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에 소개된 모든 서점은 직접 다녀온 실제로 존재하는 뉴욕의 서점입니다. 그러나 구성된 이야기는 픽션으로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칼럼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전 줄거리>
뉴욕에서 ‘도서관을 태우다’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나는 써지지 않는 소설의 힌트를 얻기 위해 서점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미래에서 책을 구하러 왔다는 여자 그레이스 윤을 만나고 북원더러(Book Wanderer)가 된다. 내가 하는 일은 그녀를 도와 뉴욕의 서점을 돌며 서점에 대한 자료와 책을 모으는 일이다. 한편, 3년 뒤에 완성하게 될 소설의 일부가 서점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레이스 윤과 나는 숨바꼭질을 벌이는데……
***
머더 잉크(Murder Ink.) 서점을 다녀오니 새벽 두 시가 넘어 버렸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폐허가 된 머더 잉크(Murder Ink.) 서점에서 그레이스가 찾아낸 것이 무엇인지 생각 하다 보니 눈만 멀뚱멀뚱 뜨고 침대를 뒤척거리고만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뉴욕의 서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책들도 사라지고 있을지 모른다. 출판된 지 오십 년, 백 년이 된 책들이 사라지는 서점에 꽂혀 있을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책은 초판에서 끝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출판된 지 사오십 년이 지나서도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다시 태어나는 책은 운이 지독하게도 좋은 것이다. 과연 내가 앞으로 쓸 책은 얼마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뒤척거리다 침대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레이스가 찾아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에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걸어갔다. 한 발짝, 내밀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그덕거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자고 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다만 숨을 쉴 때마다 덮은 담요가 아주 조금씩 움직일 뿐이다. 나는 소파 아래에 있는 가방을 조심스레 집는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스탠드에 불을 켜고 가방을 허겁지겁 열어본다. 다섯 페이지 종이가 찢겨져 있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건 내가 삼 년 뒤에 완성하게 될 소설 ‘도서관을 태우다’의 원고 일부였다.
서점 안에 도서관이 있다 <퀘스트 북샵 Quest Book shop>
“3분 간 무료 힐링을 받아보지 않을래요?”
점성술과 영적인 책들이 가득한 퀘스트 서점(Quest Book Shop)을 방문했을 때, 영적 치료사인 케이트가 말을 건넸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 케이트는 서점 옆에 마련된 강연장에 혼자 앉아 있었다. 서점을 다 둘러보고 30분이 지났는데도 그녀의 테이블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타로카드는 그녀가 오늘 손님이 없을 거라는 걸 예견해 줬을지 궁금했다. 뉴욕의 그 어느 곳에도 공짜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 Quest 서점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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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보다 3분 간 인터뷰를 하는 건 어때요?”
나는 서점을 방문하면서 편한 대로 책 컬렉터가 되었다가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가, 소설가가 되곤 한다. 이번엔 북 원더러(Book Wanderer)라는 잡지사 기자다. 자연스레 명함을 건네고 몇 가지 이것저것 질문을 해본다.
케이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뉴욕에서 왔고, 오늘부터 퀘스트 북샵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무료 기 치료를 해주기 위해 이곳에 온다. 물론, 그녀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마음속에 꽉 막힌 응어리를 푸는 치료가 전문이라고 한다. 나는 타로카드, 기 치료, 채널링 등 미신에 관련된 것은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싸구려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했다.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료 치료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케이트는 천천히,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뉴욕에 온 것도, 자기가 이 서점에 머무는 것도, 그리고 우리가 이 시간 이 곳에 만난 것도 결코 우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플로우를 타야 하는 거지요. 글이 잘 안 써진다구요? 당신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운들이 글을 쓰게 만든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지나친 기대는 스트레스를 만?지요. 기운이 모아질 수가 없어요. 편하게, 지금을 살아 보도록 해요.”
티브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쳇’ 하고 쓴 웃음을 지었겠지만 당연한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확신하지만 조급하지 않은 그녀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말이다.
| 퀘스트 서점 중앙 매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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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래의 사람들과 교신도 가능한가요?”
케이트는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지 눈치를 살핀다.
“공기 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가 전파처럼 섞여 있어요. 그것이 과거에서 온 것일 수도, 미래에서 온 것일 수도 있지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현재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물론 나는 그레이스 윤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어때요? 일주일에 한번씩 기 치료를 받아보는 건? 훈련을 하면 미래의 사람들과 교신을 할 수도 있어요.”
나는 미래에서 온 사람과 매일 아침을 같이 먹는다.
“음, 아쉽지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요.”
우리는 둘 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케이트는 나의 손을 잡았다.
“잠시만 그렇게 있어 봐요. 당신의 어딘가가 꽉 막혀 있으니까.”
