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은 결코 따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스릴 넘치는 비일상적이고도 창조적인 행위다. 달리다 보면 평소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도, ‘뭔가 특별’해질 수 있다. 설령 짧게 밖에 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짧은 인생을 어떻게든 완전히 집중해서 살기 위해 달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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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특이하고 왠지 멋져 보이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그는 더욱 신화적인 존재가 됐다. 사실 문학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일상적이고 독특한 기행(奇行)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유로우면서도 고뇌하는 영혼의 이미지랄까.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토탈 이클립스>(1995)에 나오는 랭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넘치는 재능과 광기, 눈부신 젊은 날의 열정과 사랑, 자유로움……. 당시 최고의 청춘 아이콘이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젊은 랭보 역을 맡아 미소년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었다. 특히 그가 노회한 문인들이 토론하는 자리에서 구둣발로 테이블 위를 박차고 올라가 열정적으로 시를 읊던 장면은 오만하고도 재기발랄한 천재의 모습, 그 자체였다. 거기서 컷(cut)! 잠시 카메라 뷰파인더를 저 구석으로 돌려보자. 그리고 줌 인(Zoom In).
그렇다. 모니터 한쪽 구석, 우리의 고정관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 하루에 10킬로미터씩, 1주일에 평균 60킬로미터를 그는 꾸준히 달려왔다. 뿐인가. 해마다 빠지지 않고 풀코스 마라톤 경기(42.195km)에 참가해 완주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2007년 8월 현재 25회 째. 그가 서른세 살이던 1982년 가을,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의 문학인생이 남겨놓은 발자취만큼이나 장구하고도 의미 있는 기록이다. 심지어 그는 하루 안에 10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도전하기도 하고, 틈틈이 트라이애슬론 경기에도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내왔다. “밤에는 대개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 매일 조깅을 하며,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소설가, 그가 바로 하루키다.
“하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병적인 집념이 싹 사라져 버려서 문학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하고 지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겠다. “그 정도로 쉽게 사라져 버릴 정도의 가벼운 어두움이라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문학으로 승화될 수가 없습니다.”
자, 이제 카메라 렌즈를 ‘접사렌즈’로 바꾸어 그의 삶을 보다 정밀하게 들여다보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장거리 달리기’라는 필터를 통해 들여다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과 인생 이야기다. 그가 책에서 언급했듯이,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이라고나 할까. 책표지에 등장하는 하루키의 모습은 날렵하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갈색 피부, 그리고 적당한 근육이 붙은 팔과 다리. 그가 1949년생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그는 왜 달리기 시작한 걸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가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중략)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오프닝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려온 하얀 깃털이 주인공의 구두 위에 안착하던 그 순간. 누군가에게 삶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한 순간은, 이렇게 느닷없이 운명처럼 마주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소설가로서 하루키의 데뷔는 성공적이었지만,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그에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막 전업 소설가가 된 내가 맨 처음 직면한 심각한 문제는 건강의 유지였다. 본래 주의하지 않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다. (…) 아침부터 밤중까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는 생활을 하게 되자 체력이 점점 떨어지고, 체중은 불어났다. 신경을 집중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담배도 지나치게 피우게 되었다. (…) 이제부터의 긴 인생을 소설가로 살아갈 작정이라, 체력을 지키면서 체중을 적절히 유지하기 위해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입사 시험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좋은 PD의 자질을 3가지만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입사 후에 어떤 선배는 “좋은 PD가 될 것을 고민하지 말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라”는 의미심장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당시 나는 미리 준비했던 예상 답변을 급조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창의력, 포용력, 체력입니다.” 사실 PD는 3D 직종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센 편이고, 맡은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밤샘작업도 다반사다. 세간의 이미지도 비슷한 것 같다. 어디 나가서 직업이 PD라고 하면, 다소간의 호기심과 선망, 측은함이 뒤섞인 눈길과 함께 “힘드시겠군요.” 또는 “엄청 바쁘시겠군요.” 등등의 반응이 돌아온다. 방송작가의 경우도 실상은 비슷하다. 방송일정에 맞추어 그들의 스케줄도 숨 가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고로 체력은 제1순위가 된다.
