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하긴 해도, 다시 꺼내기 쉽지 않았던 ‘데미안’
명수 : 어제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하는데, 누군가가 『데미안』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거 참 어려운 책이다, 이러니까 다들 ‘맞아, 맞아.’ 하면서 공감하는 분위기였지. 그러고 보니 나도 『데미안』이 그렇게 쉬운 책으로 다가오진 않았던 것 같아.
명수 : 사실 그렇지 뭐. 대개 『데미안』이라는 책을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읽어버리니까. 그놈의 필독도서 리스트가 문제지. 내가 보기엔 그 책은 최소한 고등학교 수준은 돼야 재미가 붙을걸? 아니 아니겠다, 오히려 우리 같은 교육제도라면 대학 초년생쯤 되어야 의미가 가슴에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재석 : 그런 것 같다. 이젠 나도 나이 좀 먹고 식견도 좀 늘었으니 다시 읽어야지, 라고 마음은 먹었거든. 근데 솔직히, 아주 솔직히 이 책 들고 지하철 타는 게 쉽진 않아. 왜 그런 거 있잖아, ‘저 친구는 나이가 몇인데 이제 『데미안』 보냐?’ 뭐 이런 시선들이 있을까 봐 두렵기도 하고 괜히 회사나 학교에서 누가 보고 ‘너 여태 『데미안』도 안 봤냐?’ 소리 듣는 게 두려운 거지.
알을 깨는 투쟁, 그것이 ‘데미안’의 핵심
명수 : 이 친구 보게. 정말 『데미안』을 읽고 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군. 『데미안』의 핵심 주제가 바로 그거 아니었어? 알을 깬다는 거. 아니 네가 그 나이에 『데미안』을 다시 읽든 말든 주변의 시선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 『데미안』에서 이야기하는 그 유명한 쪽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문구는 너를 위해 준비된 거 같다.
재석 : 뭐 정확한 비유 같지는 않지만 여튼 나도 주변의 그런 시선엔 신경을 좀 꺼야 할 거 같긴 하다. 근데 그 문구가 정확히 뭐였더라? 아프락사스였던가…….
명수 : 어… 어디 보자……. (책을 뒤적인다.) 여기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 구절이네. 『데미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지.
재석 : 맞아. 소설 속의 주인공 싱클레어의 삶은 스스로도 이야기하듯, 알 속의 삶이었지. 유복한 가정에서 비싼 사립학교엘 다닐 수 있었던 넉넉한 가정환경과, 성경 중심으로 도덕과 질서의 가족을 꾸려나가는 헌신적인 부모님, 그 룰에 맞추어 사는 천사 같은 누이들이 구성한 싱클레어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정말 아늑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야.
명수 : 그걸 ‘알’이라고, 껍질을 깨야 할 대상이라고 지칭하는 건 싱클레어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데미안이지.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계속 싱클레어의 평온한 삶을 재고해 볼 기회를 던져주는 거 같다.
재석 : 아마 그건 싱클레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던 걸 거야. 싱클레어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편안했지만, 하녀들이 가끔 전해주는 외부 세계의 무서운 현실과 한편으로는 흥분되는 사건들을 접할 수 있었지. 안락하지만 무료했던 가족 안에서의 삶을 벗어나 바깥세상의 놀라운 이야기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계속 커졌던 걸 거야. 그래서 밖에 나가 불량학생 크로머의 무리에 끼어든 걸 테고.
| 헤르만 헤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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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 : 그렇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세상의 살벌함을 온몸으로 이미 깨우치고 있는 크로머야말로 세상의 현실 그 자체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싱클레어는 그 세상의 현실에 끼어들기 위해 해보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꾸며대고, 그 거짓말이 또 거짓말을 낳아서 결국 스스로를 옭아매는 형태를 만들어 버려.
재석 : 나는 그다음의 행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 크로머에 의해 계속 도둑질을 강요당하던 싱클레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해법 대신, 데미안에 의해 크로머로부터 벗어나게 되잖아. 작가의 의도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싱클레어는 가족 안으로 돌아가지 않아.
명수 : 바로 그거야. 싱클레어는 스스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외부 세상을 동경했고, 외부에서 겪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았지. 그건 아까 언급했던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알로 돌아가지 않고, 알 바깥의 냉엄하면서도 새로운 현실에 남는 거 말이야.
재석 :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 싱클레어가 스스로 알을 깼다고만 볼 순 없잖아. 그의 곁에는 적어도 알 깨는 걸 밖에서 도와준 데미안이 있었으니까.
명수 : 그래, 그럼 불완전한 ‘스스로 알 깨는 시도’였다고 해 두자.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 껍질을 깨는 또 하나의 비상
명수 : ‘알 깨는 시도’가 자칫 가족에서 세상으로의 탈출이라고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더욱 조심스럽네. 내가 읽기로는
『데미안』의 알 깨는 행위가 그것만은 아니야.
