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배를 곯으면 당신은 행복할 수 없다
장 지글러의 ‘양심선언’
『탐욕의 시대』는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 추구 권리를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러한 장애 요소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집단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예고편이었다.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08)는 본편이다. 본편과 예고편의 다른 점은?
예고편이 “젊은 세대들에게, 다시 말해 풍요의 시대에 풍요로운 곳에서 태어나 기아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기아의 문제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책이라면, 『탐욕의 시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아라는 현상의 역사적인 배경과 저변을 속속들이 파헤치면서 문제의 근원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옮긴이의 말’)
2000년부터 2008년 4월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한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Jean Ziegler, 1934- )는 『탐욕의 시대』에서 좀 세게 나간다. “현재 모든 병폐는 극한점에 도달했으므로 더 이상 나빠질 것이라고는 없다. 대대적인 현상 전복을 통해서 개선될 일만 남았다”는 그라쿠스 바뵈프(1760-1797)의 연설을 인용하면서 그는 『탐욕의 시대』가 지닌 실질적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전복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의식을 무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의도적인 ‘의식화 서적’이 벤저민 프랭클린을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관행에서 다소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프랭클린한테는 장 지글러가 맡긴 확실한 임무가 있다.
신생 독립국 미합중국의 초대 프랑스 주재 대사로 부임한 프랭클린은, 어느 날 저녁 당시 파리 생제르망 구역에 자리한 젊은 혁명가들의 모임 장소로 각광받은 프로코프 카페에서 약관 스무 살의 변호사 조르주 당통의 도발적인 언사에 직면한다.
“이 세상은 온통 불의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징벌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들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서에는, 그 같은 선언이 제대로 지켜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법적, 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건 잘못 생각한 겁니다. 우리의 선언서 뒤에는 막강하고 영원한 권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의 권력(the power of shame)이죠.” 프랭클린이 말한 ‘수치심의 권력’은 이 책의 실마리다. 이 책의 원제목(L’empire De La Honte)은 ‘수치의 제국’이다.
“수치심은 도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다.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상처를 받거나 배가 고프거나 궁핍함으로 인한 모욕감 때문에 심신이 괴롭다면, 나는 고통을 느낀다.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 가해진 고통을 바라볼 때도 나는 나의 의식 속에서 얼마간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내 안에 연민의 감정이 생겨나고, 도와주고 싶은 연대감이 발동하며,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렇게 되면 내 안에서는 행동하라는 부추김이 일어나게 된다.”
『탐욕의 시대』는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 추구 권리를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러한 장애 요소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집단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공분을 자아낸다. 한편으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장 지글러가 책머리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제시하는 프랑스 대혁명기의 상황은, 20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하며, 따라서 엄청난 시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어 마침내 ‘다시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옮긴이의 말’)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이상주의자(utopiste)’들의 좌절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들의 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고귀한 혁명정신은 살아 숨 쉰다. 뻘떡거리며 용솟음친다.
“민중들이여, 그대들은 야만적인 구시대적 제도들을 모두 전복하라!”(바뵈프)
“지금까지 법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게는 혹독했다. 부자들에 의해 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자크 루)
“자유란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루이 드 생쥐스트)
“여론이라는 것은 무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무지는 극단적인 독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장-폴 마라)
이에 비하면 칸트의 발언은 비슷한 내용을 담았어도 “훨씬 시정이 넘”칠 뿐더러 나긋나긋하기까지 하다. “독립성과 평등이,/자연의 아들이자 타고난 순수한 본성으로 말미암아/덕목과 자유를 지향하는/인간을 지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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