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에 소개된 모든 서점은 직접 다녀온 실제로 존재하는 뉴욕의 서점입니다. 그러나 구성된 이야기는 픽션으로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칼럼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로버트는 뉴욕 도서관의 중앙 열람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잠깐만요, 저를 어떻게 찾으시려구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그에게 물었다.
“아, 너무 흥분해서…… 그걸 물어보지 않았군요. 음, 무슨 책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The Savage Detectives』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그럼.”
나는 뭐가 좋은 선택이고 나를 책으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그 책을 읽고 있는 검은 머리 동양인은 찾기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휴대폰이 있으니까, 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보더스 서점(보러 가기)을 빠져 나왔다.
절망에 빠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안식처
<뉴욕 공립 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
처음에는 미술관 혹은 박물관인지 알았다. 우뚝 솟은 기둥과 화려한 외부 장식, 우람한 사자 두 마리가 계단 앞에 서 있어서 매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비슷한 건물이 아닌가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생긴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뉴욕 도서관 본관이다. 보더스 서점이 있는 콜럼버스 서클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 중간에 타임 스퀘어를 지나갔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되도록이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피해보지만 관광객들의 물결은 어쩔 수가 없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전광판을 지나 푸른 나무가 보이는 브라이언트 공원을 보자 속이 뻥 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공원 바로 뒤에 뉴욕 도서관이 있다.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안이 강화되어 가방 검사를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2007년에는 폭발물이 들어 있는 가방 때문에 대피하는 소동도 겪었지만 그 안에는 헌 옷가지뿐이었다고 한다.
| 타임 스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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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도서관은 국가에서 만든 도서관이 아니다. 틸든(Samuel J Tilden), 아스토(John Jacob Astor), 레녹스(James Lenox) 등 뉴욕의 재력 있는 정치가와 사업가의 기부로 뉴욕 시민들을 위해서 일찌감치 만든 도서관이 그 원형이다. 그리고 여기에 철강 부자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전적인 지원이 더해져 1911년 문을 열게 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기부와 뉴욕시와의 협력으로 뉴욕은 4개의 연구 도서관과 80여 곳의 지역 분점을 가지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종종 빨간 깃발의 도서관 분점을 볼 수 있다. 누구나 그곳에서 무료로 책을 빌리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이곳은 이제 인문·사회과학 연구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연구자들에게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은 뉴욕 시민들에게 상징적인 곳이다. 센트럴 파크와 마찬가지로 무료로 누구나 평등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정부가 아니라 뉴욕 시민의 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불어온 대공황의 힘든 시기에 위로를 준 곳도 이곳이다. 한 세기 동안 절망에 빠진 그 누구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올랐을 법한 계단을 올라 중앙 열람실로 간다.
| 뉴욕 도서관 중앙 열람실 내부 ⓒ Dill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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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열람실에 와 본다면 누구나 독서에 대한 경외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가로 100미터, 세로 24미터, 그리고 무엇보다 높이 16미터의 탁 트인 열람실에 들어오면 책을 읽기보다는 그 화려한 외관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다. 떿화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이곳은(재난 영화
<투모로우>에서 사람들이 이 도서관에 대피하고 책들을 태우며 추위를 이겨낸다.) 클래시컬한 나무 책상과 편안한 의자, 청동 램프가 줄을 맞춰서 놓여져 있다. 하늘 그림과 정교한 장식으로 꾸며진 천장에서는 샹들리에가 내려오고 거대한 창문의 내부를 밝혀주고 있다. 열람실 외곽에는 참고 도서들이 꽂혀 있지만 이곳의 압도적인 광경은 책이 아니라 뻥 뚫린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몇 블럭 떨어진 타임 스퀘어에서 사진을 연신 찍어대던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 탁 트인 공간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 영화 <투모로우>에서 얼어붙은 중앙열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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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쓰는 사람, 그 옆에는 토플 책을 읽는 한국 유학생이 보였다. 로버트 볼랴뇨의
『The Savage Detectives』를 꺼내서 읽었다. 작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마르케스 이후로 남미 문학의 붐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일부러 책 표지가 보이도록 책을 덮었다가, 열었다가를 반복했다. 약속 시간은 10분을 넘겼다. 좀 있으면 도서관을 닫는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잠이 오는 것일까? 나는 책을 보기 쉽게 덮어 놓고 잠시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나 잠시 뒤 경비원이 다가와 살짝 내 어깨를 찔렀다.
“여기서 자면 안돼요.”
“아, 네……. 죄송합니다.”
두 팔을 삼각대처럼 지지한 채로 턱을 괴었다. 잠이 오는 수업을 들을 때 쓰던 방법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척을 했다. 다행히 경비원은 깨우러 오지 않는다. 대신 머릿속이 점점 어두워지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서서히 흡수되었다.
