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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방화범으로 몰리다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머리를 통과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벽 두 시가 지나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고 한 자 한 자 타이핑을 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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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에 소개된 모든 서점은 직접 다녀온 실제로 존재하는 뉴욕의 서점입니다. 그러나 구성된 이야기는 픽션으로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칼럼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인상이 험악한 흑인 형사였다. 머리는 빡빡 밀어서 M&M 초콜릿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는 양쪽 팔을 걷어붙인 채로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다. 나는 ‘다른 나라에 와서 감옥에 갈 수 있겠구나.’ 하고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그러니까… 뉴욕의 서점을 취재해서 책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는 거야?”
“네.”
“명함이 있으면 보여줘 봐. 기자나, 무슨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거나….”

하마터면 북원더러(Book Wanderer) 명함을 꺼낼 뻔 했다. ‘책 방랑자’라는 조악한 프린트 명함을 꺼냈다가는 오해를 더 받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저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소설가입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네가 쓰고 있다는 소설도 『도서관을 태우다(Burning Libraries)』라며? 왜 세상이 불타 없어지면 세 가지 책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을 서점마다 하고 다니는 거야? 어제 신문 봤어? 브루클린과 퀸즈에서 두 개의 서점이 불탔어. 이번 달만 해도 총 다섯 건의 서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고. 아직 맨하탄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뭐 짐작 가는 건 없어?”

형사는 신문을 내 앞으로 던졌다. 두 곳 다, 내가 가본 적은 없는 서점이었다.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방화 여부도 조사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동양 여자… 뭐더라… 그레이스인가? 그 사람도 서점을 뒤지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는데, 한패 맞지? ‘북원더러’라는 사이비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던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심각하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가 30년 뒤의 미래에서 책을 구하러 온 여자라고 말한다면 나를 어떻게 볼까?

“동양 여자가 아니라 한국 여자인데요. 저도 한국 사람이구요.”
“뭐,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잖아.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구별할 수가 없어. 그런데 뉴욕에 당신을 보증할 만한 사람은 있는 거야?”

방에 처박혀 글만 쓰는 나에게 아는 사람이란 1층의 집주인 로렌스뿐이다. 내가 경찰서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장 방을 빼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한 달치 방값도 밀려 있다. 나는 그때, 로버트가 생각났다. 언제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던 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것이다.

연극인들의 오아시스
드라마 북샵(The Drama Book Shop)


수많은 뮤지컬과 연극이 연일 올라오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서점이 한쪽에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정신없이 번쩍거리며 뮤지컬을 홍보하는 40번가를 지나다가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이곳은 1920년부터 무대 예술과 영화 관계인들의 도서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곳에는 연극 대본, 뮤지컬 악보, 무대 예술에 관련된 모든 책들과, 영화, 무용, 텔레비전에 관련된 책들이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빽빽이 차 있다. 불행히도 이곳에 없는 대본은 뉴욕의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북샵 내부

서점 이벤트도 많이 이루어지는데 주로 연극 대본, 리뷰의 리딩이나 가끔씩 새로운 뮤지컬의 노래 연주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2층에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서 책을 마음대로 읽어볼 수 있다.

로버트가 서점에 올 때까지는 반 시간 정도 남았다. 전날 경찰서에서 신세를 져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나는 몸이 끝도 없이 가라 앉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대본 하나를 꺼내어 읽었다. 맥퍼슨 코너(McPherson Conor)의 『Port Authority』라는 희곡집이었다. 사실,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면 무대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말하고 뛰고, 노래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머리가 아플 때가 많았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데도 한 번도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이렇게 책으로 인물간의 대화를 읽으며 장면을 상상?는 것이 훨씬 편하다.

The Drama Book Shop
250 W. 40th St.
www.dramabookshop.com

형사는 나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로버트와 삼십 분 정도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취조실로 들어왔다.

“앞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상한 낌새가 또 있으면 미국에서 영원히 추방일 수도 있으니까.”

로버트는 나를 자신의 도서관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고 했다. 경찰관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게 뚜렷이 혐의가 없으므로 잡아둘 근거도 없었다. 다만, 계속해서 뉴욕 서점에 불이 난다면 나도, 로버트도 요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드라마 북샵이라… 참 오랜만에 들러보는군요.”

맞은편 의자에 로버트가 앉으면서 말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 뮤지컬을 방금 보고 왔습니다. 함께 가도 좋았을 텐데요.”
“아, 저는 뮤지컬을 보면 머리가 아파서요.”
“청춘남녀가 보면 훨씬 좋을 법했습니다. 설마 어제 일로 주눅 들지는 않았겠지요? 어차피 그레이스의 지도도 손에 넣었다고 하니 원고의 흔적은 잘 찾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점을 나와서 40번가 동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저녁 식사 하기엔 약간 이르니까 근처에 다른 서점 들러도 좋겠죠?”
“물론입니다.”
“지도에는 표시가 안 되어 있는 서점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2층에 있어 왠지 들어가기 힘들었던 만화 전문서점, 미드타운 코믹스로 발길을 옮겼다.