그리고 눈을 감는다. 그녀의 손을 통해 뭔가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5분 정도 흘렀을 뿐인데, 한 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케이트가 눈을 떴다.
“당신이 쓰는 것이 문자의 나열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진심을 담아 쓰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려움을 겪을 지도 몰라요. 글이 안 써지는 정도가 아니라, 머릿속의 것들이 현실로 튀어 나와 버릴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 영적 치료사 케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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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당신은 서점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겠지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전력을 다해 써야 하는 것이죠. 자전거 페달을 빨리 밟을수록 넘어지지 않잖아요. 그 매듭을 풀지 못하면 위험해요. 벌써 신호가 오고 있어요. 당신 내부의 중요한 질문의 대답은 책에 있는 게 아니에요.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대답이 있는 걸요.”
“도움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세상이 멸망한다면 구하고 싶은 세 가지 책을 추천해주세요.”
1. Vernon Howard, 『Esoteric Mind Power』
2. Julia Cameron,
『ARTIST'S WAY spiritual path to higher creativity』
3. George Anderson, 『LESSONS FROM THE LIGHT MESSAGES OF LOVE & COMFORT FROM THE OTHER SIDE』
| | | Esoteric Mind Power | ARTIST'S WAY | LESSONS FROM THE LIGHT MESSAGES OF LOVE & COMFORT FROM THE OTHER S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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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북샵에서는 서점 이름대로 인생의 모든 의문(Quest)에 대답할 수 있는 책을 판매한다. 점성술과 타로, 접신론(接神論-Theosophy)과 심리학, 힌두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 요가와 자기 치유, 영적 치료에 관한 책들이 모여 있다. 서점에는 은은한 향냄새가 나고, 명상 음악이 울려 퍼진다. 천장에서 드리워진 붉은 색 천에 불상과 다양한 영적 상징이 그려져 있다. 인생의 의문을 풀 만한 좋은 배경이다. 케이트가 있던 방에는 점성술이나 기 치료 행사가 매일 열리고 있다.
뉴욕 접신학 협회(New York Theosophy Society)와 연계되어 있어서 서점 안의 작은 문을 통해 2층의 협회 도서관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서점 안에 도서관이라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책을 파는 서점 안에 책을 공짜로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니 말이다.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마치 숨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보였다. 끝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이곳이 도서관으로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 나왔다. 서점에 있는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안경을 낀 남자가 책을 정리하다가 나를 흘끔 바라본다. 눈인사를 하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 Quest 서점 2층의 협회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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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나는 그레이스에게서 훔친 원고를 책상에 두고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였다. 그걸 훔칠까도 생각했지만 대신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놓기로 했다. 그래야 그녀가 또 다시 나의 원고를 찾아올 테고, 나는 그걸 읽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음날 종이 조각들은 불에 태워질 것이 분명했다. 원고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무슨 책을 찾고 있는가요?”
책을 정리하던 사서가 말을 걸었다. 안경을 끼고 머리가 듬성듬성한 중년 남자다.
“도서관을 태우다(Burning Libraries) 라는 책을 찾고 있는데요.”
나도 모르게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 튀어나와 버렸다. 왠지 이런 서점 한 귀퉁이에 있을 법도 하지 않은가? 책상에는 그 흔한 컴퓨터 한 대도 없다. 그는 책상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연다. 언제 봤는지도 모를 정겨운 도서 목록 카드가 나온다. 예전엔 모든 도서관에 저자별, 분류별로 구분된 도서 목록 카드가 있었다. 그는 목록 카드에서 그는 누런 카드 한 장을 꺼낸다.
“책이 있군요. 죄송합니다만 이건 아무나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혹시 성함이?”
