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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 술로 모두 잊어버려요 - 과일로 향을 낸 스페인 와인펀치 샹그리아

멀리할 수도 없고,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작은 잔 속에 고여 있는 단기기억상실증용 마취제. 한잔으로 잊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 인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 술과 스스럼없는 친구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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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마시라고 주시던 것이 무엇이었지요?”
“언제? 여기서? 그때는 여러 가지를 마구 마시지 않았던가?
“아니, 여기가 아니고요, 첫날 밤에 말이에요.”
“생각이 나지 않는데, 꼬냑이 아니었던가?”
“아녜요. 꼬냑 같기는 했지만 다른 거였어요. 그것을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질 못했어요.”
“왜 그것을 마시려고 그러지? 그게 그렇게 좋았었소?”
“그런게 아니고 그런 훈훈한 술은 처음 마셔보았기 때문이에요. 개선문 근처의 조그만 비스트로였어요. 계단을 내려갔었지요. 택시 운전수와 여자들이 몇 명 있었어요. 웨이터가 팔뚝에다 여자의 문신을 했고요.”
“아, 이제야 알겠어. 아마 칼바도스였을거야.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브랜디야.”
- 에리히 레마르크(E. Remarque), 『개선문(Arc de Triomphe)』

나치의 강제수용소로부터 간신히 도망쳐 파리에서 숨어살고 있는 외과의사 라비크는 애인이 비참하게 죽은 처참한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애인과 자신을 수용소로 몰아넣은 비밀경찰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파리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돌팔이 의사들의 수술을 도맡아 해주면서도 파리에 숨어 살고 있다는 이유로 보수는 형편없이 받아야만 한다. 그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술과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낸다. 그런 그 앞에 역시 애인을 따라 파리로 흘러들어 온 혼혈인 여가수 조앙 마두가 나타난다. 수용소 시절의 기억 때문에 인간관계와, 특히 사랑과는 다시는 이어질 일 없을 거라 생각한 그는 곧 그녀와 순간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온전히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에는 증오로 인한 복수심이 더더욱 강했던 그는 결국 오랜 수소문 끝에 비밀경찰을 납치해 살해한다. 그가 복수를 하는 사이 다른 배우와 관계를 가졌던 조앙은 그가 쏜 총에 맞아 라비크 앞에서 허무하게 죽고 만다. 복수와 사랑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들이 있었음에도 계속 전쟁은 심해져만 가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이 살고 있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망명하거나 도망가는 삶을 계획하지만 라비크는 의술을 가진 자신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강제수용소로 들어간다.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 삭막한 도시에서 만났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죽은 조앙이 그래도 그를 조금은 변화시킨 것이다.

세계 명작이라고 문고판으로 어렸을 때 읽었지만 도통 뭔 이야기인지 감정이입이 안 되다가 나이 들어 다시 봤을 때 넋 놓고 읽는 책들이 종종 있다. 실은 어린이 세계 명작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세계 명작이 그런데, 특히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어른이 되어서 읽어도 불안함과 정체성을 고민해보거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을 해보지 않고,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고 놓쳐버린 뒤에 괴로워 해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정말 많다. 특히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며 털어 넣는 술 한잔의 느낌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듯하다.

물론 술 이야기라면 정말 많은 책에서 다양하게 나오지만, 개선문에서만큼 소설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책이 또 있을까? 아르마냑Armagnac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꼬냑과 아페리티프Aperitif 의 한 종류인 페르노Pernod, 보르도 와인 쎙떼밀리옹St.Emillion과 보드카까지 나오지만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술은 칼바도스Calvados, 애플 브랜디이다.

칼바도스Calvados
라비크와 조앙이 처음 만난 날 허름한 비스트로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신 뒤부터 그 술은 소설 전체에 무언가를 씻어버리기 위해 들이키는 푸근하면서도 독한 술로 등장한다. 조앙은 항상 그와 있을 때면 칼바도스를 마시거나, 마시기 위해 준비해 두었다. 왜 다른 술도 많은데, 칼바도스였을까? 그녀를 파리로 데리고 들어온 애인이 갑자기 죽고, 길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녀 대신에 뒤처리를 해주고, 마음을 가라앉히라며 그가 권해준 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 그녀가 칼바도스를 좋아하게 되고 꾸준히 마시게 된 것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40도가 넘는 독한 브랜디인만큼 춥고 쓸쓸하고 불안한 그들의 마음을 쉽게 따듯하고, 멍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과가 많이 나는 노르망디의 사과주인 시흐드Cirde를 기본으로 만드는 브랜디니, 꼬냑보다는 구하기 쉽고 좀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조앙이 말한 대로, 따듯하고 훈훈한 술인 것이다.

