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사랑의 고백, “히스클리프는 나야.” - 『폭풍의 언덕』
이 부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히스클리프는 나야.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말의 힘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고백과 자기 선언이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었더니 내 나이 열다섯에 내가 너무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오로지 히스클리프가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힘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기 때문에 막상 히스클리프가 죽어버리자 큰일을 치른 사람처럼 허탈했었다. 한 가지 유별나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충동적으로 마루의 선반 밑에 있던 오래된 포도주 통에 손을 깊숙이 넣어 바닥에 깔려있던 포도 알맹이 하나를 꺼내 들여다보던 거다. 그때 그 포도 모양은 기이하게도 일그러지지도 쪼그라들지도 않고 얼마나 완전한 형상을 갖고 있었던지. 어스름 불빛 아래 완벽한 구.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히스클리프가 죽으면서 완전한 형상을 띈 뭔가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그에게서 언젠가는 뭔가를 물려받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늙어버렸다고 생각해서 비통했다.
모든 소설은 저마다 어떤 이상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는 말. 나는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를 만나면 꼭 그 말부터 물어보고 싶다. 그녀의 이상은 내 맘 속의 생각과 일치할 것인지?
『폭풍의 언덕』의 첫 장면은 그 배경지인 영국 요크셔의 워더링 하이츠와 불멸의 두 주인공 히스클리프, 캐서린을 모두 보여준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한 나그네가 추위에 떨며 문을 열고 들어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청한다. 집주인은 몹시 거만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건장한 체격의 거친 남자인데 그는 옆에 있던 개를 한번 발로 걷어차 버리고는 마지못해 나그네에게 방 한 칸을 내준다. 잠을 자려던 나그네는 한밤에 창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깬다. 그리고 바람결에 여자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릴 듣는다. 그 목소리는 저 황량한 벌판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나 좀 들어가게 해 줘. 이십 년 동안이에요. 이십 년 동안 떠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겁에 질린 나그네는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다가 여자의 섬뜩한 손에 붙잡힌다. 그는 여자의 손을 물어뜯어 떼버리고는 공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 소리를 들은 주인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창백한 낯빛으로 창을 비틀어 열고 흐느낀다.
“들어와, 들어와, 제발 들어와. 한 번만 더. 그리운 그대,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그리고 주인은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절망감에 울부짖는다. 무엇이 유령을 호출했던가?
이것이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첫 시작 부분이고 193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영화 <폭풍의 언덕>의 첫 장면이다.
어쩌면 쓰라린 사랑을 겪어낸 뒤에야만 히스클리프의 『폭풍의 언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풍의 언덕』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기괴하고 의도적으로 잔인한데도 묘한 자기만의 윤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최고의 장면은 캐서린이 옆 마을의 에드가 린턴이란 부드럽고 선량한 부유한 신사에게 청혼을 받고 하녀이자 말벗인 넬리와 대화를 하는 부분이다.
넬리는 캐서린에게 왜 에드가와 결혼하려 하느냐고 물어본다. 캐서린은, 그이는 잘생기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젊고 명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재산을 많이 물려 받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 자신은 근방에서 제일가는 부인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결혼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넬리는 캐서린이 린턴 부인이 되면 히스클리프를 잃게 될 건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캐서린은 오빠가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자신이 에드가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라며, 히스클리프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어.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도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이 부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히스클리프는 나야.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말의 힘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고백과 자기 선언이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고백은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고 감정과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고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랑 자체보다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을, 에밀리 브론테는 캐서린의 입을 통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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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 저/<김종길> 역11,700원(10% + 5%)
『폭풍의 언덕』은 서른 살의 나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기 일 년 전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무대로 벌어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를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을 당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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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완전 영화화!!/주연: 멜 오베른, 로렌스 올리비에/전체이용가/10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