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완보(北京緩步)-베이징을 천천히 거닐다
진지한 베이징 길잡이 세 권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중국 관련서가 다수 출간되었다. 이 중 올림픽 개최도시 베이징에 관한 책 세 권을 골라 읽는다. 넓게 비소설로 분류될 세 권의 좁은 장르는 각기 다르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중국 관련서가 다수 출간되었다. 이 중 올림픽 개최도시 베이징에 관한 책 세 권을 골라 읽는다. 넓게 비소설로 분류될 세 권의 좁은 장르는 각기 다르다. 중국의 땅이름과 사람이름에 대한 우리말 표기 방식이 책마다 다른 것도 눈에 띄는 차이점이랄 수 있다.
주융(祝勇)의 『베이징을 걷다-중국 800년 수도의 신비를 찾아』(김양수 옮김, 미래인, 2008)는 중국판 <역사스페셜>의 단행본 버전이다. “집필할 때에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보급판 서적처럼 되어버렸다”는 게 나처럼 중국문화에 무지한 독자에겐 천만다행인데, 관련사진의 시원한 배치는 더욱 다행스럽다.
중국문화 쪽에서 저술활동이 활발하다는 주융은, 2002년 중축선을 실마리로 북경 텔레비전이 제작하는 북경 800년 도읍사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한다. 그 후 그는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7.5킬로미터의 중축선에서 역사적 증거를 찾고, 많은 역사적 증인을 방문하고, 원고를 붙들고 씨름”한다.
『베이징을 걷다』의 핵심 열쇠말은 중축선이다. 이러한 측면은 ‘북경, 중축선 위의 도성(北京, 中軸線上的都城)’이라는 이 책의 원제목에도 반영돼 있다. 중축선은 말 그대로 가운데 축이 되는 선이다. “‘중국(中國)’의 ‘중(中)’이라는 한자는 고대 도시의 중축선(中軸線)에 대한 가장 뛰어난 형상적 표현이다.”
옛 중국의 도읍은 중심축을 기준으로 건설되었다. 또한 “북경성의 중심은 자금성이고, 자금성의 중심은 태화전이며, 태화전의 중심은 바로 황제의 옥좌다.” 청나라 때 북경에 와서 황제를 직접 알현하려던 외국의 어느 공사(公使)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예부의 관원은 그를 정양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여보내 스스로 무릎 꿇게 한다.
“그가 대청문(大淸門), 천보랑(千步廊)과 어도(御道)를 지나갈 때 천안문의 금색 겹처마 지붕과 진홍색 성루, 새하얀 섬돌의 난간, 석사자 화표(華表)가 거대한 창공을 배경으로 하여 마치 꿈에 본 장면처럼 그를 매료시켰다. 단문을 지나자 요(凹)자형의 오문은 동방 왕조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충만했고, 오문 뒤의 확 트인 태화전 광장에 이르자 리듬은 완만하게 변했다.
그리고 금수하가 구불구불 흐르는 걸 보자 천국에 온 것처럼 평온하고 심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태화전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은 궁전 내부 도로의 엄청난 스케일이 그의 몸을 감당할 수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축선상에 드러난 왕(王)의 기운이 그를 정복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북경성의 구조물을 찍은 예전 사진들은 마치 거대한 미니어처와 디오라마를 떠올린다. 1916년 무렵 정양문 성루 남면의 전경이 특히 그렇다(54-55쪽). 약간 비껴 찍은 “고궁의 오문 및 오문광장의 설경”(31쪽)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주융은 “견고하면서도 빈약한 오래된 도시”의 역사적 갈등을 이렇게 함축한다.
“건설 당시의 의도와 현재 사용하는 데에서 여러 가지 모순이 드러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고대 도성과 현대 도시의 성질과 기능상의 대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야말로 북경이라는 3000년 된 도시, 800년 된 도읍의 역사가 갖는 곤혹스러움의 진정한 원천이다.”
북경의 과거와 현재를 네 계절에 담은 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조관희 교수의 『세계의 수도 베이징』(창비, 2008)은 ‘나의 북경문화답사기’라 할 만하다. 하여 『베이징을 걷다』와 겹치는 대목이 없지 않다. 『베이징을 걷다』를 실마리로 ‘세계의 수도’를 보듬어본다.
『베이징을 걷다』에선 “책 본문의 중국 고유명사는 옛 이름이 많이 나오는 관계로, 인명?지명 등을 모두 우리말 한자독음으로 표기”(일러두기)했지만, 『세계의 수도 베이징』은 세월에 구애받지 않고 중국 고유명사의 현지음표기에 매우 충실하다. 때로 센소리를 강조하는 출판사의 독자적인 외래어 표기방식이 약간 거슬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옛 중국인 몇 사람의 이름이 색다르게 들린다. ‘관위’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관우(關羽)이고, ‘쓰마쳰’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이다. ‘두푸’와 ‘리바이’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다. ‘루거우챠오’는 노구교(盧溝橋) 다리를 말한다.
