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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가까워서 더 잔인한 이름 - 시노다 세츠코의 『도피행』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가족의 소중함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내가 가족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비빌 언덕’이다. 세상 천지에 홀로 떨어져 있어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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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게 살벌할 때도 있지만 가족에게 둘러싸였는데도 고독한 건 더 살벌해요.”

아마도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공연을 같이 보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약속을 펑크 내는 바람에 급한 마음에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 설명을 하고, 시간이 임박해서 같이 갈 사람을 구할 수 없으니 네가 같이 가줘야겠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마침 동생도 일이 있어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알았다며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회사 동료가 깜짝 놀라며 한마디 하는 게 아닌가. 내 말투가 너무 무뚝뚝해서 자기랑 통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는 것이다. 그랬나 싶어 머쓱해질 찰나, 또 한 번 일격이 날아왔다. “게다가 너도 참, 곧이곧대로 전부 얘기할 건 또 뭐야? 기왕이면 동생한테 너랑 같이 공연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하면 더 좋았잖아.” 순간 뜨끔 했다. 아마 다른 사람한테 연락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가족이란 뭘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 그래서 서로 간에 가식이나 거짓이 없는 사이. 정상적인 가족 구성원이라면 무릇 그러하리라. 그러나 같은 집에 살고 한솥밥을 먹는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마냥 정겹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깝다고 생각해서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거나,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격식을 따지지 않는 것과 무례한 것은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안에서 그 두 가지는 종종 마구 뒤섞이곤 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바로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소외다. 그것은 무관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어떤 관계에서 받는 상처보다 훨씬 쓰라리게 느껴질 법하다. 소설 『도피행』의 주인공 ‘타에코’가 애완견 ‘포포’를 데리고 한밤중에 가출을 감행했을 때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과 두 딸들에게 그녀의 존재감이란 애완견 ‘포포’의 그것과 딱히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집을 떠나면서 타에코는 생각한다. 자신에겐 더 이상 가족도, 돌아갈 집도 없노라고.


“여기 그대로 둘 순 없어.”
어느 새 남편이 방으로 들어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 다른 사람에게 줄 거야?”
“아이를 죽인 개를 누가 데려가.”
“그럼…….”
타에코는 침을 삼켰다.
(중략)
남편은 이렇듯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 형제, 친척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희생시킨다. 이웃과 분쟁이 생기면 개를 처분해 끝내려고 한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소중히 여기던 것을 정작 사건이 터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내 버리는 사람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극히 우발적이었다. 애완견 포포를 데리고 여느 때처럼 산책을 나갔던 타에코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포포가 옆집 아이를 물었던 것이다. 사실 원인 제공을 한 건 그 아이였다. 포포의 눈앞에서 딱총을 터뜨려 개를 패닉 상태에 빠뜨렸던 것. 하지만 과다출혈로 아이가 숨지면서 사건이 커져버렸다. 애교 많던 순둥이 골든 레트리버가 하루아침에 아이를 물어 죽인 무시무시한 살인견으로 낙인찍히면서, 보건소에 끌려가 안락사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포포는 타에코에게 보통 애완견이 아니었다. 올해로 쉰 살이 된 그녀에게 9살짜리 노견 포포는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이자, 자식처럼 위안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여자로서는 이미 끝났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야멸찬 남편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들에게 마음을 다칠 때마다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이 듬직한 골든 레트리버였다. 다른 가족들이 포포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포포가 보건소로 끌려가기 전날 밤, 타에코는 포포와 함께 조용히 집을 나선다. 이렇게 해서 중년 여자와 늙은 개 한 마리의 도피행이 시작된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도, 되돌아갈 장소도 없는 무모하고 쓸쓸한 도피행…….

“말씀해 주세요. 왜 도망친 겁니까? 애견과 도피한 주부의 마음속에 있는 건 뭡니까? 이렇게 적적한 곳에 개와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의 한 장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던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과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등 쟁쟁한 여배우들의 열연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 <디 아워스 The Hours>(2002).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사는 세 명의 여자와 그녀들의 하루를 교차편집을 통해 담담하게 보여준다. 1923년 런던 리치몬드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미국 LA 어느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 로라. 그리고 2001년 미국 뉴욕의 출판사 편집자 클래리사. 그녀들의 운명적인 하루가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대외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캐릭터는 단연 버지니아 울프였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주목했던 인물은 로라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은 항상 다정하고 어린 아들은 사랑스러우며, 곧 둘째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자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로라는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난다. 그녀는 왜 떠난 것일까?