그렇지만 순수 문학을 하는 전업 작가도 그런 것일까? 왜? 그들은 좀더 장기적인 호흡으로, 자신만의 페이스로 여유 있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하루 종일 앉아서 쓰기만 하는데도 육체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큰 것일까?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일도 아닌데, 글쓰기 같은 두뇌 작업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들이 뿅뿅 솟구칠 무렵, 하루키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것 또한 하나의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책상 앞에 앉아 신경을 레이저 광선처럼 한 곳에 집중하고, 무의 지평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적합한 단어를 일일이 선택해서 전체의 흐름을 있어야 할 위치에 계속 유지시키는-그러한 작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장기간 동안 필요로 한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있지는 않지만, 뼈를 깎는 듯한 노동이 몸 안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종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에 대한 하루키의 답변은 이렇다. 재능과 집중력, 그리고 지속력.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후자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고, 나아가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 하루키의 지론이다. 고로 전업 작가에게 있어서도 1순위는 역시 체력!
| 아테네, 첫 마라톤 풀코스 완주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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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만큼의 보답은 있다.
스포츠의학 용어 중에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것이 있다. 마라톤처럼 중간 강도의 운동을 30분 이상 계속할 때 느끼는 행복감을 뜻하는 말로,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사실 말이 쉽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한다. 매일 매일 장거리를 달리고, 1년에 한 번씩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일을, 무려 4반세기 동안이나 반복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당위성이나 의지력만 가지고는 어려울 것이다. 땀방울이 흩어지고, 근육이 팽창하고, 살갗이 그을리고, 호흡이 가빠질 때까지 그를 끊임없이 재촉하게 만드는 ‘행복감’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찰스 강가를 1시간쯤 달리면, 마치 양동이로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고 있는 모든 것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다. 햇볕에 탄 살갗이 따끔거린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본문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일종의 중독에 가깝다. 그것은 고통의 순간에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달리는 행위에 내재돼 있는 알 수 없는 에너지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신을 추동하는 내재된 욕망 같은 것. 그는
‘계속해서 횟수를 늘려 가고 한계를 조금씩 올려감으로써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자기가 아직 모르는 것을 좀더 자세히 보고 싶고,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끌어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달리기만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운동이 없는 것 같다. 달리기는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운동이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고,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마음 내킬 때면 언제든 달릴 수 있다. 동시에 혼자서 묵묵히 달리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내면을 응시하기에 이보다 좋은 운동이 또 있을까. 이런저런 장점 외에도 하루키는 달리기가 자신의 기질과 잘 맞는 스포츠였다고 털어놓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하루키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권위나 강요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그의 태도는 ‘쿨’하다는 느낌을 준다. 당연히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중략)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래서 역시 하루키답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타고난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숨기는 사람들도 많다.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어야 되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해야 하는 상황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타고난 기질을 개조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어서, 겉으로는 크게 웃고 있지만 정수리에서는 아드레날린이 펑펑 흘러넘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사는 일은 또 얼마나 피곤한가. 이 세상 공기 중에 얼마쯤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변형, 왜곡, 가장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스트레스가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분명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불평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하루키의 의지력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는 순간들이 있다. 엄청난 정신력과 인내력이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그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쾌함과 유쾌함이 하루키 에세이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실,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발자국 양보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릴 테니까. 한 번 무너진 것이 두 번, 세 번 무너지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될 테니까. 그래서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를 테니까. 일단 삶의 방식을 정하고 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 초지일관하는 자의 단호함이란, 역시 멋지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 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무라카미 하루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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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그의 기록은 예전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아무리 꾸준히 단련해왔다 해도 그의 체력이 20여 년 전과 같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그 모든 변화를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기록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 (중략)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키는 마라톤 대회 출전 외에도 수년째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그가 타는 스포츠 바이크에는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18 'til I die)’라고 쓰여 있다. 브라이언 아담스의 히트곡 제목을 차용한 이 문구는 하루키의 인생과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올해 우리 나이로 60세.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작열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여전히 퐁퐁 솟아나고 있다.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묵직한 부분들을 천착하고, 그의 단편 에세이들은 젊고 재기발랄한 감각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소설가’ 하루키의 뒤에는 그 세월만큼이나 꾸준하고 규칙적으로 달려온 ‘러너’ 하루키가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는 서머셋 ?의 말을 인용,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라고 적었다. 얼핏 단순하고 당위적인 결론처럼 보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 인생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규칙적으로 꾸준히, 쉬지 않고 어떤 자취를 새겨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무릇 시간의 힘이란 그런 것인지도. 내 인생에서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원칙이 뭘까 새삼스레 생각해 보게 된다. 삶 속에서 원칙을 지키면서 꾸준히 쌓아갈 수 있는 가치란 또한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의 힘을 믿고 삶 속에서 묵묵히 새겨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그렇지만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하루키의 달리기도 계속될 것이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그 날까지 그렇게. 비록 석양을 등에 지고 달리는 그의 뒷모습에
<록키>의 테마곡이 깔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 진정 아름답게 느껴진다. 언제까지나 롱테이크로 남겨두고 싶다. 그의 뒷모습이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