노르망디의 몇 십 종이 넘는 다양한 사과를 혼합해 만든 사과주를 기본으로 2년 정도는 오크통에 숙성시켜야 칼바도스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다른 술들이 그렇듯, 오래 묵은 칼바도스도 더 부드럽고, 독하고 값도 비싸다. 애플 사이더를 이용해 만든 술로는 미국의 애플잭Applejack도 있지만 애플잭은 애플사이더를 눈이 오고 추운 겨울에 얼려 농축시켜 만드는 것으로 방법이 많이 다르다.

칼바도스를 넣어 볶은 버섯과 크림소스를 이용해 만든 크레페 - ficelle de normandie
칼바도스는 요리에도 많이 쓰인다. 브랜디나 꼬냑처럼 사용하면 되는데 특히 디저트에 많이 사용한다. 사과와 더불어 노르망디 지역을 대표하는 식재료인 유제품을 이용해 칼바도스를 넣은 버터스카치소스나 사과절임을 넣어 만 크레페 위에 칼바도스로 불을 붙이는 디저트들은 그야말로 노르망디 그 자체이다. 전통적으로 사과와 어울리는 돼지고기에 곁들이는 애플 소스나 벨루테 소스를 칼바도스로 맛을 내곤 한다. 사과향 때문에 디저트에도 많이 쓰이는데 계피와 함께 바바로아로 만들거나 소스를 만들어 오븐에 구운 사과에 곁들여도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크리스마스 푸딩에 쓰는 과일절임인 민스미트를 만들 때 브랜디 대신 사용하면 훨씬 과일 향이 잘 살아나는 느낌이라 무척 좋아한다.

압상트Absinthe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도 나오는, 랭보와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19세기 보헤미안들이 숭배하며 자주 마셨다는 쑥과 허브가 들어간 독한 술 압상트Absinthe가 왜 『개선문』에는 등장하지 않았을까? 에메랄드빛의 술이 물을 부으면 색이 희게 변하는데, 역시 물을 부으면 하얗게 변하는 그리스 전통주 우조Ouzo처럼 압상트도 펜넬Fennel과 아니스Anise를 기본으로 한 아페리티브다. 일명 ‘녹색 요정Green Fairly’이라고 불리는 이 독한 술은 중독자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고, 그로 인한 범죄가 늘어나 정신병을 불러일으키고, 몸을 쇠약하게 죽게 만드는 독주로 여겨져 1915년 이후부터 1990년까지 거의 전 세계적으로 생산과 판매가 금지되었었다. 개선문의 배경도, 2차 세계대전 즈음이니 이 책에서 압상트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박하고 따끈한 칼바도스가 아닌 머리를 단숨에 마비시켜버리는 압상트를 나누어 마셨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두 개의 잔에다 술을 따랐다.
“자, 받아요. 간단하고 야만적이긴 하지만 괴로울 때는 원시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제일이거든. 세련된 짓이란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고, 자 마셔요.”
“그리고 다음에는 어떡하지요?”
“그리고 또 마시는 거지.”
“저도 그렇게 해봤어요.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혼자서 취한다는 ?은 그리 좋은 일은 못 돼요.”
“우선 잔뜩 취해야 되는 법이야. 그럼 잘 돼요.”
- 에리히 레마르크(E. Remarque), 『개선문(Arc de Triomphe)』

몇 개 안 되는 올 새해 계획 중 포함되어 있는 것이 ‘술은 혼자서 마시지 말자’이다.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정해 본 새해 결심인데 이런저런 생각한답시고,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와인이나 맥주를 홀짝대는 것을 즐기다 보니 비사회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피곤한 완벽주의자 성격에 사람들이랑 부딪히면서 속 보여주기 싫은 마음에 속상해도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혼자 홀짝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지금도 마음 다치는 일 있으면 집에 틀어박힌다. 하지만 올해는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듯이 술을 마셔보려고 한다.

봄에는 개나리가 피어있는 삼청동 골목에서 몸에 겨우내 쌓인 기운을 빼버리듯 향이 강한 국화주나 매실주를 마셔야지. 꽃구경을 하면서 마시면 더 좋을 것 같다. 신선한 파와 5월에 제철인 조개류를 넣어 만든 파전에 쌉쌀한 인삼 동동주도 좋겠다.

여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더우니까는 땀 흘린 후 맥주가 좋겠지. 필리핀 식으로 얼음 가득 채운 머그잔에 순간적으로 부어서 거품을 넘치게 한 다음 마시면 정말 시원하다. 아침부터 삼십 도를 훌쩍 넘는 브라질에서 한낮에 마시던 시원하고 물처럼 싱거운 맥주도 참 좋았는데. 언젠가 내가 정원이 생기면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해야겠지. 여러 가지 향신료로 맛을 낸 신선한 재료들을 숯불 위에서 굽고 미국식 비스킷과 옥수수도, 떡시루와 같은 큰 동이그릇에 얼음을 채우고 병맥주를 꽂아 놓는 것도 좋겠다.