도서관이 타고 있다. 책보다 더 좋은 땔감이 어디 있을까? 닿자마자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벌겋게 책이 탄다. 불타는 책은 다음 책으로 옮겨 붙고, 책장 하나를 순식간에 삼켜 버린다. 책등의 스티커에 붙어 있는 800 분류기호를 보니 문학 서가다. 우주복 같이 번쩍거리는 화염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어깨에는 무거워 보이는 산소통을 짊어지고, 양손은 불을 내뿜는 화염방사기를 쥐고 있다. 불이 제대로 붙지 않은 서가는 사정없이 화염방사기로 태워 버린다. 화재 경보음이 울리고,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지만 불은 꺼지지 않는다. 오히려 쏟아지는 물이 기름이라도 되는지 활활, 타오르고 있다.
- 서진 『도서관을 태우다』 p.35
주위는 어두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깨어난 곳은 도서관이 아니다.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다. 대여섯 평 되는 공간에 내가 깨어난 작은 책상 하나와, 벽을 향해 놓여져 있는 책상이 전부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서는 희미한 전등을 켜놓고 누군가가 등을 보이며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다. 작두처럼 생긴 칼로 두꺼운 종이 더미를 자른다. 초등학생처럼 키가 작지만 머리는 윗부분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다가 귀밑까지 내려오는 머리도 하얗다.
“여기는…… 어디죠?”
그는 일을 하다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아거시 서점(
보러 가기)의 4층 창고다. 그리고 저 남자는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난쟁이다. 벽에 빨간 모자도 걸려 있다. 코밑과 턱을 완전히 뒤덮은 수염은 산타 할아버지처럼 덥수룩하게 나 있다. 그는 다시 등을 돌리고 일을 한다. 내가 엎드려 있던 책상에는 잘라낸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도서관을 태우다』, 35페이지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소설 말이다. 이제 그레이스도 없으니 원고를 구해올 사람도 없다. 돌아다니는 서점에서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원고를 이렇게 볼 수 있다니……. 나는 ‘도서관이 타고 있다. 책보다 더 좋은 땔감이 어디 있을까.……’로 시작하는 페이지를 잊지 않기 위해 문장을 외우기 시작한다. ‘어깨에는 무거운 산소통을 짊어지고……’까지 읽었을 때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나도, 난쟁이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어깨에 무거운 산소통을 짊어지고 화염방사기를 든 사람이 서 있다. 번쩍거리는 우주복 같은 걸 입고 있다.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염방사기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은 순식간에 불이 붙어 버렸다. 난쟁이도, 책상도 화염에 휩싸였다. 난쟁이는 그 와중에도 열심히 종이를 자르는 시늉을 했다. 이제 불길은 내게 다가온다. 온몸이 뜨거워진다. 종이가 탄다. 옷이 타고, 안경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살이 타기 시작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불타는 종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원고를 한 자라도 더 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부르르, 하고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온몸이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 턱을 받치고 있던 팔이 휘청거렸다. 이곳은 어디지? 방금 전까지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는데……. 아, 도서관이구나. 주위를 휙 둘러보니 다행히 도서관은 멀쩡하다. 높은 천정도, 샹들리에도, 책상도 그대로다. 아무것도 불에 타지 않았다. 앞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사람은 사라졌다. 대신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도수가 얼마나 나쁜지 눈이 팽팽 돌아갈 것 같은 둥근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 그는 휴대폰을 내보이며 밖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한다.
“다…당신이 로버트?”
도서관 복도에서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머리는 희끗희끗하다. 난쟁이와는 달리 턱에는 수염이 없다. 키도 나만큼 정도다. 그의 손은 거칠고 따뜻하다.
“이렇게 만나 봬서 정말, 반갑습니다. 정말 이렇게 만날지는 몰랐습니다. 정말 서진 씨 맞으시죠? 자, 이제 이야기를 좀 합시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리는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그가 앞장을 섰으므로 나는 따라가기만 했다. 우리는 도서관을 나와 브라이언트 파크를 걷기 시작했다.
| 브라이언트 파크 - 초록색 오른쪽 끝 건물이 도서관이다 ⓒ Sonja Pie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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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트 파크는 봄,가을에는 패션 위크가 열리고, 여름에는 야외 영화 상영도 하는 등 미드 타운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근처에는 타임 스퀘어와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이 있고, 각종 빌딩이 하늘을 찌르는 곳에서 푸른 나무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것은 뉴욕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록색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뭔가를 읽고 있다.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책. 무얼 읽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미국의 많은 도시를 방랑했지만 뉴욕처럼 책을 사랑하는 도시는 드물다. 우리는 비어 있는 초록색 철제 의자에 앉았다. 공원에 있는 간이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테이블에 놓고 말이다.
“30년 뒤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저는 믿지 못했습니다. 천천히, 이제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나도 궁금한 것이 많지만 서진 씨도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요.”
