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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당신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 가네시로 가즈키의 『GO』

스기하라의 선택은 명료하고 화끈하다.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프레임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왠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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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소이 코레아노, 니 소이 하포네스, 조 소이 데사라이가도.”
(나는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


얼마 전 중국 연변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4박 5일의 짧은 일정. 하지만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기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서 새로운 회로가 생성된 것만 같은, 낯설면서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연길 공항은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이질감과 동질감이 교차하는 묘한 감각은,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대형 플래카드에서부터 확연하게 느껴졌다. 시내 중심부로 들어서면서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마치 우리나라의 19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연변 시내의 풍경. 울긋불긋 낡고 촌스러운 디자인의 간판들에는 조선어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었다.

중국 연변 시내

얼핏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PC방이나 DVD 대여점 등 웬만한 최신 시설은 거의 갖추고 있었고, 거리에는 휴대폰이나 MP3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안내를 맡은 조선족 청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기분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조선어, 그러니까 북한식 언어를 알아들으려고 나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마치 외국어로 장시간 토론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 ‘우리말’이었지만, 동시에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이런 혼재된 감각은 체류 기간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일까.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떤 소설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있었다.

“하와이라…….”

그것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의 귀화. 아버지는 하와이에 가기 위해서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가 국적을 바꾼 진짜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지켜왔던 사회주의 신념을 버렸다. 그러나 아들에게 국적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아들의 이름은 스기하라. ‘재일조선인’이었던 스기하라는 국적을 바꾸면서 ‘재일 한국인’이 됐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영화 <GO>의 한 장면

조선 국적을 지닌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알고 보니 조선 국적을 지닌 재일조선인이었고, 철이 들 무렵부터 하와이를 타락한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배웠고, 표지에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트로츠키니 체 게바라니 하는 이름들이 적혀 있는 책에 에워싸여 자랐고, 또 알고 보니 학교는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민족학교, 즉 ‘조선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거기에서 미국이란 나라는 절대적인 적국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뭐 공산주의 사상에 푹 젖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조선도 마르크스주의도 조총련도 조선학교도 미국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에 순응하며 그저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뭐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 당연히 속이 뒤틀린 불량소년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 본문 중에서

스기하라는 지금까지 다니던 민족학교를 떠나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일본인 동급생들의 차별과 이지메. 그는 도전자들을 폭력으로 제압해버린다. 그래도 공허감과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는 외톨이였다.

소설 『GO』에서 묘사된 민족학교의 실제 모습을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인 <우리 학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의 모습, 두음의 ‘ㄹ’을 그대로 발음하는 구식 언어 표기법, 운동회날 교정에 펄럭이던 인공기,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여러모로 열악해 보이는 학습 환경 등.



영화 <우리 학교>의 한 장면

그러나 홋카이도 민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학생들의 생기발랄한 표정과 열성적이고 사명감에 넘치는 교사들의 모습은 사뭇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메인 카피는 이렇다.

“혹가이도 조선학교 아이들의 희망 다큐. 일본땅 조선 아이들의 용감한 등교가 시작된다!”

‘용감한 등교’라는 표현이 눈에 밟힌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당시는 남과 북이 갈라지기 이전의 ‘조선’이었다) 1세들은 일본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자비를 들여 책상과 의자를 사고 버려진 공장에 터를 잡아 조선학교, 즉 ‘우리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처음에 540여 곳이었던 학교는 일본 우익 세력의 탄압 속에 이제 80여 개만이 살아남아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남아 있는 학교 역시 재정난이 심각하다. 간이라도 빼줄 듯이 친절해 보이는 일본 사회와 일본 국민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일본 땅에서 ‘재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민족’이나 ‘정체성’ 같은 단어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힘겨운 투쟁과 눈물의 과정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영화 <우리 학교>의 한 장면

“남조선에서는 내면적인 것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되지만,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은 내면에서 지키고 있어도 외면에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점점 내면에도 침투해 가고, 결국 일본 사람하고 같이 되죠. 그러면 안 되니까 치마저고리도 입어야 하고 우리말도 지켜나가야 하죠.” - 민족학교 21기 고급부 3학년 조성래 인터뷰
- 영화 <우리 학교> 중에서

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은 피를 나눈 형제 같았다.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변함없는 얼굴 얼굴들이 최소한 고등학교까지 일관 교육을 받는다. 마치 긴긴 합숙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우리들 사이에는 우정 이상의 것이 싹튼다. 그리고 그렇게 싹튼 것을 성장시키는 것은 역시 ‘차별’이란 양분이었다.
- 본문 중에서

사실 『GO』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한일 합작영화도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에서 스기하라 역을 맡은 구보즈카 요스케는 부스스한 머리에 무심한 표정, 그리고 여섯 조각의 초콜릿 같은 섹시한 복근을 뽐내며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저자가 서두에 일찌감치 밝혀 두었듯이, 이것은 주인공의 연애를 다룬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한 스기하라는 ‘사쿠라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다. 유복한 집안에서 잘 자란 사쿠라이는 귀엽고 발랄한 소녀였다. 실제로 소설의 많은 부분이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둘은 종종 ‘멋있는 것 발굴해내기’를 하며 놀았다.

