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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햇빛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 - 알베르 카뮈의 「아이러니」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처럼. 어느 날 촉망받던 천재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모든 의문과 모순투성이의 삶을 우리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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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아가잖아.”

-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1. 홀로 남겨진 노인
저녁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영화관에 갈 채비를 하고 있다. 한 노인만 빼고. 그녀는 반신불수로 거동이 불편하다.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활달한 성품이었던 그녀는 이제 방구석에 틀어박혀 무위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외출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왁자지껄 떠나가자 이윽고 노인은 빈집에 홀로 남겨진다. 두려움과 고독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2.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떠들썩한 어느 술집. 젊은이들 앞에서 한 노인이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다. 청년들의 얼굴에는 지루한 빛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서 노인은 더 필사적이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혼자 남게 된 노인이 터벅터벅 귀갓길에 오른다. 집에서는 그의 늙은 아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다 지쳐 먼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다.

#3.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매를 길렀다. 이제는 손자들까지 제법 대가족을 이루게 된 집에서 그녀는 늘 여왕처럼 당당하고 때론 뻔뻔하게 군림해왔다. 그런데 수시로 엄살과 꾀병, 과장된 연기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부각시키던 할머니가 어느 날 진짜로 숨을 거둔다. 손자는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전혀 슬프지 않았는데도.

여기 코트 깃을 세운 채 담배를 살짝 비껴 물고 있는 남자의 흑백사진이 있다. 우수에 찬 깊은 눈빛과 창백한 피부, 샤프한 얼굴은 어쩐지 젊은 시절의 제임스 딘을 연상시킨다. 알베르 카뮈. 「아이러니」는 그가 22세 때 처녀 출판한 에세이집 『안과 겉』에 수록된 작품이다. 알제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카뮈는 두 살 때 아버지가 전사하면서 쭉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어쩌면 그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결핍의 분위기는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회상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 그 아름다운 햇볕 덕분에 자신은 원한이란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있었다고. 빈곤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종의 즐거움과 자유를 느끼고 있었노라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재판을 내기 위하여 『안과 겉』을 다시 읽어보노라니, 어떤 페이지들 앞에서는 그 서투른 솜씨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 즉, 그 노파, 말없는 어머니, 가난, 이탈리아의 올리브 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빛, 고독하지만 충만한 사랑, 내 눈으로 볼 때 진실을 증언해주고 있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 말이다.
- 서문 중에서

「아이러니」에는 세 명의 노인이 등장한다. 객관적 시점 속에서 타자화된 그들은 서로 다른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별개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닮아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병든 노파의 딸은 불 꺼진 창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닌 혼자 계실 때면 늘 불을 끄세요. 어둠 속에 있기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어둠 속에는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노인이 있을 뿐이다. 젊은이들을 향해 자신의 모험담을 떠들썩하게 늘어놓고 있는 두 번째 에피소드 속 노인은 또 어떠한가. 지독한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다. 거짓과 과장으로 행복을 가장하면서.

하기는 갈 데도 없다. 영영 늙어버린 그였다. 사람들은 미래의 노년 위에다 인생을 쌓아 올린다. 이렇게 돌이킬 길 없는 상태에 몰려 있는 그 노년기에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부여하고자 하지만, 그 한가로움으로 노인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만다.
- 본문 중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노인은 “사랑이란 요구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엄격하고 가차 없는 태도로 일관하며 살아온 그 유별난 노인은 바로 카뮈의 할머니였다. 장례식 날, 소년 카뮈는 남들처럼 눈물을 흘렸지만, ‘울면서도 고인 앞에서 솔직하지 않은 가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유난히 햇살이 아름다운 어느 초겨울의 풍경이었다.

아주 짤막한 이야기들인데 읽다 보면 작가가 말하려는 바가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기분이 든다. 삶과 죽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에 숨겨진 실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의 진실. 이와 관련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사랑의 추억(Sous Le Sable)>(2000).

