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일은 외국에서 물건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 순간 손을 뻗지 않으면, 다음은 없어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삶을 선택한다면? 결론을 내기란 쉽지 않다. 현재 내가 가진 현실적인 조건들과 능력, 기질, 취향 등 많은 것을 고려하면 할수록 선택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진다. 아마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가진 것들이 많아질수록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질 테니까.
주변 사람들 가운데 인생의 방향을 전면 수정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들은 직장을 옮기거나 유학을 가거나 결혼을 함으로써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결과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 역시 덩달아 흥분이 되곤 한다. 그것은 부러움과 질투 따위를 포함한 다소 복잡 미묘한 감정인데, 다분히 즉흥적이면서도 동시에 우유부단한 내 자신의 모순된 기질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심리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당장 현실을 뒤바꿀만한 용기는 없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끊임없이 다른 세계에 속한 자신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소심한 인생. “어, 이게 아닌데.” “언젠가는…….”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정작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왜 늘 그렇게 주저하게 되는 걸까.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다시 꺼내 읽었다. 몇 년 전,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책이다. 당시 ‘자우림’의 보컬 출신인 김윤아가 출연해 매력적인 목소리로 낭독을 했었다. 그녀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운다고 했다. 아름답고 슬퍼서. 나 역시 가슴 속 깊은 곳이 짠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 그림 동화책은 제목처럼 ‘100만 년 동안 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다. 이 멋진 얼룩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다. 백만 명의 사람이 이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지만, 정작 고양이는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한때 그는 임금님의 고양이였고, 뱃사공의 고양이였고,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였으며, 홀로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였고, 어린 여자아이의 고양이였다. 그들은 모두 고양이를 사랑했지만 고양이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한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습니다.
도둑고양이였던 것이죠.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자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쨌든 고양이는 멋진 얼룩 고양이였으므로, 멋진 얼룩무늬 도둑고양이가 되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 최근에 본 TV 다큐멘터리에 이런 실험이 나왔다. 남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성(異性)의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는 방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사진을 고르게 하는 실험이었다. 사진들 중에는 자신의 사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조작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실험 대상자 전원이 자신의 얼굴을 골랐다.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 멋진 얼룩 고양이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것처럼.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독일판 로맨틱 코미디
<귀 없는 토끼>(Rabbit Without Ears/Keinohrhasen, 2007). 바람둥이 연예신문 기자 ‘루도’와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보육원 교사 ‘안나’의 좌충우돌 로맨스를 유쾌하게 다룬 이 작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네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어떤 남자도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스스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줘야 해. 집에 앉아서 좌절한 채 누가 널 행복하? 해주길 바라는 건 완전히 이기적인 거야. 불행한 게 당연하지. 매일 듣는 “인생은 멋져!” 같은 말을 난 믿지 않아. 왜 모든 사람들이 늘 행복하길 바라는 거야?”
이 영화의 제목은 묘한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루도는 재봉질을 잘못해서 귀가 없는 부활절 토끼를 만든다. 귀가 없으면 토끼가 아니라고 타박하는 안나와 귀엽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루도. 이후 안나는 루도를 ‘귀 없는 토끼’라고 부르고, 토끼 인형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주요 매개체로 등장한다. 여기서 귀 없는 토끼는 꼭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건 바로 늘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인 남자 주인공 루도에게 결핍되었던 중요한 한 가지기도 하다.
그런데 딱 한 마리, 고양이를 본 척도 하지 않는 새하얗고 예쁜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으로 다가가,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라고 말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그러니.”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했으니까요.
(중략)
“난 백만 번이나…….”
하고 말을 꺼냈다가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라고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으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 늘 붙어 있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하얀 고양이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많이 낳았고, 그 후 고양이는 “난, 백만 번이나…….”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이제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혼자인 게 좋아 나를 사랑했던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온 거야’라는 「아름다운 구속」의 가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이타심’이라기보다는 ‘자기애’의 범주가 넓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될 때 행복해진다.
『달과 6펜스』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흔 살의 성공한 증권 중개업자 스트릭랜드. 그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가정생활을 버리고 가난한 예술가의 길을 택한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쨌든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삼류 화가 이상은 되지 못할걸요. 그런데도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나요? 다른 분야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어요. 보통 수준만 되면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지요. 하지만 예술가는 다릅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불 보듯 빤한 사실을 말하는데 왜 바보라는 거죠?”
“나는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되지 않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창 앞의 릴리(1935, 장 뒤뷔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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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은 고갱을 모델로 이 소설을 썼지만,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앵포르멜 미술’의 선구자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포도주 상인으로 반평생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돌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나이 42세. 뒤뷔페의 곁에는 든든한 후원자이자 두 번째 아내인 릴리가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뒤뷔페는 릴리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마다 반쯤 감은 눈 때문에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모습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몇 년 전, 장 뒤뷔페 전시회에 갔다가 릴리 연작을 보면서 아주 강렬한 느낌을 받았었다. 짐작컨대, 두 사람은 아주 행복했을 것 같다.
다시, 백만 번 산 멋진 얼룩 고양이 얘기로 돌아와 보자. 고양이와 하얀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덧 다 자란 새끼 고양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하얀 고양이는 할머니가 되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 본문 중에서
마지막 장면은 슬프다. 목젖을 드러낸 채 엉엉 우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나면, 웬만해서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고양이의 절절한 고통이 전해져오는 듯한 느낌이랄까. 동시에 고양이의 행복했던 삶을 확인하게 된다. 고양이는 백만 년 동안 백만 번의 삶과 죽음을 경험했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낀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바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을 때. 나를 나 자신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봐야겠다. 결국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때론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그런 것. 어차피 인생에 기회비용이란 없다. 오직 후회하지 않는 나 자신이 있을 뿐이다.
지난 18년간 글쓰기가 가져다준 무궁무진한 즐거움으로 인해 득의양양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기쁨은 나의 아름다운 청춘 시절을 희생한 대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관련된 어떤 기억도 남지 않은 청춘의 시절을 말이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내가 ※아의(牙醫)로서 지냈던 많은 기억이 남았다는 것과 그것은 나의 청춘 그 자체였고, 나의 청춘은 수많은 사람들의 벌린 입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기쁜 일인지 우울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위화는 소설가가 되기 전 5년 동안 치과의사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