미국 만화책의 요람
미드타운 코믹스(Midtown Comics)


최근 미국 만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만화책 시장의 성장 때문이라기보다는 영화에서 DC코믹사와 마블사의 원작을 이용한 히어로물의 리메이크 때문이다. ‘슈퍼맨’이나 ‘배트맨’ 등의 슈퍼 히어로가 최근 들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더 영화에서 이런 ‘맨’들이 활용되고 <저스티스 리그>처럼 ‘맨’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영화도 나올 예정이다. 주류시장에서 멀어진 미국 만화에 드디어 빛이 비추는 것일까? 그러나 그만큼 출판 만화의 시장도 활황인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만화책은 영화나 게임 등의 대규모 자본적인 매체의 소스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만화책을 열렬히 구독하는 마니아들이 미국에도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미드타운 코믹스는 만화책의 성지다.

다양한 만화책들

미국 만화의 황금기는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기, TV와 영화 이전의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미국 코믹북의 슈퍼스타는 단연 『슈퍼맨Superman』이었다. 이후 70년대 마블 코믹스의 등장으로 『판타스틱 포Fantastic Four』『스파이더 맨Spider-man』 등이 탄생되었고 80년대에는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Batman』이나 앨런 무어의 『와치맨Watchmen』 등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슈퍼 히어로물과는 달리 로버트 크럼을 위시한 언더그라운드 만화와 예술에 가까운 대안 만화 등도 틈새시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미국 만화는 현재 어디까지나 메이저 출판시장에서는 벗어나 인터넷이나 특별한 서점을 통해 유통되는 처지다. 미국 특유의 48~72페이지, 3달러 내외의 중철 칼라 팸플릿 형식의 만화 시리즈는 웬만한 컬렉터가 아니고서는 모으는 사람이 드물고, 그것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도 드물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미국 만화책뿐만 아니라 일본의 망가와 유럽에서 발행된 만화책을 통틀어서 뉴욕의 미드타운 코믹에서 볼 수 있다.

슈퍼맨이 최초로 나타난 만화 ⓒ DC Comics

뉴욕 타임스퀘어와 그랜드센트럴 부근에 두 개의 미드타운 코믹스가 있다. 둘 다 2층에 창문에 붙여진 배트맨, 슈퍼맨 그림 때문에 캐릭터 기념품샵으로 오해하기 쉽다. 로버트와 나는 약간 위험하게 보이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문을 여니 미국형 ‘오타쿠’들(99%가 남자다)이 득실거리며 만화책을 수집하는 광경이 보였다.

점원들이 머리가 지나치게 긴 헤비메탈 스타일이었지만 다들 친절하게(약간 어색했지만) 대해 주었다. 2층에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단행본과 진(Zine)이 있고, 3층에는 피규어와 DVD, 성인 만화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만화는 『배트맨』『헐크』『아이언맨』『헬보이』『스파이더 맨』『엑스맨』『울버린』『슈퍼맨』『스피드레이서』『인디아나 존스』『원티드』『버피 뱀파이어 슬레이어』 등의 영화나 TV를 통해 소개되었던 것들이고, 역으로 TV시리즈였던 『히어로즈Heroes』의 만화판도 눈에 띄었다. 요즘 각광받는 일본 망가 코너도 사람들이 무척 붐볐다. 좀비나 뱀파이어를 다룬 공포물이나 스릴러 탐정물도 많이 보였다. 로버트는 얇은 만화책 한 권을 사고 나는 가게를 둘러본 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Midtown Comics
Times Square, 200 W. 40th St.
Grand Central, 459 Lexington Avenue
www.midtowncomics.com

우리는 미드타운 코믹스 렉싱턴 애비뉴 점을 빠져 나와 그 옆의 작은 주먹밥 가게로 갔다. Omisbi라는 이곳은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하고 맛깔스런 주먹밥, 삼각김밥을 판다. 가격이 저렴해서 내 주머니 사정으로도 로버트를 대접할 수 있는 곳이다. 로버트는 스시라면 먹어봤지만 주먹밥은 처음 먹어본다며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손으로 집어서 그냥 먹으면 된다는데도 먼저 먹어보라고 했다.

omisbi의 맛있는 주먹밥

“어릴 때 『스파이더 맨Spider-Man』 정도는 몇 권 모은 것 같은데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버트는 미드타운 코믹북에서 산 『어매이징 스파이더 맨Amazing Spider-Man』 시리즈를 넘기면서 말했다. 나는 『보물섬』 같은 만화 잡지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엔 만화 잡지를 즐겨보고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일본 만화를 많이 봤다. 유치하고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내 소설이 얼마쯤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아무 힌트도 없던 때보다는 낫지만 한 챕터도 완성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해주었다.

