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 EBS <다큐 프라임> 「인도의 얼굴 2부 - 힌두의 눈물, 여성」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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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한 무리의 남성들이 요란하게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 옆에는 돈으로 엮은 화환을 목에 건 신랑이 서 있다. 집 안에서는 열여덟 어린 신부가 통곡을 하고 있다. 그녀를 둘러싼 나이 든 여자들이 우는 신부를 달래며 함께 눈물을 훔친다. 두 가지 상반되는 장면이 여러 번 교차되다가, 결국 신부는 꽃가마를 타고 온통 얼굴에 눈물범벅을 한 채 결혼식 날 처음 얼굴을 본 신랑을 따라 멀리 시댁으로 떠난다. 이것은 최근에 봤던 인도 관련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우리 돈으로 무려 2,500만 원이나 되는 막내딸의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큰 빚을 냈다는 신부 아버지는 평범한 농부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별 탈 없이 그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돈 잘 벌고, 잘 먹고, 그러다보면 행복해지겠죠.”
| EBS <다큐 프라임> 「인도의 얼굴 2부 - 힌두의 눈물, 여성」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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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간 어린 신부 다음에는 과부가 등장한다. 혼자서 막일을 하며 아이 다섯을 간신히 키우고 있다는 그 과부는 한숨을 쉬며 “차라리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읊조린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선배는 농담처럼 인도에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말했었다. 힌두교의 <마누 법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자는 어릴 때는 아버지의 지배하에 있어야 하고, 젊을 때는 남편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들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무려 1,700년 전에 제정됐던 이 케케묵은 법전이 오늘날까지 강력한 관습으로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삼종지도’를 연상시키는 차별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못 충격적이었다.
조혜란 교수의
『옛 소설에 빠지다』를 읽다가, 화면에서 봤던 인도 여성들의 슬픈 눈동자가 한참 어른거렸다. 그렇다고 이 책이 특별히 여성의 시선으로 묶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주제를 가진 흥미로운 열세 편의 고전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또 각각의 작품에는 ‘천천히 읽기’ ‘깊이 보기’ ‘넓게 읽기’ 등 저자의 주석이 달려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여러 고전작품 중에서도 흥행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춘, 나름대로 엄선된 소설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나에게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맨 마지막에 실린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 때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다. 오래 전에 학습 차원에서 ‘배웠던’ 소설을 이제 다시 만나니 느낌이 또 새로웠다. 그리고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 하층민 여성의 고달픈 삶이나 사대부 여성들의 숨 막히는 삶이나 팍팍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것 같다.
『시경』에 보면 열녀는 두 낭군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고, 우리나라 법전에 의하면 개가한 자의 자손은 벼슬자리에 임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과연 백성들에게 해당할 법인가! 그러나 우리 왕조가 들어선 지 400년이 되고, 백성들이 그런 교화에 젖어들어 여자들은 양반과 서민을 막론하고 너도나도 수절을 해대니, 수절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의 모든 과부들은 옛날에 말하던 소위 열녀라고 칭할 수 있겠다. 개가한다고 해서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히는 것도 아니건만, 시골의 어린 아낙에서 위항의 과부들까지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며 물불에 몸을 던지고 독약을 마시며 목을 매달아 죽어버리니, 이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조선 시대의
『열녀전』을 읽어보면, 그녀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살신성인의 초인들이다. 남편이 병이 들면 온갖 병수발을 다 하는데, 심지어는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피를 내어 먹이는 등의 고통도 감내한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으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 방법으로는 곡기를 끊거나, 박지원이 지적한 것처럼 ‘물불에 몸을 던지고 독약을 마시며 목을 매달아 죽어버리’는 등의 수단이 동원됐다. 예전에
『열녀전』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녀들이 하나같이 감정이나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처럼 의연하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모든
『열녀전』이 사대부 남자들에 의해 씌어졌기 때문이란 걸 알고,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열녀들도 사람일진대 왜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슬픈 감정이 없었을 것인가.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것마저 억압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그나마 박지원은 당대 양반들 가운데에서도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도 기본적으로는 열녀들의 행동을 칭송하고 있지만, 다만 사대부 가문이 아닌 위항의 과부들까지 죽음을 택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열녀함양박씨전」은 제목에서처럼 함양에 사는 과부 박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앞서 늙은 과부와 두 아들의 이야기가 부록처럼 들어가 있다. 과부의 두 아들은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제는 어떤 사람의 벼슬길을 막을 방도를 어머니 앞에서 의논한다. 그 어머니가 연유를 묻자, “그 선조 중 과부가 된 부인이 있었는데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품속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어 보여준다. 아무런 문양도 글자도 윤곽도 남아 있지 않은, 양면이 모두 편평한 동전. 이른바 ‘인고전(忍苦錢)’이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이것이 바로 네 어미가 죽음을 참아온 증거라고.
