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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유혹, 잠의 비밀을 파헤치다 - 빌 헤이스의 『불면증과의 동침: 어느 불면증 환자의 기억』

이 책 속에서 그는 그 두 개의 키워드가 어떻게 씨줄날줄처럼 겯고틀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인생을 좌우했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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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피로 증후군은 6개월 이상, 어쩌면 평생 없어지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잠을 갈망하는 피곤한 체질로 뒤바뀐다 하더라도, 잠은 그 피곤을 줄여 주지 않는다.

“불면증이라니, 맙소사”

이것은 책 제목을 처음 보고 든 생각. 여행 중에는 물론이고 지하철 출퇴근길이건 편집실이건 등을 댈 수 있는 여건만 되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금세 잠드는 나에게 불면증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생소하게 들렸던 것이다. 하루 8시간 수면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데, 불면증이라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쫓아내며 밤새워 일을 해야 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대략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잠이 쏟아지는 순간이 아니라, 밤을 새고 난 다음 날의 상태에 더 가깝다. 마른 행주를 비틀어 짜는 것처럼 뇌를 통해 느껴지는 압박감, 온몸을 무겁게 내리 누르는 피로감, 뻑뻑하게 충혈된 눈을 통해 가끔씩 흐릿해지는 시계(視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감각 등. 수면을 갈망하는 피곤한 육체에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란 그런 식으로 찾아온다. 그건 결코 먹는 것 따위의 다른 방법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결핍이다. 오직 충분한 수면만이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수면 결핍의 상태로 평생을 지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빌 헤이스(Bill Hayes)
빌 헤이스. 달걀 껍질마냥 매끈한 민머리에 짧은 턱수염. 표지 사진 속에서 다소 쑥스럽다는 듯 웃고 있는 마른 체구의 이 남자는 현재 전업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평범한 듯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이미지에 ‘동성애자’와 ‘불면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알 수 없는 특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그 두 개의 키워드가 어떻게 씨줄날줄처럼 겯고틀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인생을 좌우했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코카콜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스포켄에서 코카콜라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 덕분에 집에는 늘 탄산음료가 넘쳐났다. 어쩌면 그 시절, 이미 불면증 환자로서 그의 운명이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당분과 카페인이 신경 화학 물질 구조를 변형시켜 지금의 예민하고 불안하기만 한 남자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지”, “그 물질이 지금까지도 밤중에 혈관 속을 흐르며 불면증을 키우게 되는 건 아닌지” 어른이 된 그는 종종 의심하곤 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헤이스의 아버지는 무뚝뚝한 성품을 가진 마초였다. 또한 그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였다. 그는 6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아들로 태어난 헤이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지만, 그것은 그대로 아들에게 짐이 되었다.

오전 1시 통금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와 내 방에 틀어박혀, 들릴까말까 한 소리로 레코드를 들으며 남은 밤을 지새웠다. 그런 날에는 아버지도 깨어 있을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은 슬프기도 하고, 동시에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있는 두 불면증 환자였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깊은 수면과 완전한 각성 사이의 중간지대. 뇌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육체는 깨어있는 상태. 몽유병은 수면과 관련된 불가사의한 증상 가운데 하나다. “몽유병 환자는 앞을 향해 수직으로 팔을 들어 올리는 진부한 좀비 같은 모습이라기보다는, 약간 부스스하고 멍하지만 마치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라고 헤이스는 적고 있다. 실제로 어린 시절 그는 몽유병을 경험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는 종종 집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지붕 위를 거닐고, 절벽을 기어오르고, 무서운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는” 등 모험을 하는 상상을 하곤 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몽유병은 지극히 평범했다. 그저 밤에 침대에서 일어나 집안을 걸어 다니거나 멍하니 서서 창밖을 응시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그를 조용히 침실로 데려가 눕히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 불가사의한 병은 그가 열 살 때, 원인도 모른 채 사라지고 말았다.

내 몽유병과 관련해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불가사의한 문제들이 조금 남아 있다. 섀넌은 내가 자면서 걸어 다닐 때 소리치며 중얼거렸다고 했다. 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침까지 참을 수 없었던 그 말은 뭘까? 내 진정한 의도를 알 길이 없다. 자면서 말로 표현했던 것보다도 표현하지 못한 것이 더 많았으리라. 말하지 못한 말들은 그렇게 뭉개지고 잊혀지거나 알람 소리가 울릴 때 사라지고 만다.