당시 이 영화를 봤던 몇몇 지인들―그들의 성별은 남자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그 여자들은 뭐가 부족해서 자살을 시도하고 가출을 감행하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이다. 나는 왠지 그녀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걸 꼭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몇 년 전 독일 만하임 국립극단의 내한공연으로 <오델로, 베니스의 무어인>이라는 연극을 봤을 때의 일이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과 대화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주인공 ‘오델로’ 역을 맡았던 백인 배우에게 “당신은 흑인이 아닌데, 흑인인 오델로의 심정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데, 당시 주연배우였던 올리브 베슬러는 이런 답을 했다. ‘나는 오델로 연기를 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상상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상상 속에서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연극에서는 생쥐 역할도 해봤다’며 그는 웃었다.

예술 작품을 탐독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묘미는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남들 눈에는 행복해 보이기만 한 로라의 일상이, 정작 그녀에게는 숨 막히는 감옥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멀리, 어딘가에 영혼의 안식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은 또 하나의 족쇄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누가 로라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삶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른 것을. 처음에 타에코의 상황은 로라와 대척점에 있었다. 타에코에게 가족은 인생의 전부였고,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온 것은 철저한 소외감과 배신감뿐이었다. 하여, 집을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침묵을 지킨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미 돌아갈 집 따위는 없다는 것을. 개를 데리고 집을 나오는 순간 타에코가 느꼈던 절망감 또한 아무도 알 수 없었으리라.

『도피행』은 일종의 로드무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도피 여행 중에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만남과 극적인 사건·사고들, 그리고 가슴 졸이는 위기와 반전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단, 로맨스만 빼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개와 인간 사이의 끈끈한 정이다. 이제는 본래의 다갈색 털보다 백발이 더 많아진 노견 포포는 단 한 순간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주인을 향한 늙은 개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충성심은 사뭇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결국 타에코와 포포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인적이 드문 숲 속 마을에 정착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소비만으로 살아가는 지?히 검소한 삶 속에서, 타에코는 비로소 ‘영혼의 영역’이 안겨주는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앞으로 이 늙은 개는 여러 가지 병에 걸리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죽음에 다가갈 것이다. 포포를 저 세상으로 배웅한 후의 일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타에코는 행복한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개의 치렁치렁한 털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되어 다행이었다. 늙은 개의 남은 생을 돌보기 위해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버렸으니까.

결말은 쓸쓸하다. 한밤중에 피를 쏟고 응급실로 실려간 타에코. 이웃에 사는 도예가 쓰쓰미가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자, 그녀의 남편과 두 딸들이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다지 동요하지 않고 너무도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타에코 남편의 행동을 보고 쓰쓰미는 ‘그의 침울한 표정 깊은 곳에 어딘지 모르게 싸늘하게 깨어난 기운’을 느낀다. 결국 타에코의 죽음도 가족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당장은 슬프고 비통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 잊고 지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 타에코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것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위로를 안겨준 것도, 피를 쏟으며 의식을 잃은 그녀를 구한 것도 그 개였다. 인간과 개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감정을, 정작 가장 친밀하게 지내야 할 가족들 사이에서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타에코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가족의 소중함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내가 가족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비빌 언덕’이다. 세상 천지에 홀로 떨어져 있어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런 점에서 가족들이 남보다 못하게 느껴질 때, 그것만큼 서운한 일도 없는 것 같다. 혹시 가깝다는 이유로 때론 무신경하고 때론 잔인하게 굴지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인간의 삶이 유한한 만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 역시 의외로 짧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장면을 소개한다. 진짜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20분 후 빨간 불을 번쩍이며 구급차가 도착했다. 타에코와 함께 구급차에 올라탄 쓰쓰미는 출발하는 구급차 뒤를 미친 듯이 쫓아오는 포포를 발견했다.
“오지 마. 바로 돌아올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목청껏 외쳤다. 귀를 펄럭이며 바람을 가르고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하늘을 나는 영묘한 동물 같아서 노견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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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저/<김성은> 역9,000원(10% + 5%)

나오키상과 야마모토 슈고로상 등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 시노다 세츠코의 장편소설 『도피행』. 가족을 떠나 애완견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내린 한 가정주부의 도피행을 그린 소설로, 작가는 고독하지만 절대 고독하지만은 않은 주인공 타에코의 인생을 섬세한 내면 묘사와 빠른 스토리 진행으로 이끌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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