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동네마다 대본소라는 게 있었습니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이라면 거의 접해보기 힘드셨을 가게인데, 대충 만화 가게보다 조금 전 시대에 존재했다고 하면 괜찮을까요? 비록 대본소 그 자체는 사라졌지만 요즘까지도 단어는 남아서 ‘대본소 만화’ ‘대본소 소설’ 같은 단어로 특정 컨텐츠의 유치함을 비웃는 데 쓰이곤 합니다.
대본소가 막 그 이름을 감추고 그 빈자리를 만화 가게가 채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른바 빌려보는 대중소설의 장르에는 판타지가 추가됩니다. 그전까지 대본소를 지배했던 중국을 무대로 한 영웅호걸들의 화려한 무공 초식은 90년대 이후부터는 마법사들의 파이어볼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판타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한 신무협 등으로 진화하고, 이 시류를 타지 못한 무협지들은 서서히 주류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러한 판타지의 득세는 특히 PC통신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작지 않습니다. 기존까지 특정 소수에 의한 사랑만을 받아오던 판타지류는 전국의 ‘오덕’ 들을 엮어주는 네트워크를 통해 마니아층을 형성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산하는 컨텐츠가 출판에 이르면서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판타지 소설의 대중화, 그 첨병에 서 있던 책이 하나 있습니다. PC통신 하이텔에서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며 연재되었고, 이후 출간과 게임화 작업(게임의 흥행은 좀 아니었습니다만) 등을 통해 판타지 전성시대의 서곡을 알린 작품이 『드래곤 라자』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판타지의 공식에 충실한 배경을 가진 소설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대륙에는 바이서스와 자이펀이라는 두 왕국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대립하고 있고, 그 왕국들을 둘러싼 몇 개의 공국들이 이합집산 하는 시기입니다. 주인공이자 화자는 바이서스 왕국의 어느 시골구석 헬턴트 마을에서 양초 만드는 아버지를 돕던 소년 후치 네드발입니다.
후치의 마을 헬턴트는 매우 좋은 교통 입지에도 불구하고 큰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데, 마을 뒷산에 거대한 검은 드래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드래곤 때문에 마을은 발전하지 못했고, 그 드래곤을 퇴치하고자 구성된 자경단은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마을에 음울한 기운을 드리웁니다. 그 와중에 헬턴트 영지의 영주가 직접 출전한 원정에서 영주는 그만 사로잡히고, 사람들은 바이서스 왕가에 부탁해 영주의 몸값을 구하고자 왕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 일행에 후치가 포함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단지 양초 만드는 일 이상의 재주가 없는 소년이 주인공이기에 『드래곤 라자』는 기본적으로 성장 소설의 색채를 강하게 띱니다. 다만 일반 소년으로 험난한 판타지 세계의 대모험을 치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기에 소년에게는 판타지에서 개인의 능력치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 아티팩트Artifact를 통해 시련을 이겨낼 단서를 부여받습니다. 오우거(게르만 신화 등에서 처음 등장하는 거대한 야만생물)의 힘이 담긴 장갑을 얻은 소년은 검조차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상태로 단지 영주와 같이 잡혀간 아버지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여행길에서 만나는 온갖 사건들 속에 결국은 세계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인공의 시간에 따른 흐름이 성장소설의 기법을 따른다면, 『드래곤 라자』의 큰 줄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판타지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몬스터와 맞서기 위해 주인공은 대개 혼자가 아닌 다양한 재주를 지닌 이들과 함께 하게 되는데(ex : 『반지의 제왕』에서의 리더 아라곤, 엘프궁수 레골라스, 드워프전사 김리), 『드래곤 라자』의 주인공 파티Party 또한 그러합니다.
| 게임 <드래곤 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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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치의 경우는 강한 아티팩트로 힘을 자랑하는 스타일이고, 그의 동반자 칼은 방대한 독서와 화술을 배경으로 파티의 좌장 역할을 맡으며, 길에서 만나 합류하는 엘프 이루릴은 민첩함과 친화력, 여성 도적 캐릭터 네리아, 마법사 아프나이델, 사제 등 판타지의 직업 분류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캐릭터들이 주인공과 함께 모험을 떠납니다.
판타지 소설의 재미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이렇게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상상의 세계 속에서 어우러져 빚어내는 결과물이 흥미진진하다는 점입니다. 강대한 몬스터에 맞서기 위해 큰 도끼를 휘두르는 전사와 날렵한 궁수, 위력적인 마법사와 강력한 치유와 보호의 힘을 가진 사제가 함께 한다는 것은 현실을 넘어선 시너지를 독자의 눈앞에 펼쳐 주는데, 이런 다이내믹함은 기존의 소설 장르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재미입니다.
