람들에게 『오래된 미래』는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의 감흥을 가져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말 저녁 또는 평일 심야에 간혹 TV 교양 채널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자주 만나는 프로그램이 바로 비문명권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입니다. 외지인의 발길이 닿기조차 힘든 오지에서 현대적인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아파트 거실에서 LED 평면 TV를 지켜보는 도시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흥을 남깁니다. 이제 티벳과 차마고도, 실크로드, 아마존, 폴리네시아 등지에 사는 원주민들은 어쩌면 도시민 스스로보다도 익숙하게 우리들의 인식에 자리잡고 있는 듯합니다.



 

TV가 아닌 책이라면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오래된 미래』입니다. 언어학자인 저자가 라다크 산맥의 원주민 마을에 머물며 보고 느낀 라다크의 삶을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책은 개발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회의 발전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미래를 짚어 냈다는 감탄사를 받으며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오래된 미래』가 서술하는 라다크의 삶은 미래에 대한 다른 차원의 이정표입니다. 서구식의 발전과는 다른 궤도에서 라다크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 줍니다. 자연을 인간에 맞게 변화시키고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서구의 방식이었다면, 라다크는 자연과 인간의 융화라는 새로운 접근법에서의 미래를 제시합니다.

라다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보편적 관점에서 볼 때 만족할 환경이 아닙니다. 높은 고산지대에 춥고 건조한 기후는 농업에 부적절한 환경이고, 그나마 고산지대에서 버티는 보리와 같은 작물을 제외한 채소류는 거의 전무합니다. 높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생존에 필수적인 물도 늘 부족한 상태이고, 내륙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은 어패류와 소금 등을 섭취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거대 도시와 문명들이 해안가나 강가에 위치해서 발달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라다크의 삶은 척박함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척박한 환경을 바라보는 스웨덴의 학자는 다른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고도화된 문명 속에서 살아온 저자의 눈에는 서구식 개발 모델이 미처 얻지 못했던 가치들을 라다크의 삶에서 발견합니다. 바로 자연과 융화되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입니다.

서구식의 발전은 파괴를 동반해 왔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자신의 신체를 보다 편안하게 하기 위한 물질적 풍요를 원해 왔고, 이 욕망을 맞추기 위해 인간은 생산의 양과 질을 늘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단순한 자연에서의 채집으로는 부족했기에 인간은 농경법을 개발해 잉여 식량을 축적했고, 보다 가볍고 따뜻한 의복을 위해 면화를 대량으로 재배했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아무리 생산량을 늘려도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져 갔고, 그 커져버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기계를 돌리고, 숲을 베어냈고, 석탄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서서히 파괴되었습니다.

커져가는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노동. 욕망과 노동의 이 변증법적 발전은 사실상 서구 사회의 발전에 내재된 가장 기본적인 동력입니다. 그런데, 라다크의 방식은 이 변증법의 해법을 새로운 곳에서 발견합니다. 바로 욕망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출처: www.bestladakh.com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컵이 하나 있는데, 이 컵을 채우기 위해 물을 부으면 어찌된 일인지 컵은 물을 부을수록 더 깊어지고 높아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문명은 ?욱 빠르게 물을 많이 부어 컵을 채우는 법을 선택했고, 라다크는 아예 컵 자체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법을 선택했다는 차이입니다.