“혹시 말입니다. 경찰의 말대로 누군가가 서점을 태우고 있다면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원고가 숨어 있는 서점이 불에 탈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라면 그레이스가 찍어둔 서점은 찾아가 볼 수 있어도 제 원고를 찾는 건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힘듭니다. 주인장이 아껴둔 책 세권에 항상 원고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구요.”

나는 갈비가 얹혀진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그건 그렇지요 … 하지만 전 항상 궁금합니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저처럼 미래에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실패하고 수년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당신이 묻는 질문은 어쩌면 오랫동안 기억해둔 비밀 코드일지도 모르지요.”

나는 자이언트 로봇(☞ 보러 가기)에서 점원이 추천하는 포스터에서 원고 일부를 찾아낸 걸 떠올렸다.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 안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로버트는 삼각김밥을 나이프로 깨끗하게 냈다. 그 속에는 붉은 명란젓이 들어 있었다.

10년 전 모습 그대로, 10년 후에도 그대로
스카이라인 북스(Skyline Books)



웨스트 빌리지의 이 작은 중고 서점은 어쩌면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 임대료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중고서점이라고 해도 깔끔한 정리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공상과학이나 스릴러 소설의 60~70년대 페이퍼백이 입구에서 눈길을 끌고, 예술 및 사진 관련, 유머와 문학, 정치와 역사책까지 먼지가 가득 쌓인 중고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어떤 책을 찾기 위해서 온다면 실망하겠지만 우연히 신기한 책을 찾는다면 기쁠 수도 있겠다. 나는 구입 예정이었던 마이클 쉐이본Michael Chabon의 『Advanture of Kavalier & Clay』를 단돈 4달러에 구입했다. 책은 헌 것이라도 내용은 똑같기 때문에 이런 횡재는 당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스카이라인 북스 점원 애비 후버

이곳에서 일하는 애비 후버 양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도 있지만, 갤러리 주인이나 아트디렉터, 뮤직비디오 감독 등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이 찾는 것은 시대를 거슬러간 책이나 예술서적, 그리고 영감을 받을 만한 것들이다. 특히, 예술과 사진,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책이 많아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다.

그녀는 계산대 뒤의 진열장에 있는 희귀 도서를 꺼내 보였다.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초판이 7,500달러, 『찰리와 초콜릿 공장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초판이 4,000달러, 35센트 하던 『펄프 픽션Pulp Fiction』이 900달러라며 은근히 자랑을 한다.

만약 이 근처에 산다면 출퇴근을 할 때나, 산책을 할 때 반드시 한번은 들를 것 같다. 정확한 카탈로그도 없고, 언제 무슨 책이 들어올지 모르는 이곳에서 보물찾기 놀이는 ?미로울 테니까.

Skyline Books
13 W. 18th St.
www.skylinebooks.com/

“저기요. 혹시 세상의 모든 책이 불타버리면 구하고 싶은 세 가지 책이 있는가요?”

이곳은 그레이스가 표시해둔 서점이다.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다.

여자는 얼굴이 굳어버리지만 곧 더듬더듬 제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가의 맨 안쪽 구석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찾으면 금방 나올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애비 후버 양이 구하고 싶은 세 가지 책
Frank Herbert
『Dune』
Henry David Thoreau
『Walden Pond』
Jack Kerouac
『On the Road』

거실엔 온통 그레이스가 가져온(혹은 훔쳐온) 책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나는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다. 스카이라인 북스에서 추천한 잭 캐루악의 『온 더 로드On the Road』의 중간 페이지에서 나온 메모지를 손에 쥐고 말이다. 오늘도 하루 종일 서점을 돌아다녔다. 나는 더 이상 그레이스도, 그녀의 쌍둥이 동생도, 로버트도 믿지 못한다. 그들은 나에게 뭔가를 조금씩 숨기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하기가 무척 어려운가 보다.

쪽지를 다시 읽어본다.

당신이 쓴 소설 때문에 이 모든 책들이 불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 봐요. - 그레이스

이건 경고일까, 바람일까, 단순한 독백일까? 이 말을 입 속에서 계속 중얼거려본다.

그걸 서른 번을 했을까, 마흔 번을 했을까?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머리를 통과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벽 두 시가 지나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고 한 자 한 자 타이핑을 치기 시작한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천천히 걷다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는 것처럼 빨라진다. 이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타이핑 시험을 치는 것 같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데도, 그렇게 써지지 않았던 소설이 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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