눈이 즐거워지는 책들 <타쉔 서점 Taschen Books>
그림과 사진으로 된 예술 서적이 무겁고, 비싸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은 타쉔(Taschen)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본다면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미술이 이렇게 흥미로워도 되는가, 소설을 쓰기 보다는 차라리 사진을 찍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80년 독일의 베네딕트 타쉔(Benedict Taschen)에 의해서 만들어진 타쉔 출판사는 원래 만화 컬렉션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점점 주류에서 보기 힘든 예술 서적을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타쉔에서 출판된 책들은 젊은 예술인이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게다가 논란이 되기 쉬운 페티쉬 이미지 모음집, 퀴어 아트, 에로티카, 그리고 성인 잡지 등도 마구 만들어낸다. 그런 책들도 외설적이라기보다는 섹시하고 익살스럽다. 익히 알고 있는 미술가들의 화보도 들고 다니기 쉬운 사이즈로 나와 있다. 그뿐인가? 각 도시의 건축과 인테리어 스타일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세계 여행을 한 기분이 든다. 재미뿐만이 아니라 생각할 문제도 툭, 하고 던져주니 센스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그림, 디자인, 패션, 광고역사, 영화와 건축에 이르는 시각 예술에 관련된 흥미로운 책을 만드는 곳이 타쉔이다. 특히 10달러 미만의 아이콘 시리즈와 베이직 아트 시리즈는 저렴한 가격의 예술 책으로 인기가 많다. 25주년 특별판으로 기획잵어 나오는 수많은 아트북 중 한두 권 정도는 집에 뒹굴어 다니기 일쑤다. 저렴한 책뿐만이 아니라 대형 사이즈의 화려한 아트북이나 특별판 제작에도 나서서 책 자체를 예술의 영역 까지 끌어올리고 있다.(700페이지의 『Greatest of All Time』이라는 책은 무려 $12,500나 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책이라고 한다)
| 타쉔 서점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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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술 도서 전문 출판사의 직영 서점이 베를린, 도쿄, 로스엔젤레스, 파리, 그리고 뉴욕에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외부는 푸른 파스텔 톤이고 안은 오렌지 빛으로 밝고 고급스럽다. 무엇보다 서점은 알록달록한 책으로 가득 차 있어서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러나 위치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소호가 고급 패션 타운과 갤러리로 넘쳐나고 있지만 타쉔 서점 근처의 그린 스트릿(Green St.)은 눈에 띄는 상점 등이 없다. 나도 음식점을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쿨하고 멋진 책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갤러리 하나를 보는 것보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 책 등이 아니라 책 표지 방향으로 전시되어서 갤러리에 온 기분이 든다. 이제는 소호에 젊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지만(대신 럭셔리 가구점과 패션 스토어가 들어섰다) 그들에 관한 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혼란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퀘스트 서점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봐야 내가 갈 수 있는 곳도 역시 서점이었지만 말이다. 퀘스트 서점 안에 있는 접신학 도서관에 분명 내 책과 똑같은 제목의 책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내가 아니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희귀본이라 아무한테나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북원더러(Book Wanderer)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니 도서관장과 상의를 해본 다음 연락을 준다고 했다. 똑같은 제목의 책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왠지 그 책이 바로 내가 찾는 책일 것 같은 느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가 준 방문 목록에 타쉔 서점은 빠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서가를 살펴본다. 이상하게(혹은 당연하게) 눈에 띄는 건 『Big Book of Breast』와 『Big Book of Penis』 같은 야한 책이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사진집을 내는 건지 궁금하지만 금기에 도전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타쉔 출판사가 부러울 뿐이다. 투쟁적인 급진주의는 대중에게 외면 받기 쉬운 걸 타쉔 출판사는 일찍이 깨우친 것 같다. 독자를 서서히 훈련시켜서 시각 예술에 대한 그 어떤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그 어떤 희한한 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 타쉔 서점의 정리 세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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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입구에 커다란 박스에 책이 가득하다. 무슨 일인지 보니, 매장에 있는 오래된 책을 정리하기 위해서 특별 세일을 하는 중이란다. 나는 책 세일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몇 권을 사고야 만다. 박스 안에 빠질 것 같이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결국 나를 위해 사는 건지, 그레이스를 위해 사는 건지 모를 세 권의 책을 건졌다.
| | | 1000 Pinup Girls | Havana Style | Pop 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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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0 Pinup Girls』
2. 『Havana Style』(Icon 시리즈)
3. 『Pop Art』(타쉔 25주년 기념 시리즈)
집에 돌아와 보니 컴퓨터가 켜져 있다. 보통 꺼 놓고 밖으로 나가는데, 깜빡했나보다. 메신저가 자리 비움 상태가 되어 있었고,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다. 지금은 오프라인 상태지만 딱, 한 줄의 메시지가 보란 듯이 떠 있다.
‘책 따위가 사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녀가 화낼 만도 하다. 한 달이면 돌아오겠다는 남자가 반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메신저도 잘 접속하지 않는다. 같은 집에 정체불명의 여자까지 있는 걸 알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이건 뭐지? 메신저 창에는 내가 한 말도 보인다.
‘내가 쓴 책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중요하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고.’
이건 분명 내가 타이핑한 것이 아니다. 그레이스 윤이 친 것이다. 이 말에 여자친구는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분명 컴퓨터를 끄고 갔다. 아차, 나는 내 그림 폴더를 뒤적거린다. 이런, 전날 밤에 찍어 두었던 내 소설의 원고 사진을 저장해 뒀다. 불길한 예감대로, 그 사진들은 죄다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저녁 일곱 시니까 한국은 오전 다섯 시다. 너무 이를까? 나는 헤드셋을 쓰고,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를 구동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통화한 것이 한 달은 넘은 것 같았다. 문득, 지독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기도 하다.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 taschen 내부 사진은 허락을 받고 taschen.com에서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