“과부라는 것은 외로운 인생이라, 슬프고 서러운 감정이 끊이지를 않는다. 또 혈기가 때에 따라 왕성하니, 과부라 하여 어찌 정욕이 없겠느냐. (중략) 그럴 때마다 나는 방안에 이 동전을 굴렸는데, 이 동그란 것이 한번 굴리면 어두운 방 안 어딘가에 굴러가더구나. 그것을 더듬어 온 방 안을 찾고, 또 굴려서 온 방 안을 찾는 것을 여섯 번 정도 반복하면 날이 새고는 했었지. 그렇게 굴리는 사이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었고, 또 10년을 그렇게 굴리고 나니 닷새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 번 굴릴 정도로 그 횟수가 줄어들었단다. 지금 나는 혈기가 이미 쇠해 이 동전을 굴릴 필요가 없다. 그래도 20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잘 싸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이 동전이 고맙기도 하고, 또 스스로 깨우치기 위함이다.”
말을 끝내고 어머니와 아들들이 서로 붙잡고 통곡하였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 함양의 과부 박씨는 아전의 딸로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병약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6개월 만에 남편을 잃는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의 3년상을 치르고 바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안의 현감을 지내던 박지원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글로 남긴 것이다. 박지원은 ‘그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오랫동안 평생을 홀로 살자 하니 친척들은 동정이나 할 것이고, 이웃 사람들은 오해나 하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열녀 박씨의 죽음은 짤막하게 기록되었을 뿐이지만, 22세의 한창 나이에 독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죽음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여인의 기질이 많으면 혹은 간사하고 혹은 연약하여 요사스러운 짓을 많이 하고, 여자가 남자의 기질이 많으면 혹은 사납고 혹은 잔인하여 과부가 되는 사람이 많아, 타고난 품수가 서로 뒤집히고 명수가 각각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이 가르침을 베풀어 그 기질을 바로잡고 그 성품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 이덕무,
『사소절』 제6권 「부녀자의 예절」 편 중에서
이것은
『사소절』이라는 책의 일부다. 조선 시대 사대부가 쓴 이 책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부터 5권까지는 남자의 예법을, 6권과 7권은 부녀자의 예절을 논하고 있다. 소위 ‘남자의 예법’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 꽤 나온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남자의 예법’이란 ‘인간의 예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녀자의 예절」 편에 이르면, 그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것들뿐이다.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물론 요즘 세상에 드러내놓고 남존여비를 외치는 사람은 없다. 여자에게만 정절을 강요한다거나 차별하는 일도 없고, 기본법상으로도 엄연히 남녀평등이 보장되어 있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눈에 보이는 차별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여기저기 언론사에 지원서를 내고 입사 시험을 보러 다닐 때의 일이다. 모 언론사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 여자 동료가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본인이 나서서 항의할 건가요?” 나와 함께 면접 보러 들어간 다른 두 남자 지원자에겐 묻지 않은 질문을 나에게만 한 것이다.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어떻게 해서든 그 회사에 합격하고 싶은 절박한 심리 상태에서,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유리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약간 비겁하게 절충적인 답변을 선택했고, 면접에서 낙방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질문 자체가 가진 차별성부터 지적했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이런 공식적인 에피소드 말고도, 일상에서 사소하게 오가는 말들 가운데에 이미 암묵적으로 차별을 전제하는 것들이 상당수 있다. 일일이 발끈하기 시작하면 피곤하기도 하고 별종 취급을 받을까봐 그냥 참고 넘어간다.
그러고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대대로 내려온 관념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늘 진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때론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서운 법이다. 무의식 속에 내면화된 구조적 편견은 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니까.
「열녀함양박씨전」이 어쩌면 오늘의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왠지 좀 씁쓸해진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 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 신영복,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