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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난 곳 - 프린티드 매터 Printed Matter Inc.
그녀의 이름은 그레이스 윤. 돌이켜 보니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나이는 정확히 몇 살인지, 언제 미국으로 건너 왔는지, 정확하게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 놨어야 했다.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 Inc.)를 서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보통 서점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예술가들의 한정판 도서, 작품집, 시디, 잡지, 포스터 등을 판다. 뉴욕에 갤러리가 밀집한 지역인 챌시에 있는 서점답다. 나는 분홍색 A4지에 검은 사인펜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을 3달러에 살 것인지 안 살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제발 하나 사요.”
한국어로 누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 오랜만이라 고개를 들었다. 뒤로 묶은 까만 머리에 검은 뿔테, 헐거운 카키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제가 그린 것이거든요. 100장 한정 판매인데 96장 남았어요.”
“그럼 앞의 네 장은 누가 산 거죠?“
“저의 진정한 친구들이죠.”
“이걸 사면 저도 포함이 될까요?”
“물론이죠, 사인도 해드릴게요. 계산하고 나서 밖에서 봐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한 장을 사야 했다. 펜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은 나무였다. 잎이 무성하게 달려 있는 커다란 나무에 그네도 달려 있다. 그런데 그네 아래에는 사람이 빠져 죽기 딱 좋은 우물이 그려져 있었다.
프린티드 매터는 예술가들이 만든 출판물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2년에 만들어진 비영리 재단이다. 종이 출판물을 또 다른 예술의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심사를 거쳐 작가들의 소규모 출판물을 구입하고 있다. 뉴욕시와 기업에서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원래는 뉴욕의 트라이베카 지역에 있었다가 1989년에는 소호로, 2001년에는 챌시로 옮겨 왔다. 이는 뉴욕의 예술가들과 갤러리들이 싼 임대료를 찾아 움직인 경로와 일치한다. 예술인들은 이제 맨하탄에서 도저히 생활할 곳을 찾지 못해 브루클린의 윌리엄즈 버그 등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서점을 나오니 그레이스는 벽에 기대 담배를 피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종이를 건넨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뒷장에다 뭔가를 열심히 그린다. 마치고 보니 동그란 원에 눈, 코, 입이 달린 웃긴 남자다.
“당신 초상화예요. 잘 간직하라구요. 앤디 워홀이 휴지에 그려준 그림을 쓰레기통에 버린 바보 같은 바텐더를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한다. 나는 책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고, 그레이스는 미술대학을 그만두고 맨하탄을 방황한다. 나는 막힌 소설을 해결할 마법의 책을 찾고 있고, 그레이스는 영감을 줄 시각적 충격을 찾고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반즈 앤 노블 같은 대형 서점에서는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그런 곳이라면 50달러면 번쩍거리는 올컬러 화보를 살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10달러짜리 펑크 매거진을 다섯 개나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쪽이 찾고 있는 책이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192 북스라면 모를까.”
처음 들어본 서점이다.
“함께 가 주실래요? 친구로서 부탁하는 겁니다.”
그레이스는 나를 보며 살짝 웃는다.
“좋아요, 친구로서 도와드리죠.”
| Printed Matter Inc. 195 10th Avenue / printedmatter.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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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헤어진 곳 - 192 Books
챌시를 누구와 함께 걸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전시를 보러 오지만 누군가와 함께 오는 건 처음이었다. 챌시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걸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런데 갑자기 낯선 사람과 함께 걷고 있으니, 내가 무척이나 외로웠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이 스치는 감촉이 좋았다. 손을 잡고 싶을 충동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먼 거리를 함께 걷고 싶지만 192 북스는 프린티드 매터에서 길 건너 50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왜 192 북스인지 알겠죠?”
“아…… 아뇨.”
“바보, 여기 주소예요. 192번지 10번가.”
192 북스는 쇼윈도 두 개가 전부인 직사각형 모양으로 마치 성냥갑을 연상케 했다.
“작은 구멍가게 같지만 있을 책은 다 있다구요. 갤러리에 올 때면 꼭 들르는 서점이에요.”
“반대편 거리로 몇 번은 지나쳤는데 이곳에 서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 벽의 서가에 ‘You Are Alone Slow Down’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사실 저것도 작품이에요. 매번 올 때마다 다른 작품이 걸려 있어요. 예술이란 게 사실 별거 없거든요.”
그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After Dark(어둠의 저편)』가 나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예전에는 하루키 책도 많이 읽었는데…… 영어로 나오니까 좀 이상한 것 있죠. 눈이 핑핑 돌아가서 못 읽겠어요.”
그레이스는 서점 직원과 인사를 하고, 엄마와 함께 온 아이에게도 말을 건넨다. 그리고 핑크색 형광 종이를 꺼내 아이의 얼굴을 그려준다. 이런 식이라면 뉴욕의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찾고 있는 책이 있으신가요.”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원래는 이것이 정상이지만 대형 서점에서는 손님이 직원을 찾아 다녀야 한다. 이곳을 가끔씩 지나다녔지만 처음 와봤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2003년에 문을 열었어요. 뉴욕 시민 모두에게 잘 알려진 서점은 아니겠지만, 챌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죠. 다음 주에 작가와의 행사도 하니까 오세요.”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 어떻게 행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따로 세미나실이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걱정 말아요. 중간에 있는 테이블을 치우고 간이 의자를 놓으면 아늑한 자리가 만들어져요.”
과거 작가 이벤트를 보니 살만 루디쉬, 에이미 헴펠, 에드먼드 화이트 등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죄다 다녀갔다. 이렇게 아담한 서점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과의 낭독회는 무척이나 친밀했을 것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After Dark』를 집어들고 계산을 했다. 물론 그레이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사라지고 없다. 서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싶어서 가게를 뛰쳐나왔지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날 192 북스와 프린티드 매터 서점을 몇 번 왕복했는지 모른다. 그릷이스 윤은 낯선 사람에게 엉터리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거나 192 북스에서 자신의 미술품을 팔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두 서점과 그 사이 어느 곳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 192 Books 192 10th Ave. / www.192book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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