대실 하메트, 알랑 시리트, 잭 피니, 레이먼드 카버, <불꽃의 러너>, <태양은 가득히>, <해리의 재난>, <술과 장미의 나날>, <와일드 펀치>, 엘비스 코스테로, R.E.M.T 렉스, 대니 해더웨이, 크로노스 퀄텟, 그렉키, 테렌스 브랜차드, 에곤 실레, 와이에스, 터너, 리히텐슈타인……. 두 사람이 발굴해낸 ‘멋있는 것’의 목록이다.

영화 <GO>의 한 장면

그러나 평생 이어질 것 같았던 달콤한 연애는 뜻하지 않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내기로 한 날, 스기하라는 사쿠라이에게 자신이 ‘재일 한국인’임을 털어놓는다. 그는 내심 그녀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라고 말해주기를 바랐지만, 사쿠라이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경직된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아빠가, 한국이나 중국 남자하고 사귀면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랬었어……."
나는 그 말을 간신히 몸속으로 거둬들인 후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사쿠라이가 입을 다물어버려, 내가 말을 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한국이나 중국 사람한테 몹쓸 짓을 당했다든가, 그런 이유로?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몹쓸 짓을 한 건 내가 아니야. 독일 사람 모두가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사쿠라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빠는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피가 더럽다고 했어.”
- 본문 중에서

연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족 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이 슬레이트 지붕, 혹은 초가지붕을 얹은 20가구 안팎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울타리 안쪽에는 텃밭이 있고, 한쪽 그늘에서는 만사 귀찮아 보이는 표정의 소와 닭들이 느긋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 집 안으로 들어가니 마루와 부엌이 이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중국 연변 조선족 마을

무더운 날씨였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볼이 발그레한 인심 좋은 조선족 아주머니는 직접 동네 우물터까지 가서 찬물을 길어다주며 권했다. 아들과 딸은 모두 외지에 돈 벌러 나갔다고 한다. 조선족 마을을 몇 군데 더 들러보았지만 사정은 다 비슷했다. 마을에는 거의가 노인들뿐이고, 젊은이들은 모두 한국이나 기타 대도시로 떠나고 없었다. 버려진 빈집도 많았다.

연변 시내에서 만난 조선족 2세나 3세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라기보다는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국인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로도 연변에서 조선족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되어야만 소수민족 자치구로 인정을 받는데, 현재는 38% 정도라고. 재력을 쥐고 있는 집단 역시 한족들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뭔가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집어놓은 모래시계처럼 서서히, 서서히…….


“내 말해두는데, 나는 재일도 한국인도 몽골로이드도 아냐.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좁은 곳에다 처박지 마. 나는 나야. 아니, 난 내가 나라는 것이 싫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을 찾아서 어디든 갈 거야. 이 나라에 그런 게 없으면, 너희들이 바라는 바대로 이 나라를 떠날 것이고. 너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 너희들은 국가니 토지니 직함이니 인습이니 전통이니 문화니, 그런 것들에 평생을 얽매여 살다가 죽는 거야. 제길. 나는 처음부터 그런 것 갖고 있지 않으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 언제든 갈 수 있다구.”
- 본문 중에서

『GO』에서 스기하라의 선택은 명료하고 화끈하다.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프레임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왠지 쓸쓸하다. 그것은 강요된 힘에 의해 내몰린 자의 마지막 선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뿌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차별과 걸림돌이 무수히 널려 있는 곳이라면……. 무척 힘든 선택일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결국 그 나라에 동화되어 버리고 말 것을, 애써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나 역시 민족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심정적으로는 민족이니 핏줄이니 국적이니 하는 것을 벗어나 보헤미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점점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젠 아무도 살지 않는 조선족 마을의 빈집들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우리 학교>의 한 장면

그래서다. <우리 학교> 같은 다큐멘터리를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뿌리를 지켜나가려는 사람들. 마이너리티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엔 마지막 전사(戰士)의 안간힘 같은 눈물겨움이 있다. 문득 생각해본다. 나에게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뿌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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