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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부조를 실천하라!

‘온화한 무정부주의자’크로포트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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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이다. 약전의 형식에 맞춰 그는 “온화한 무정부주의자”로 호명된다.

『희망의 근거』(채인택 옮김, 메디치미디어, 2009)를 엮은 사티시 쿠마르와 프레디 화이트필드는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20세기는 “인간사회들 내부의 전쟁들과 자연에 대한 전쟁의 세기였다.” 또한 “이 두 종류의 전쟁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돈과 언론과 군대의 힘이 두 종류의 전쟁을 수행하고 지속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20세기 내내, 그런 오만의 어리석음을 인식한 개인들이 있었다.” 쿠마르와 화이트필드는 ‘들어가는 글’에서 20세기 선각자들이 우리에게 기여한 바를 나열한다. 대체로 수긍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회정의와 지구정의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에는 물음표를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러한가?

사티시 쿠마르가 1973년부터 만들고 있는 생태?환경잡지 <리서전스(Resurgence)>에 연재된 선각자들의 약전(略傳) 가운데 100편을 추린 이 책의 20세기 선각자 인선은 무난하다. 20세기 선각자 100인의 약전을 ‘사회적 선각자들’ ‘생태학적 선각자들’ ‘영적 선각자들’로 나눠 싣고 있는데, 두 번째 마디에서 다소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이다. 약전의 형식에 맞춰 그는 “온화한 무정부주의자”로 호명된다. 그런데 내 눈길은 정통 무정부주의자에게 붙은 ‘온화한’이라는 수식어보다 역시 약전 형식에 맞춰 크로포트킨 편의 들머리를 장식한 그가 남긴 발언 셋 중 둘에 머문다. 지금이나 100년 전이나, 여기나 저기나!

“법은 사회에 유익하고 설령 법이 없더라도 지켜질 수 있는 관습들, 그리고 소수 지배층에게는 유리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해롭고 오직 공포에 의해서만 준수될 수 있는 관습들을 교묘하게 버무려놓은 혼합물이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주거 불가침,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의 권리는 그 누구도 그것들을 이용하여 특권 계급에 맞서지 않는 한 존중된다. 특권 계급에 맞서는 데 앞세워지는 날, 그 권리들은 전복된다.”

크로포트킨 편을 쓴 콜린 워드는 아나키스트 신문과 잡지 편집자로 일한 영국인이다. 워드는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과 비정부 사회에 대한 편듦은 러시아 소작인과 중앙아시아 부족사회 사람들을 직접 관찰하면서 생겨났다고 본다.

또 크로포트킨은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평등과 상호관계를 기초로 사회단체의 정교한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그 지역의 약탈자, 군주, 통치자의 대리인 등 위로부터 강요하는 정부가 늘 섬세하게 발달한 조화로움을 파괴한다고 믿었다.

워드는, 그가, “우리 일상의 질에 대한 본질적인 토론을 담은” 크로포트킨의 『벌판, 공장, 그리고 일터(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의 ‘실물’을 목격한 정황을 공개한다.

“이 책은 여전히 크로포트킨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번역되고 영향력 있는 책이다. 나는 그들의 작업장과 일터에서 기술을 가지고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며, 채소밭과 닭장, 그리고 수리하며 오래 쓰는 습관적 가정 철학을 통해 경비를 아끼는 여러 세대의 장인들의 선반에서 이 책을 보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여오는 농산물로는 거대 도시의 엄청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기에 대도시 후미진 곳의 자투리땅을 집중적으로 일궈야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자급자족을 강조한 것은 우리들 누구나가 두뇌노동과 육체노동을 병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워드는 학교 교육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생각을 인용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추상적으로 배운 것을 적용하길 원하는데, 교육자들은 멍청하게도 학생들이 배운 것을 실제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이 방면으로 얼마나 큰 도움을 찾아줄 수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 학교에서 모든 교육은 전쟁을 위해 우리를 훈련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열정을 철도를 놓고, 통나무집을 짓거나 정원이나 들판을 경작하는 데 썼어야 했다.”