**판타지 장르의 이러한 재미는 해당 컨텐츠에 전제된 설정을 독자가 얼마나 빠르게 이해하고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실제 서구에서는 ‘D&D’(Dungeon & Dragon) 이라고 하여 판타지 세계의 기본 룰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칭송받는 이유는 단지 그러한 판타지 장르의 설정에 충실해서만은 아닙니다. 판타지라는 상상의 설정 속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읽는 주체이자 글을 쓴 주체인 인간 그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이
『드래곤 라자』가 최고의 판타지라고 추앙받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상상의 세계이기에
『드래곤 라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 한 세계에 어울려 함께 살아갑니다. 마법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엘프, 보물에 대한 탐욕이 뛰어난 강인한 드워프, 지적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오크, 거대한 골격에 사람을 잡아먹는 트롤 등
『드래곤 라자』의 세계에는 인간이 아니면서도 지성을 갖추고 사회생활을 하며 인간과 교류를 맺는 수많은 종족들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종족들은 저마다 나름의 습성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대립하거나 협력하는 등 속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발현하고, 이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시골 소년의 서울 상경기로 구성된
『드래곤 라자』는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인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위한 전개를 펼쳐 보입니다. 인간의 욕심, 인간의 타락, 종족과 종족이 만나는 접점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들을 통해 판타지
『드래곤 라자』는 오히려 현실의 인간상을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투영합니다.
이러한 대주제를 건드리기 위해
『드래곤 라자』는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보다는 300년 전 바이서스 왕국을 일으키는 데 온 힘을 쏟았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모험과 일대기를 끊임없이 들려 줍니다. 사실상 소설은 크게 두 줄기를 이끌어 가는데, 현실시간에서의 후치 일행이 겪는 모험이 있다면 그 모험의 배경이 되는 삼백 년 전의 모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일대기가 또 한줄기를 구성합니다. 소설은 액자식 회고를 통해 끊임없이 두 모험을 대비시키며, 이 시간의 간극을 통해 새로운 갈등과 사건들을 만들면서 대단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 드래곤 라자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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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레이크의 모험도, 후치의 모험도 모두 그 주제는 ‘관계’라는 말로 묶을 수 있습니다. 핸드레이크의 삼백 년 전 모험은 인간잹 포함한 모든 종족의 번영을 목표로 했고, 후치의 모험은 인간과 인간 아닌 세계의 교류를 보여 줍니다. 아니 그보다도, 애초에 소설의 제목인
『드래곤 라자』 자체가 이미 관계를 이야기하는 단어입니다. 소설 속에서의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이 관계를 맺기 위해 계약한 인간 중재자로, 한 드래곤에 한 명씩의 드래곤 라자가 존재하여 드래곤과 인간의 교류와 대화를 돕는다는 설정입니다. 소설 속의 후치 일행은 바로 이 드래곤 라자를 찾기 위해 왕국의 사방을 헤매는 것입니다.
관계, 1인칭인 ‘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때 반드시 성립하는 이 개념이
『드래곤 라자』 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철학입니다. 인식의 주체인 ‘나’ 밖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은 관계 맺고, 관계에 고민하며 서로의 해결점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다채로운 실험을 벌이는데, 심지어는 마법의 숲을 설정하여 숲에 들어간 모든 이들의 자아가 둘, 셋, 넷으로 분열하는 모습도 만들어 냅니다.
주제가 ‘관계’기에 소설 속의 많은 개념들은 그 관계에 중점을 두어 만들어진 바가 작지 않습니다.
『드래곤 라자』의 세계관을 주관하는 양대 신은 창조의 신 유피넬과 파괴의 신 헬카네스인데, 만물은 이 두 신 사이의 관계 어디쯤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유피넬이 세상에 보다 가깝게 관계할 경우 세상은 온통 질서투성이의 모습이 되어 어떠한 변화도 갖지 못하는 반면, 헬카네스만의 세계가 도래하면 모든 것이 혼돈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드래곤 라자』의 뼈대가 되는 세계관입니다. 두 신의 피조물들인 여러 종족들은 각자의 위치에 맞는 선에서 두 신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기반으로 또한 각 종족간의 관계를 정리해 갑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에 대한 설정은
『드래곤 라자』를 재미와 사고를 모두 잡은 소설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신작을 낸 작가 이영도가 인터뷰에서 “스스로도 돌아보면 유치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인정할 만큼
『드래곤 라자』는 PC통신 특유의 유치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와 주인공들의 농담 가득 섞인 대화로도 유명합니다. 통신체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90년대(당시엔 분명 신세대였던)의 발랄한 감각만은 고스란히 살아있는 재기 넘치는 문체 속에서 ‘여러 종 중 하나’인 인간의 관계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냈기에
『드래곤 라자』는 좀처럼 판타지로서 이루기 힘든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출간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많은 판타지 작가 지망생들로부터 ‘한국 판타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작품인
『드래곤 라자』는 지금까지도 인터넷서점 리뷰란에 새 감탄사가 올라올 정도의 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한국 판타지 서사문학의 가능성으로 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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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