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말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러다가 4시가 되면, 나는 이미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하게 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잖아.”
이 아름다운 장면의 악몽 버전은 다음과 같다.
다음날 오후 4시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3시 59분이 되면 내게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온갖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숨쉬기가 힘들고 식은땀이 났다. 영락없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닌가.
4시 정각이 되면 나는 너무나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꽤 오래 전 일이다. 국립극장에 아베고보의 <친구들>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었다. 당시 인기 절정의 TV 드라마로 주목받던 신인 배우 김석훈이 주인공을 맡아 나름 화제가 됐던 작품이었다. 원래는 잘생긴 배우의 실물을 감상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무대였는데, 작품을 보는 내내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다가 급기야 연극이 끝날 무렵에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됐던 기억이 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날 혼자 사는 한 평범한 남자의 집에 한 가족으로 구성된 낯선 사람들이 방문한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살갑게 굴며 그의 집을 완전히 점령해 버린다. 경찰을 불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명백한 피해 증거도 없는 데다 그들이 마치 집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것이다. 결국 남자 주인공만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그 연극을 생각하면 당시 느꼈던 충격과 무언가 어금니 안쪽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은 것 같은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를 읽으면서 어느 새 나는 잊고 있었던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밀은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은퇴 후, 그는 사랑하는 아내 쥘리에트와 함께 한적한 시골에 정착한다. 그곳은 마을과 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숲 속의 집이었다. 주변에 다른 집이라고는 딱 한 곳뿐이었는데, 시냇가 건너편의 그 집에는 의사가 산다고 했다. 호젓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꿈꾸던 그들 부부에게는 모든 조건이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기치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베르나르댕이라고 하오. 이웃집에 살고 있소.”
어느 날 오후 4시에 노부부의 집을 불쑥 방문한 이웃집 남자. 이것은 악몽의 서곡이었다.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그가 왔다.’ 너무나 당연한 의무를 수행하듯 그렇게 뻔뻔하고 당당하게. 그가 방문해서 하는 일이라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묵묵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죽치고 있다가 6시 정각에 돌아갔다. 그는 단답형 인간이었다.
“이제 눈이 그쳤군요. 다행입니다. 간밤에 눈이 내린 걸 보셨습니까?”
“그렇소.”
“겨울이면 언제나 그 정도로 눈이 옵니까?”
“아니오.”
“눈 때문에 때때로 길이 막히기도 하나요?”
“때로는.”
“쌓인 눈이 오래갑니까?”
“아니오.”
“아, 도로 관리과에서 바로 치우나 보죠?”
“그렇소.”
“잘됐군요.”
이 나이에 내가 1년이나 된 그 대화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의사가 너무나도 천천히 대답했기 때문이다. 나의 조급한 질문마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했던 것이다.
흔하진 않지만, 일상에서도 아주 가끔씩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전에 같이 일했던 작가는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녀는 우연히 엘리베이터에 어떤 남자와 단둘이 타게 됐는데, 그 남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서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대개 엘리베이터에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탈 경우, 각각 멀찍이 떨어져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상식’이다. 다행히 엘리베이터의 그 남자가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내리는 바람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넘어갔지만, 그 순간 그녀가 느꼈을 당혹감과 공포감은 대략 짐작이 가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규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앞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오후 네 시』에서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 역시 이웃집 남자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그들은 처음에 정상적인 사람을 대하듯 이야기를 걸어본다. 그러나 이 무례한 침입자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간간히 단답식 대답을 쥐어짜듯 뱉어 내거나, 주로 침묵할 뿐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타인이 곧 지옥’이라고 했던 사르트르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내칠 수도 없었다. 한평생 교편을 잡으며 교양 있는 삶을 살아왔던 에밀로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문전박대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 기묘한 방문자를 상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말도 안 되는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똑같이 침묵으로 맞대응을 해보기도 하고, 일부러 4시 10분 전에 산책을 나가버리기도 했다. 집 두 채만 달랑 있는 외진 숲 속에서 오직 ‘그들에게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댕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는 늘 4시에 와서 6시에 돌아갔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오히려 그 과정에서 에밀의 심리 변화가 흥미롭게 진행된다. 당혹감, 불쾌감을 동반한 불편함, 관찰, 회피, 두려움, 피학적 쾌감, 자포자기, 분노, 감정의 폭발, 불안, 연민, 고뇌, 자아분열, 그리고 새로운 자각과 함께 찾아온 담담함. 이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하게 65년을 살아온 한 남자의 마음속을 헤집고 지나간 감정들이었다. 불과 6개월 사이에 말이다. 예기치 못한 침입자를 맞이하면서 에밀의 고뇌는 넓고도 깊어진다.
그가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그의 침묵이 그토록 숨막히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침체되고 기름진 절망 속에는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스는 팽창, 탄력, 압축, 억압의 특성을 갖고 있다.> 바로 악의 특성이 아닌가. 베르나르댕 씨는 악이 아니라, 불길한 가스가 깃들여 있는 거대한 공허였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러 시간을 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에 그를 비활동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나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는 인간 유형이 아닌가. 처음에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을 떠올렸다. 하지만 베르나르댕에게는 트라우마조차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말미에 에밀의 도발적인 제안을 듣고 그가 터뜨린 웃음은 너무나 그로테스크하면서 동시에 견딜 수 없이 슬프게 느껴진다. 결국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한평생 교양과 예의를 실천하며 살아왔던 한 인간의 어두운 자아가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이 종결되었던 것이다. 베르나르댕의 끊임없는 침입―정신적인 것을 포함해서―을 영원히 막아버린 이후, 에밀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두 달 전 ?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 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아멜리 노통브.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도무지 다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성, 그 조마조마하고 감질 나는 재미야말로, 노통브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인생에 대한, 인간 존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번뜩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쥘리에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한 행동은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온 거야. 인간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아가지.” 그러자 에밀이 반박한다. “당신 말이 맞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걸.”
『오후 네 시』를 읽으며, 줄곧 나는 내 자신을 정의해 보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부질없는 행위임을 새삼 깨달았다. 한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본질이라는 것은 참으로 가변적이고 애매한 것이어서, 명확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혹은 예기치 못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변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는 어느 책의 제목을 빌려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과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렇게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를, 모순덩어리인 나를, 감히 정의내릴 수 없는 나를 그저 보듬고 인정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