『크로포트킨 자서전』(김유곤 옮김, 우물이있는집, 2003)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안데르센 자서전』과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으로 꼽힌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이런 손꼽힘에 값한다. 나는 『크로포트킨 자서전』을 읽으면서 어떤 장편소설보다 더한 재미와 감동을 받았다. 백문불여일독(百聞不如一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근위학교를 다니고, 장교로 임관해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며, 지리학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그의 생애가 극적으로 전개된다. 다음은 시베리아에서의 군 생활을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 벌인 ‘이중생활’을 묘사한 대목이다.

“나는 가끔 고급 저택이나 동궁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먼 교외에 있는 가난한 학생의 하숙집에 들러 좋은 옷을 벗고, 농민 부츠와 양가죽 옷을 입고는 길거리에서 농민들과 농담을 하며 빈민가의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에서 탈출하는 장면이다. 여러 사람의 도움에 힘입은 감옥 탈출은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한다.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신좌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프롤로그는 이를 간추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의 동료들이 인근의 마차란 마차는 몽땅 세를 낸 덕분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탈옥수를 실은 마차는 추격대를 따돌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먼저 이발소로 가서 탈옥수의 수염을 말끔히 밀어버리고, 저녁 무렵에는 비밀경찰이 꿈에도 의심 못 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겼다.”(『이타적 유전자』 10-11쪽)

“오랜, 아주 오랜 세월 뒤에도 탈옥수는 자신의 자유가 손목시계를 넣어준 여자와 바이올린을 연주한 여자, 마차를 몬 동료와 마차 뒤에 앉아 있던 의사, 그리고 마차가 도주하는 동안 길이 막히지 않게 도와준 여러 친구들의 용기 덕택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의 탈옥은 동지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다.”(『이타적 유전자』 11쪽)

이러한 기억은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의 도화선이 된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1888년 토머스 헉슬리가 발표한 ‘생존경쟁 선언’을 논박하는 성격이 짙다. 『상호부조론』은 크로포트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간주되나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있다. 우선, 매트 리들리는 “이 책은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실로 예언자적 저작”이라며 양가적 감정을 드러낸다.

내 나이 두세 살 무렵 출간된 고전 해설서는 『상호부조론』이 “다아윈主義에 반대해서 進化의 一要因으로서 相互扶助의 重要性을 풍부한 實例에 따라 確證하려 한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다윈주의 반대해서’라는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기계적 진화론과 속류 다윈주의를 문제 삼았다.

『상호부조론』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풍문은 뜬소문에 가깝다. 풍부한 실제 사례가 빡빡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흥미를 자아내는 내용들이 없잖다. 마빈 해리스가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보여준 것의 선행 작업인 측면마저 있다.

“다양한 종들, 특히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엄청나게 다투고 몰살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이나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한 동물들끼리는 그러한 싸움과 몰살에 상응할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서로를 부양하고 도와주며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성 역시 상호투쟁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이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2005)은 많은 동물학자와 박물학자의 관찰이 담긴 문헌을 토대로 한다. 더러 크로포트킨의 직접 관찰한 내용도 나온다. 예의 그의 글발은 번득인다. “이 사람(=쿨랑주)은 고문서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고문서를 해석했는데 이것이 그의 한계였다.”

이건 또 어떤가. “우리 시대에 이룬 산업의 진보는 모두가 주장하듯이 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투쟁 때문이라는 생각은 비가 내리는 원인을 모르면서 진흙으로 만든 우상 앞에서 제물로 바친 희생 덕분에 비가 내렸다고 여기는 꼴이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 제도로서 미개인의 촌락 공동체에 주목한다. “촌락 공동체는 공동의 혈통으로 간주되고 공동으로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는 가족들끼리의 연합이다.” 또한 “촌락 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는 낟가리 건초와 관련한 코카서스 오세트족의 제한된 마지막 규칙을 예로 들면서 과거의 공동체가 가졌던 권리는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가 인간 본성에 얼마나 반하는가를 재확인하게 한다고 단언한다(166쪽). 중세 자유 도시는 촌락 공동체를 발전적으로 이어받는다.

크로포트킨은 경쟁을 배격한다.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고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 그리고는 상호부조를 고무한다. “그러므로 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이것이야말로 각자 그리고 모두가 최대한의 안전을 확보하고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진보하는 데 제일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그는 우리의 노동 인생에 대한 억측에 대항한 사상가로서 계속해서 재발견되고 있다.”(콜린 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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