영화 <사랑의 추억>(2000)

중년 부부인 ‘장’과 ‘마리’는 한적한 해변으로 여름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마리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동안 잠시 수영을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뜬 남편 장이 사라진다. 갑작스런 남편의 실종. 구조대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수색을 벌여봤지만, 남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 홀로 남겨진 마리는 여전히 남편이 곁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이 쓰던 서재에는 여기저기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의자에는 막 벗어놓은 것처럼 웃옷이 걸쳐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 만 만년필이 그대로 놓여 있다. 재떨이에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집안에서 마리는 계속 남편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교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경찰로부터 남편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버나드의 말처럼, 시간은 방울져 떨어진다. 영혼의 지붕 위에 맺혀있던 시간의 방울들이 떨어진다. 내 마음에 맺힌 시간의 방울들도 떨어진다. 지난주에 면도하려고 서 있을 때에도 떨어지고 있었다. 손에 면도날을 쥐고 선 채로 난 갑자기 깨달았다. 이건 단지 습관적인 행동이라는 걸. 방울이 맺히게 하는 거란 걸. 그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쁘게 면도를 계속 했다. “면도하자. 면도하자. 면도하자.” 하면서 면도를 계속했다.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 버지니아 울프, 『파도』 중에서(영화 장면에서 재인용)

이 영화의 매력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익숙한 관성을 거부하며 이야기는 계속 잔잔한 가운데 파격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남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마리가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발견하는 장면이 그렇다. 계약을 결정한 그녀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다. 창밖에는 묘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도 예사롭지가 않다. 남편이 사라진 바닷가에서 오열하던 마리의 흐릿한 시선에 문득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남편과 흡사한 모습. 갑자기 마리는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간다. 저 멀리 보이는 남자와 점점 작아지는 마리의 뒷모습이 롱테이크로 펼쳐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남자를 스쳐 지나 계속 달려간다.

이 영화는 나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공간에 와 있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와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 같은, 뭐 그런 식의 이상한 기분이랄까. 뭔가 석연치 않고 모호한 느낌. 「아이러니」를 읽고 났을 때의 느낌도 비슷했다. 꼭 이 영화의 뒷맛처럼 복잡하고 난해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런 느낌을 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함께 들었다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1913 ~ 1960)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이 명확하게 정리됐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한 부분이, 때로는 여러 군데가 헝클어지고 뒤죽박죽 뭉쳐 있는 상태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고 그렇게 저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나이를 먹어 버렸다. 동시에 나는 늘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 삶의 구석구석에 대강 뭉쳐서 쑤셔 놓은 양말처럼 미뤄두고 있던 수많은 계획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그런 막연한 느낌만으로 벌써 10여 년이 흘러가 버렸다. 여전히 내 인생은 풀리지 않은 숙제와 수많은 고민과 지연되고 있는 다종다양한 계획들로 가득 차있다. 문득 두려워진다. 이 상태가 영원히 정리되지 않은 채,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되는 건 아닐까? 과연 모든 미해결 과제들이 흡족하게 정리되는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카뮈는 노벨상을 수상하고 오랫동안 기획해왔던 대작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면서 한창 세간의 기대를 모으던 어느 날,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향년 47세. 갑자기 궁금해진다. 삶에 대한 그의 열정, 그동안 작품에 쏟아왔던 엄청난 에너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수많은 계획들은 그 순간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카뮈가 22세의 나이에 이 글을 썼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모두 노인들이 아닌가. 젊은 나이에 인생의 진실, 세상의 이면을 모두 알아버린 카뮈야말로 가장 아이러니한 사람이 아닐까.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처럼. 어느 날 촉망받던 천재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모든 의문과 모순투성이의 삶을 우리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치를 따져봐야 해답 따위는 결코 나오지 않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니까. 그런 게 인생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묘한 느낌이 든다. 왠지 슬프지만, 완전히 비극적이지만도 않은, 그렇지만 딱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느낌. 끝까지 아이러니하다고나 할까. 카뮈는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고 썼다. 이 책의 타이틀처럼, 우리들 삶의 안과 겉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그 아찔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뭐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왠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기막힌 진실. 영화 구경을 가느라고 내버려둔 여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어진 노인, 아무런 속죄도 되지 못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이 세상 가득한 저 모든 빛.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운명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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