그래서 라다크는 생산량을 키우기 위한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곡물과 자원이라면 그걸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의 의식과 생활양식을 조절합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지금 자신이 처한 지리적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서로 도와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합니다. 마을은 우리의 두레와 같은 양식을 통해 공동 농경을 시도하고, 구할 수 있는 식량 자원 이상의 축적이나 개량을 따로 시도하지 않습니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라다크의 구성원들은 구성원 서로가 나누고 보듬음을 통해 행복을 만드는 방식을 사회 양식으로 구성하면서 서구의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서구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행복의 척도 자체는 (이걸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고도로 발전한 서구 사회 구성원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라는 인식이 『오래된 미래』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러한 놀라움 덕에 1992년 처음 출간된 『오래된 미래』는 서구 사회의 자성과 각성 속에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녹색혁명, 에코이즘 등의 환경주의 영향과 함께 전 세계적인 근대 중심의 발전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오래된 미래』는 주요 추천 도서 목록과 스테디셀러 목록에 당당히 자리하면서 지금까지도 상당한 여파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단순하게 『오래된 미래』의 감상과 교훈을 받아들이기엔 또한 한국의 환경이 남다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90년대의 화두는 『오래된 미래』가 지적하는 바로 그 지점과 다르지 않았지만, 당장 세기가 바뀐 지금에 와서는 그 의미는 또 다른 형태로 읽히기도 합니다.

서구의 입장에서 충격과 새로움이었던 라다크인들의 생활양식은 과연 한국인에게도 동일한 작용을 보여 주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사뭇 다른 대답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반도에서 꽤 오랜 세월 동안 자연 친화라는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 속에 역사를 일궈 온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두레와 품앗이를 배우고,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산 속에서 자연 친화의 지혜를 배우며 ‘놀랍고 감탄할 만한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다만 우리보다 조금 더 척박한 환경이라는 차이를 가지는 라다크인의 삶은 본질 그 자체로만 본다면 서구에 던졌던 충격만큼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이 자명합니다.

출처: www.bestladakh.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구적 생활양식과 경제 환경 속에서 편안한 거실에 앉아 TV를 보며 그러한 오지의 생활양식을 보고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동경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삶이 이미 서구화된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타자화’입니다.

이미 우리 스스로 라다크인과 유사한 형태의 생활 양식이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고 또 지금도 그 영향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TV나 책 속의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습관에서 비롯됩니다. 『오래된 미래』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사실상 서구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라다크인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서구화된 문명인이고 라다크인은 그와 다른 길을 걷는다는 차이를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면서 우리는 자아를 서구인, 다시 말해 ‘어쨌거나 발전된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으로 재인식합니다. 모든 관계가 기본적으로 위치지음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 시각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봅시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등장하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의 소년소녀들은 과연 『오래된 미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결국 『오래된 미래』를 읽는 방식은 독자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여러 갈래를 탑니다. 서구적인 경제 발전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의 사람들에게 『오래된 미래』는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의 감흥을 가져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출처: www.bestladakh.com

근대 사회의 발전과 문명화에 대한 반성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는 근대 사회가 가진 불평등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건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 『오래된 미래』를 올바르게 읽는 핵심입니다. 당장 근대적인 경제 발전 체계는 지역과 계급에 따라 그 불평등의 격차가 심각합니다. 근대 사회의 수혜자들이 라다크의 삶을 동경할 때, 근대 사회의 맨 하부구조에 놓인 이들의 동경 지점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환경 파괴의 일등 공신이었던 화석연료의 대체를 위한 에탄올 에너지 사업은 후진국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데, 바로 세계 3대 곡물 중 하나인 옥수수가 그 연료의 원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밥이 될 수 있는 작물을 선진국에 사는 누군가의 쇼핑을 위한 자동차 연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환경 친화라는 구호 앞에 가려진 또 하나의 어둠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분명 근대 이후 서구 중심의 물질적 발전 체계가 가진 문제를 되짚고 대안을 제시하는 훌륭한 혜안입니다. 하지만, 그 혜안을 덥석 물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근대에 대한 광신과 마찬가지 수준의 탈근대에 대한 맹신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인류 역사와 산업의 발전을 놀라운 수준으로 이끌어 온 하나의 개념을 우리는 마냥 매도할 수도, 마냥 찬양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 근대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정작 근대 문명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위치하지도 않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오래된 미래』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읽기에는 우리 자신이 위치한 시선이 그리 적당하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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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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