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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영웅 - 미 대륙 뉴욕

어제 나는 영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늘도 영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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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까지 더 많은 영웅들이 내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

2002년에 뉴욕을 처음 보았을 때, 좀 더 정확히는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여기가 바로 뉴욕이구나….”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도시에 온 것만 같았다. 현란한 광고들이 건물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고,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걸어 다녔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황홀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뉴욕에 왔다. 이번에는 예전만큼 환상적이고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에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려오다가 뉴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도로를 꽉 메운 차들과 씨름해야 했다. 이런 도로에서는 다른 차들이 뒤꽁무니로 내뿜는 매연을 그대로 다 마셔야 했다. 빵! 빵! 약간이라도 틈을 보일라치면 여지없이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여기가 뉴욕이구나….” 나는 4년 전에 했던 말을 정반대의 의미로 되뇌었다.


고생 끝에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컬럼비아 대학 맞은편에 있는 허름한 한인 교회였다. 뉴욕 흥사단 단우이신 장철우 목사님께서 우리의 여행 경비가 부족한 것을 아시고는 교회 4층에서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날 목사님과는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새벽부터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방금 전 약속이 있어 외출하셨다고 했다.

모터사이클에서 짐을 내리는 사이에 한 외국인이 다가와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한 마음에 다가갔더니 그는 자신이 짐 로저스의 친구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했다. 뭐, 짐 로저스? 설마 월 스트리트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그 남자? 짐 로저스는 투자를 할 때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 것으로 유명하며, 퀀텀 펀드에서 일하다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은퇴하고 모터사이클로 전 세계를 일주한 것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현재는 콜롬비아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고, 각종 언론 매체에서 글도 쓰고 있다. 그의 모터사이클 여행기 책은 전 세계적으로 많이 팔렸는데, 일단 나같이 무식한 녀석도 읽어봤다면 정말 유명한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막상 그 사람이 이렇게 가깝게 있을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짐 로저스의 번호를 주면서 자기가 오늘 전화를 해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여장을 풀고 잠깐 쉬는 사이에 전화가 왔다. “Hello? This is Jim Rogers(안녕하세요, 짐 로저스입니다).” 세상에, 신이여. 정말 짐 로저스였다. 그는 친구에게 우리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말을 했다. 오늘 시간이 있으시면 저녁이라도… 그는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108가의 오닐스 바에서 만나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나는 방방 날뛰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라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시큰둥하게 쳐다보는 상균 형에게 “형, 형, 형! 짐 로저스란 말이야! 짐 로저스!”라고 소리치면서.

남자 다섯이서 다니다 보니 여행 내내 외모엔 신경도 쓰지 않던 내가 오랜만에 면도도 하고, 로션도 바르고, 샴푸로 머리도 감았다. 그런데 빨래가 밀려 있어 매일 입던 옷을 또 입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뭐, 그래도 좋다. 짐 로저스는 내가 모터사이클을 타기 시작한 이후로 줄곧 나의 영웅이었고, 오늘은 나의 영웅 접견일이다. 미국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 수도 있는 날인 것이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서 바 앞에서 기다리는 사이에 멀리서 짐 로저스가 보였다. 그도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젊어 보였고 상류층 특유의 세련됨이 풍겨 나왔다. 이런 게 뉴요커인가 싶었다. 그는 우리 바이크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짐 로저스는 미리 150불을 척 하니 계산한 다음,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으라고 했다. 내내 시큰둥하던 상균 형도 그가 지갑을 꺼내는 순간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또 우리가 유럽에 가면 모터사이클 보험을 들어서 그린패스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등 이제껏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도 실질적인 조언들을 많이 해주었다. 헤어질 때가 되자 자신이 쓴 유명한 책 『인베스트먼트 바이커Investment Biker』를 선물하며 자필로 ‘Dokdo is Korea(독도는 한국)’라는 사인도 해주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상하게도 허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져서 느릿느릿 모터사이클을 모는 나의 모습에 친구들은 “제일 좋아하던 녀석이 왜 그러냐?”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글쎄, 나도 알 수가 없다. 아마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 게다. 정원 한가운데 피어 있는 신비한 꽃을 뚝 꺾어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은 나랑 같이 하지.”

직접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목사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다. 오늘은 어디로 가게 될까? 이틀 연이어 제대로 밥을 먹겠구나. 하지만 식사 장소는 교회의 지하실이었다. 아마 직접 밥을 지어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듯했다. 조금은 김이 빠졌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드디어 저녁이 되었다. 음식은 단출하지만 정갈했다. 목사님은 식사 내내 말이 없으시다가 차츰 분위기가 풀리자 우리가 묵고 있는 교회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지하실에 보이는 피아노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께서 치시던 것이며, 우리가 자는 4층 방에는 서재필 선생님,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도산 안창호 선생님 등 많은 애국지사가 머물렀다고 하셨다. “그 방에서 문교부 장관이 네 명 나왔으니 자네들 중에서도 분명 큰 인물이 나올 거야.” 그 말에 다들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허름한 교회의 외관만을 보고서 이곳을 무시하고 있었다. 세면실은 중간에 물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만큼 낡아 있었고, 방에는 바깥바람이 그냥 들어왔다. 거기다 하필이면 4층 방을 주셔서 오르내리기 너무 힘들다고 툴툴대기도 했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4층 방에 우리를 재우시며 우리 또한 그런 큰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도 사실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저녁을 먹으러 들어왔다. 하지만 목사님의 첫마디는 “왜 늦었느냐?”가 아니라 “차린 게 마땅히 없네. 와서 먹자구나”였다. 그 생각에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사님의 그 따뜻한 한마디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세계를 일주한 패기 넘치고 유능한 짐 로저스뿐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목사님 또한 나의 이상이 되어야 할 분이었다. 어제 저녁 돌아오는 길에 가슴 한편이 허전했던 것은 짐 로저스에게 부족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나는 영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늘도 영웅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마 지금까지 더 많은 영웅들이 내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철이 없고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을 뿐.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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