『베이징을 걷다』가 사진 설명글을 통해 연경소팔경(燕京小八景)의 하나인 ‘은정관산(銀錠觀山)’을 언급한다면, 『세계의 수도 베이징』은 연경팔경(燕京八景) 여러 곳을 거론한다. ‘츙다오의 봄 경치(瓊島春陰)’, ‘루거우챠오의 새벽달(盧溝曉月)’, ‘안개비 속의 지먼(○門煙樹)’, ‘위취안의 분출(玉泉○突)’, ‘시산청설(西山晴雪)’ 등이 빼어남을 자랑하는 북경의 풍광이다.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 나타난 중국의 도성 건축 원리에 따라 “천하만물을 담아내고 있는 베이징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축도이자 중심이 되며, 그 안에 거주하는 천자 역시 그에 걸맞은 권위와 위세를 부여받게 된다. 세계의 모든 사물이 그 안에 존재하는 곳, 베이징은 ‘세계 지도’(Mappa Mundi)인 것이다.”
『세계의 수도 베이징』에선 베이징 지명의 시대별 변천사를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10세기 이전: 옌징(燕京), 지청(○城), 유저우(幽州).
요: 옌징(燕京), 뒤에 난징(南京)으로 개칭.
금: 중두(中都).
원: 다두(大都), 또는 칸발릭(Khanbaliq).
명 초기: 베이핑(北平).
명 영락 1년(1403) 이후 현재까지: 베이징(北京).
『베이징을 걷다』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國章)에 천안문 성루를 넣은 건 실용미술가 장정(張○)의 작품이다. 천안문은 봉건황권을 상징하기에 신중국의 국장으로 쓸 수 없다는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천안문은 “제왕 통치의 상징에서 인민민주의 상징으로” 탈바꿈한다.
한편, 베이징대학을 상징하는 교표는 루쉰이 도안했다. “루쉰은 한때 목판화운동을 주도하고 자신의 책표지를 디자인하는 등 미술 방면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가 재직했을 당시 베이징 대학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에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이 많았다. 루쉰이 교표를 도안한 것 역시 그런 미비점을 하나씩 보완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세계의 수도 베이징』, 88-89쪽)
“태화전 중앙에 있는 천자의 의자에는 명?청 두 왕조의 황제 24명이 앉았다.”(『베이징을 걷다』, 34쪽) 청나라 황제 “건륭은 총 재위기간이 60년에 이르는,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장기집권을 한 황제였다. 그가 옥좌에서 물러나 태상제(太上帝)가 된 것도 조부 강희제의 재위기간 61년을 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세계의 수도 베이징』 프롤로그)
『제국의 뒷길을 걷다-김인숙의 북경 이야기』(문학동네, 2008)에선 앞의 내용을 한 데 아우른다. “명조 청조 두 왕조 동안 스물네 명의 황제가 자금성에서 즉위를 하고, 또한 세상을 등졌다. 가장 짧게는 고작 삼십 일 동안 황제 노릇을 한 명나라 태창제부터 육십일 년 동안이나 재위를 한 청나라 강희제까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자금성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품었다.”
덧붙이면, “1616년 후금으로 출발하여, 1636년 대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1644년 마침내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를 이룩한 청나라는 열한 명의 황제를 거쳐, 마지막 12대 황제 푸이가 퇴위를 하는 1912년에 약 삼백여 년의 역사를 끝낸다.” 그러고 보니 명나라(1398-1644)와 청나라가 배출한 황제의 숫자는 각기 12명으로 동률을 이룬다.
소설가 김인숙의 『제국의 뒷길을 걷다』는 중단기 체류기(작가는 두 번에 걸쳐 3년 6개월여를 북경에서 보냈다)의 성격이 있다기보다는 역사의 뒤안길을 산책한다. 작가가 들려주는 권력과 얽힌 무시무시한 일화들은 역설적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그런 일화를 소개하는 건 생략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를 들어본다.
“북경에 자금성을 건설하고 천도를 한 후, 영락제는 궁의 정문인 오문을 밤마다 휘황한 불빛으로 밝혀놓게 했다. 내면의 두려움을 감추는 방법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거나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깊을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많아진다. 관용이거나 허세거나, 애정이거나 폭력이거나 그 상반된 표출은 결국 불안이다.”
자금성을 찾은 작가의 첫인상은 삭막하다. 후궁인 내정(內廷)에 이르기까지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없어서다. 작가가 전하는 궁중비화의 기원과 유래는 하나같이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설’이 다툰다. 고궁에 나무가 없는 까닭 또한 마찬가지여서 “궁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는 설”과 “본질적인 이유는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건천궁으로부터 고궁의 북쪽은 고궁의 내정이라 하여 황제와 황후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외조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광활한 공간과 차가운 돌바닥의 엄숙함을 최대한 나타냈던 반면, 내정은 비교적 작은 공간에 많은 건축물들이 모여 있다. 황제와 황후도 사람인지라,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곳, 그곳에는 비로소 풀과 나무가 보이고, 어화원이라는 정원도 보인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에서 중국어 고유명사의 표기 방식은 절충적이다. 다소 복잡하다. 우선, 사람이름은 “마지막 황제 푸이를 기준으로 푸이와 관련된 인물은 중국어 표기법대로, 푸이 이전의 인물은 우리 한자음대로 표기했다.” 땅이름은 “중국어 표기법과 우리 한자음 표기를 병용했다. 역사와 관련된 인용문 안에서는 인용문 표기에 따랐다.”
건축물, 장소, 거리 이름 등은 기본적으로 우리 한자음대로 표기했으며, 이것들과 인명표기의 일부는 예외가 있다. 중국어 고유명사의 한국어 표기는 현지음과 우리가 읽는 한자음을 섞어 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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