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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인문학적 유물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그 근대와 근대 이후의 사고가 전환되는 지점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어찌 보면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시각이 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인문학적 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이 책의 의미는 그래서 지대합니다.
일요일 낮쯤에나 볼 수 있는 지구촌 오지 탐험기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이른바 ‘세계화된 시민사회’라는 표준스러운 세상에서 사는 우리와는 남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다양한 가치관들이 포개어져 있습니다. 너무나 미개하고 힘들어 보여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 저런 삶도 있구나.’ 하면서 동경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복잡한 시각에는 몇 가지 사조가 버무려져 있습니다. 이성의 발흥 이후 서구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중심이 되었던 시각에는 이성과 합리가 그 외의 존재에게 ‘야만’ ‘미개’의 호칭을 붙이고 그들을 ‘개발’ ‘선교’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은 최근 들어서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대세를 타면서 오히려 더 배울 점이 많은 문명의 새로운 양식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그 근대와 근대 이후의 사고가 전환되는 지점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어찌 보면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시각이 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인문학적 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이 책의 의미는 그래서 지대합니다.
프랑스어로 ‘금요일’을 지칭하는 방드르디Vendredi는 1719년 첫 출간된 다니엘 디포의 모험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어 쓴 소설로, 1967년에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쓴 작품입니다. 같은 로빈슨 크루소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제목이 바뀐 이유는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에 두는 비중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에서 흑인 노예 ‘프라이데이’는 단순한 몸종 수준에 머무르지만,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의 보조자적인 인물로만 머무르지 않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비록 원작 자체가 완독된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일대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영국인이 갑작스런 난파 사고로 인해 무인도에 고립되고, 그 속에서 온갖 외로움과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구조되는 이 이야기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도 익숙한 스토리입니다.
18세기, 산업혁명과 금융 발전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던 영국에서는 대중문학이라는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중세에 그저 구전이나 음유시인bard의 노래로만 전달되던 이야기들이 대량 출판의 힘을 빌려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중세에 비해 세상을 보는 방식과 먹고사는 방식이 명확해지면서 사람들은 환상과 꿈에서 보다 멀어졌고,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대중문학, 특히 모험소설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모험소설류는 주인공이 미지의 세계에 갑자기 떨어져서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온갖 괴물과 원주민의 위협을 이겨내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의 판타지나 신무협류도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그런 모험소설의 인기 속에 가장 두드러진 흥행을 거두었던 것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였습니다.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은 일전의 『파리대왕』 리뷰(「도구적 이성의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는 배경, 사회에 대해 새로운 사고의 실험을 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합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무인도라는 배경에 떨어진 어느 유럽인이 그간 본토에서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불, 농경, 저장, 도구 등―을 다시 일으키는 모습은 분명 흥미로운 읽을거리로서의 요소입니다.
바로 이 지점을 20세기의 저자 미셸 투르니에는 뒤집어 생각합니다. 18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계몽과 질서, 서구 중심의 세계관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시각을 맞이합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다니엘 디포에게 정면으로 묻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면 좋은 거야?”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은 다릅니다. 똑같이 난파되어 섬에 고립되고, 유럽인인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한번 유럽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섬에서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그가 일궈 놓은 서구 문명의 생활양식은 곧 변화를 맞는데, 바로 또 다른 섬의 인간 방드르디 때문입니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에서 단순히 크루소의 노예 역할에만 충실했던 방드르디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선 매우 주체적인 역할을 맡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애써 일궈 놓은 논밭을 오리를 살리겠다며 망쳐 놓고, 간신히 저장해 둔 창고는 담배를 피운다고 하다가 폭파시켜 버리기까지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혼자서 이 섬의 총독 역할을 자임하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방드르디는 깔깔깔 폭소를 터뜨리곤 합니다.