그의 사춘기 시절은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죄책감 때문에 그의 정신세계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의 부모가 받은 충격은 마치 “등 뒤에서 한번 박히면 절대 빠지지 않을 총알을 각각 한 방씩 쏜 것과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방황은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약의 힘을 빌려 잠을 청하면, 한밤중에 눈이 떠졌다. 그는 워크맨을 챙겨 머릿속이 울리도록 크게 음악을 들으며 잠든 도시를 새벽까지 배회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고독을 느끼면서. 스스로가 정상임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여자친구를 사귀었지만, 지독한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캠퍼스에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에도 그는 분개하며 사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자신의 기숙사 방문에 새겨진 ‘변태’라는 단어를 보고 무너져 내린다. 강력하게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조여 오는 아이러니. 그것은 떨쳐내고 싶은 악몽에 온통 사로잡히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헤이스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 또한 밀물처럼 들이닥친 ‘잠’ 때문이었다. 단핵 세포증, 이른바 ‘키스 병(kissing disease)'이라고 불리는 매혹적인 이름을 가진 병에 걸린 것이다. 어린 시절 몽유병이 그랬듯, 이 병도 예고 없이 들이닥쳐 그의 육체를 쓰러뜨렸다. 일종의 바이러스 감염증상인 단핵 세포증의 유일한 처방은 침대에서 쉬는 것. 온통 열에 시달리며 밤이건 낮이건 끊임없이 잠이 쏟아지는 상태에 빠진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은 배고픔, 갈증, 공포 등 모든 감정 상태를 넘어서는 강력한 무엇이었다. 그는 잠에 취해 이불 속에 파묻힌 채, 마치 시간이 멈추고 급기야 삶이 멈춘 것처럼 길고도 깊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해 여름의 잠은 그에게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학자들이 ‘과면증'이라 부르는 지나친 수면이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반응은 과면증의 반대인 불면증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매일 밤 4시간만 자면 된다고 자신했던 나폴레옹도 17번의 승리 후 처음으로 패배한 아스페른 전투 후에는 깊은 잠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36시간을 내리 잤다고 한다.

죽음처럼 깊은 잠을 내리 자고 난 후에도, 헤이스의 불면증은 치료되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된 후에도 그는 종종 수면제의 힘을 빌려 잠자리에 들었고, 위약 효과에 치를 떨며 밤중에 눈을 떴으며, 그렇게 잠이 깬 날이면 하염없이 창 너머 어두운 풍경을 응시하거나 집 안을 배회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에이즈에 걸린 애인의 병간호를 하면서 그의 수면 주기는 더욱 악화된다. 결국 작심하고 찾아간 수면장애 클리닉에서 헤이스는 자신의 병이 ‘불치병’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불면증은 당신의 심리적 기질의 일부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두통이나 체중 증가 성향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린 소년일 때 발전시켰을 법한 성향이라고 설명했다. 수면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스트레스, 불안, 우울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오는 다른 부작용들에서 나타나는 불안함의 징조였다. 불면증은 이런 마음들이, 무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 나는 시차나 불면증으로 인한 생체 시계의 변화에 비정상적으로 예민하다. 평생 동안 불면증이 나타났다 말았다 할 것이라며, 그는 “해결책은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책은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편안한 수면을 갈망하며 평생을 각성 상태로 살아온 한 인간의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잠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들이 총망라된 꽤 훌륭한 인문 교양서다. 자장가, 카페인 중독, 몽유병, 잠꼬대, 수면제, 시차 부적응, 맹인의 꿈, 꿈의 기억, 잠 바이러스, 치명성 가계 불면증……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한 이 키워드들은 잠과 연결된 비밀을 푸는 열쇠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사이사이 방대한 양의 정보들을 부려놓고 있다. 빌 헤이스 자신이 수면전문가가 아니기에, 그가 언급하고 있는 수면에 대한 지식들은 흥미진진하고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의 담백한 결말이 마음에 든다. 책의 뒤표지에는 ‘잠 못 이루는 불면증 환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말이 적혀 있지만, 사실 이 문구는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불면증은 불치병인 것이다. 그러나 불치병 선고를 받은 빌 헤이스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오히려 그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안도한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이건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의 기묘한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해결책이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을 바꿀 수 없기에, 빌 헤이스는 자신의 불면증을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그는 잠 못 이루는 밤, 창 밖에서 반짝이는 노란 불빛들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님에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남북 전쟁에 참전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의 첫 출전 용사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유명한 아버지의 고증조부 토마스도 포함된 오래된 헤이스 가문의 마지막 남자가 바로 나다. 아버지에겐 실망의 원천이겠지만,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를 갖지도, 가문 성씨를 물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서, 나는 우리의 불면증이 나와 함께 끝난다는 사실에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면증과의 동침 : 어느 불면증 환자의 기억
빌 헤이스 저/이지윤 역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06월

잠과 꿈이라는 소재에 천착하여 그 무지와 오해의 역사, 그리고 그것이 하나하나 과학의 힘으로 해명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과학 교양서. 그 자신이 불면증 환자이자 카페인 중독증 환자였던 저자는 이 책에서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던 밤, 읽은 책들, 고민했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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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과의 동침

<빌 헤이스> 저/<이지윤> 역16,200원(10% + 5%)

잠과 꿈이라는 소재에 천착하여 그 무지와 오해의 역사, 그리고 그것이 하나하나 과학의 힘으로 해명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과학 교양서. 그 자신이 불면증 환자이자 카페인 중독증 환자였던 저자는 이 책에서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던 밤, 읽은 책들, 고민했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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