가을에는 술을 먹는 것도 좋지만 담그는 계절이다. 봄에 걷은 매실로 담은 술이 어떤가 맛도 보고 따닥따닥 열린 작은 사과들로 술을 담그고 늦게 나온 포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한 레드와인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떫고 무거운 벨벳 같은 레드와인. 겨울에는 뭐니 해도 따끈한 정종에 오뎅. 몸을 덥혀 주는 동태찌개에 소주도 최고고. 그리고 겨울에 제철인 오렌지를 섞어 와인 칵테일, 샹그리아를 만들어 먹어야 할 테고.

술을 줄이자고 새해 계획을 써 놓고 그 밑에 계절마다 어떻게, 어떤 친구들과 무엇을 마실 것인지 적어놓은 글이 더 기니, 한심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풍류를 즐기며 즐겁게, 술에 의존하지 않고 술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해도, 우리 모두 무언가 마취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눈물 흘리고 싶은 날 가끔 들춰 보는 송나라 유행가 가사의 한 대목처럼, ‘술에 취해 서루에서 헤어졌는데, 깨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醉別西樓醒不記)’라고 아침에 느끼고 싶은 날도 인간이기에 있을 수 있으니까. 물론 기분의 전환을 술로서만 할 수 있고, 괴로움을 잊고 싶어 마셨다가 정말 필름이 계속 끊어지게 되면 몹시 곤란하지만 말이다.

라비크는 사람들을 마취하고 수술을 하는 외과 의사다. 여권도 없이 허름한 호텔방을 돌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복수심에 멍든 마음을 매일 같이 날카롭게 세워가며 하루하루 사는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안부를 묻지만 무심하게 남처럼 그냥 스쳐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잊으려 마시는 술과 잠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여자, 둘뿐이었을 것이다. 상처받고 갈가리 찢겨진 그도 실은 수술이, 사랑이 필요한 환자였던 것이다. 그와 조앙은 그나마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기 위해선, 서로 그어놓은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그렇게 술을 마셔댔을 것이다. 마시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그들의 괴로움들. 독한 술로 순간순간을 마취시키는 것이 누군가를 만나서 상처를 치유 받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술을 마시는 것과, 무엇인가 잊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즐거워서, 행복해서 취하는 날도 많지만 우리 대부분은 괴로움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마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각자의 괴로움과 사정, 그리고 불면. 가끔은 사람보다는 술잔을 마주하는 것이 편한 날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가끔 입을 굳게 다물고 혼자 쭈그리고 앉아 술을 마실 때마다 나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슬쩍 다가와 잔을 채워주며 엄마 아빠가 웃으라고 해주시는 노래가 있다. 만날 같은 노래만 불러 주냐고 툴툴거리긴 하지만, 부모님은 술 한잔과 이 노래 한 대목이면 내가 굳은 얼굴 근육을 느슨하게 풀어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고까짓 것 사랑 때문에 빗속을 거닐며 추억일랑 씻어버리고 한잔 술로 잊어버려요

멀리할 수도 없고,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작은 잔 속에 고여 있는 단기기억상실증용 마취제. 한잔으로 잊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 인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 술과 스스럼없는 친구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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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로 향을 낸 스페인 와인펀치 샹그리아(Sangria)

재료
레드 와인 두 병(1.5리터) / 화이트 와인 한 병(750ml) / 토닉워터 또는 페리에 3병 / 설탕 250g / 브랜디 혹은 코냑 100ml / 레몬과 오렌지 3개씩 얇게 썰어서 / 사과와 배 한 개씩 얇게 썰어서

요리법
1. 레몬, 오렌지를 제외한 모든 과일은 씨를 제거하고 납작납작하게 썰어준다.

2. 아주 큰 보울(bowl)을 준비 해 두 가지 와인을 섞는다.

3. 설탕을 넣어 다 녹을 때까지 저은 뒤 탄산수와 코냑도 넣어 저어준다.

4. 과일을 모두 집어 넣어 최소한 3-4시간, 와인이 과일 향을 다 빨아들이도록 놓아둔다.

5. 서너 시간 뒤에 과일을 빼내고 병에 넣어 냉장고에서 넣어 차갑게 식힌다. (잔에 담을 때 술에 잠겨있던 과일을 같이 내는 것도 좋지만 와인 색을 빨아들여 그리 색이 예쁘지 않으니 과일을 곁들이고 싶다면 레몬이나 라임을 썰어 한두 조각씩 잔에 넣어주는 것이 좋다.)

# 레드 와인을 화이트 와인으로 마저 대체하고, 애플 브랜디인 칼바도스를 반 컵 정도 넣으면 흰 샹그리아를 만들 수도 있고, 레드와인 대신 로제 와인을 넣으면 로즈 샹그리아도 된다. 단, 화이트 샹그리아를 만들 때는 반드시 배 대신 복숭아를 넣어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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