주인공 옆의 조연으로서 존재하는 흑인 한 사람 방드르디, 혹은 프라이데이의 존재 가치가 달라지면서 두 소설은 확연하게 다른 길을 걷습니다.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 옆에서 별다른 의견 표출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몸종의 역할로서 주종 관계를 이루는 동안,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와 그가 만든 문명을 송두리째 흔들고 바꿉니다. 야만인으로 취급하던 방드르디의 삶을 로빈슨 크루소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굳이 영국에서 자신이 누려오던 삶의 방식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방드르디의 출현 이전까지 로빈슨 크루소에게 자연은 개척해야 할 대상이었고, 반드시 지배해야 할 상대였습니다. 그냥 자라는 작물에 만족하지 못한 로빈슨 크루소는 경작이란 방식을 동원해 저장할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을 생산해 내야 했고, 이를 보관할 창고가 필요했으며,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도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 그는 시간을 쓰는 법을 제정하고 스스로 지켜나갔습니다. 심지어는 조금 더 오버해서 단지 로빈슨 혼자뿐인 섬 시절에도 혼자 위계질서를 만들고 스스로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로빈슨은 ‘문명이 삶에 필수적이다’라는 가치를 ‘꼭 그것이 서구 문명이 아니어도 된다’로 전환합니다. 방드르디의 삶, 굳이 서구식의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지 않아도 자연이 제공하는 그대로의 무언가에 스스로를 맞추는 법을 깨달은 그는 오히려 그런 자연과의 일치에 적응하기 시작하며, 마침내 구조의 손길이 닿은 순간 로빈슨은 무인도에서 혼자 총독 놀이까지 했던 씁쓸한 문명에의 길들음을 구조차 온 선원들에게서 발견하고는 고개를 내젓습니다. 당혹스럽게도 구조선을 타고 문명세계로 나가는 것은 방드르디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피쿼드 호 같은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니엘 디포와 미셸 투르니에, 약 200여 년의 시간차 이상으로 두 사람이 서 있는 인식의 근본은 큰 차이를 가집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니엘 디포는 한참 유럽의 세계 진출이라는 큰 경제적 번영 속에 융성했던 금융업에 관련되었던 사람입니다. 유명한 영란은행 사우스시 버블 사건에도 깊숙한 개입을 가진 바 있는 디포는 그래서 제국주의적 확장과 그를 통한 부의 창출과 같은 초기 자본주의에 상당한 경도를 보이는 인물입니다. 그런 디포가 묘사하는 ‘다른 세계’는 말 그대로 정복해야 하고 정복을 통해 새로운 부를 끌어들여 올 타자로서만 존재합니다.
반면 미셸 투르니에는 프랑스에서 철학 교수를 지망했던 사람입니다. 소설이 발표된 1967년은 아시다시피 서구 문명의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던 시점이었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으로 높은 심급의 이슈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제자였고, 들뢰즈와 절친하게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으며, 그런 그가 18세기 확장주의자가 쓴 모험소설을 읽으며 했을 다른 생각은 결국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라는 소설을 내놓습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축적해 온 경험과 지식, 사고는 사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과학과 합리의 시대라고 불렸던 근대 초기는 그러나 서구가 비서구를 미개인으로 취급했던 전력이 있었고, 그 과학이 더욱 발달한 21세기에도 아직까지 중세 수준의 신념 속에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층층이 쌓여 온 다양한 시각과 경험이 섞인 상태에서 교육을 받아 온 21세기의 우리들은 TV에서 보는 오지의 원주민들을 보며 별별 생각들을 다 합니다. 그리고 미개인 또는 다른 삶으로서의 인류를 바라보는 이 전혀 다른 두 시각의 공존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그 시각차는 당장 동아시아 변방의 조그만 반도국가로서의 스스로를 바라보는 한반도 시민들이 갖는 자기 비하와 민족 자긍심의 병존으로도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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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셸 투르니에> 저/<김화영> 역11,700원(10% + 5%)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의 대표작 자연이 문화를 지배하고 원시성이 문명을 극복하는 ‘새로운 신화’ 고유의 서사 방식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은 패러디 문학의 걸작 “절벽을 굽어보는 바위에 몸을 의지한 채 서로 몸을 부둥켜안은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곧 있는 그대로의 원소들이 서로 혼연일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