……
로버트와 헤어졌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먹지 않고 서점과 도서관까지 뉴욕을 방랑했다. 로버트와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공원 끝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키노쿠니야 서점이 보였다. 2층의 카페에 간단한 도시락을 파는 카페가 생각이 나서 발길을 옮겼다.
| 뉴욕 공립 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 ⓒ PFHLai / Fifth Ave. at 42nd St. //www.nypl.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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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문화를 뉴요커들에게 전파하다
<키노쿠니야 서점 Kinokuniya Bookstore>
뉴욕에 고려 서점이라는 우리나라 서점이 있다. 주로 한국에서 수입좵 책을 파는 곳인데 맨하튼의 코리아타운에 있어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한국말로 된 책만 판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사는 한국인들을 위한 서점이라 그런지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볼 만한 영어로 된 책은 없다. 하지만 키노쿠니야 서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일본을 넘어서는 아시아에 관한 ‘영어로 된’ 책들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규모에 있어서도 동네 서점과 대형서점 간의 차이가 난다. 크고, 깨끗하고 다양한 책이 있으며 에스컬레이터와 화장실, 카페가 있다.
일본의 대형 서점 체인인 키노쿠니야는 우리나라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정도가 될 것이다.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서 26년 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기노쿠니야는 2007년 브라이언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새 서점의 크기는 웬만한 대형서점급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다. 지하에는 일본어로 된 책들이 있고 1층에는 영어로 된 일본·아시아 관련 책들이, 2층에는 만화·예술 관련 서적이 진열되어 있다. 2층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그린 만화
『배가본드』의 캐릭터를 압도적으로 만날 수 있다.
| 키노쿠니야 서점 2층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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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니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본 문화에 관심 있는 뉴요커들도 많이 보인다. 뉴욕에서 일본인들의 인구를 대비해 봤을 때, 이렇게 큰 일본 서점이 필요할까 의문스럽지만, 일본 문화가 어느덧 엘리트 문화가 되어버린 뉴욕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아 질투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스시와 일본 음식을 먹는 것은 뉴욕에서 쿨한 것으로 통한다. 국력의 크기도 문화의 영향력도 미국 안에서 다른 아시아 나라들보다 월등히 높다. 질투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일본 때문에 아시아의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미국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이 이 서점에서 손님의 입장이 되어 책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뿌듯함마저 느껴지니까 말이다.
| 키노쿠니야 서점 지하의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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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눈에 띄는 코너는 아시아 작가들의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모아둔 코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필두로, 하진 등의 중국작가 및 돈 리, 이창래 등의 한국인 2세 작가들의 책도 보인다. 그런데 정작 보이지 않는 건 현재 한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들의 번역본이다. 이는 다른 대형서점에 가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소설의 질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어느 모로 보나 외국시장에 자국 문화를 알리려는 의지와 국력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고려 서점과 키노쿠니야 서점의 차이처럼 말이다.
2층에는 카페 자이야(Zaiya)가 있다. 카페 옆에 난 큰 창을 통해 브라이언 파크를 시원하게 구경할 수도 있고,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디저트와 스시, 도시락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주머니를 뒤진다. 로버트와 헤어질 때 주머니에 넣어준 돈이 만져진다. 빳빳한 백 달러짜리 지폐다. 주로 1.5$짜리 삼각김밥을 사먹었지만, 이제 특별 초밥 도시락과 녹차를 주문했다. 브라이언트 파크가 시원하게 보이는 창가 자리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입 안에서 연어 초밥이 스르르 녹는다.
| 키노쿠니야 서점 2층의 카페 ZAI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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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에 저는 미래에서 책을 구하러 왔지요. 주로 도서관을 뒤지면서 책을 모았어요. 필요한 책은 죄다 훔쳐서 창고에 쌓아 두었어요. 대부분의 책들뫀 도서관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문제는 딱 한 권의 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책인데도 도서관에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도서관을 태우다』입니다. 본부에서는 바보같이 출판년도를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던 겁니다. 33년 뒤에 만들어질 책이라 뒤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달았을 때엔 이미 늦어 버렸어요. 본부와 연락이 끊어져 버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뉴욕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놈들에게 당한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저도 그때는 당신처럼 젊었는데 말입니다. 결혼할 사람도 있었고요. 아……, 죄송합니다. 눈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본부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열심히 책이라도 읽으면서 당신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목적 없는 기다림이란 공허하니까요. 자연스럽게 서점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접신학 도서관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지요. 제가 생각하는 접신학(theosophy)이란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본부와 교신을 하는 겁니다. 저는 우리 도서관에 『도서관을 태우다』의 서지 목록을 끼워 놓았습니다. 다른 도서관에도 끼워 놓기도 했는데, 전산화가 되는 마당에 허사가 되었지요. 당신이 2007년도에 뉴욕에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찾기 위해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어요. 당신이 서점을 돌아다닐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나는 로버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지만 이야기를 할 동안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레이스에 이어 또 한명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꿈속에서 만났던 난쟁이도 생각났다. 점점 소설보다 현실이 더 소설처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소설책 한 권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잘 써지지 않습니다. 당장 쓰지 않고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돈도 다 떨어져 가구요...”
그는 종이컵을 테이블에 탁, 하고 놓는다. 커피가 테이블에 튀었다.
“무슨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합니까? 당신이 쓰게 될 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감을 주게 됩니다. 제목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것도, 세상의 모든 책을 불태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