재석 :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저자도 그랬겠지. 그래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나 십자가의 세 죄인 에피소드일 거고.
명수 : 그래. 데미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싱클레어가 놀랄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던져대지.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대표적이야.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신은 낙인을 찍어버리는데, 데미안의 해석이 남다르지. 오히려 그 낙인이야말로 신념을 지키는 자를 위한 표상이라는 거야.
재석 : 내가 가장 와 닿은 구절은 십자가 이야기였어.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 좌우의 도둑 중에 한 명은 회개했고, 한 명은 끝까지 버텼지. 성경에서는 그 회개한 도둑이 천국에 갔다고 하지만, 데미안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던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신념의 강자라고 생각하더라.
명수 : 그런 데미안의 해석이야말로 또 하나의 알 깨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야. 절대선이 있고, 절대악이 있는 성경과 신화의 세계는 이제 선악이 뒤섞인 현실의 세계에 의해 뒤안길로 밀려나게 되지. ‘누가 감히 회개하지 않은 그 도둑을 절대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 말이야.
재석 : 비슷한 문제제기를 국내 소설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김동리 선생이 쓴
『사반의 십자가』라는 소설이지. 거기 보면 예수 옆에 달렸던 그 회개하지 않은 도적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로마 시대에 유태인 독립을 위해 싸웠던 ‘열심당’이라는 테러독립단체 일원이었지. 오히려 예수에게 항변하는 장면이 나와. 그런 평화주의만으로 유태인의 독립이 이뤄지겠느냐고 끝까지 싸우지. 아마
『데미안』과 같은 문제제기가 아닐까.
명수 : 그래. 좋은 예시 같다. 선과 악을 그렇게 명백하게 가를 수 없고, 각자의 입장과 신념에 따라 서로 다른 절대 가치들이 나타나겠지. 악이 있어야 선이 있는 거니까. 그 상대적인 개념이 그동안은 절대개념으로 존재했었고, 알을 깸으로써 비로소 상대적인 선과 악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다.
그것이 성장이다 : 개인의 성장과, 역사의 성장과……
재석 : 그렇게 성장하는 거군. 주인공 싱클레어는 다만 절대적인 선의 가치라는 가족의 테두리에만 있다가 스스로의 호기심과 외부의 자극에 의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고, 멀리 고등학교에서의 하숙을 통해 방황하기 시작하지. 술도 마시고, 음담패설도 하고, 헛된 자랑질과 허풍들 누구나 한 번쯤 사춘기에 겪었을 법한 그런 방황과 고민들에 휩싸이고, 그 과정 속에서 결국 아프락사스라는 지향점을 찾아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과정이 느껴진다.
명수 :
『데미안』은 물론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기존의 굴레와 관념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로 성장하는 내용을 다루는 게 맞지만, 단순히 개인의 성장만을 담은 것은 아닐 거야.
재석 : 어떤 의미에서?
명수 : 생각해봐. 결국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지. 1차 세계대전은 서구 문명이 만들어낸 최초의 대규모 살상이었는데, 정말 끔찍했던 기록이야. 전투에 참여했던 개개인이 정말 자기 의지로 적을 무찌르고자 달려든 것일까?
재석 : 아니겠지.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단지 군인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은 작을 수밖에…….
명수 : 1차대전의 병사들은 그렇게 좋은 조건과 대우도 아니었고, 거의 강제 징집으로 끌려 나가는 형태였지. 개개인들, 특히 젊은 남자들은 기존의 절대선 중심으로 구성된 질서가 새로운 시대 앞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많은 혼란과 방황을 겪었을 거야. 안 그래도 방황할 나이에 세상도 방황했으니까. 그 혼란 속에서도 가장 큰 혼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라는 상황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냉혹한 세상을 마주하게 된 셈이지. 그러나 총성과 포성 속의 개인은 오히려 자기 안으로 파고들게 돼. 공포가 온 사방을 둘러싼 상황은 결국 고독을 만드니까.
재석 : 그렇지. 그 전쟁으로 부상당한 데미안과 싱클레어도 결국 병동에서 재회하고,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 전쟁이란 참 끔찍한 일이야.
명수 : 나는 글쎄, 그 과정이 바로 사회가 알을 깨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어. 1차대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그렇잖아.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생산력 증대가 시작되고, 식민지 개척으로 유럽의 부는 점점 늘어가고, 그 와중에 전쟁이라는 폭발을 겪는 거지. 전쟁 직전까지 독일 사회는 프로테스탄티즘에 근거한 청교도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였는데, 어찌 보면 싱클레어 개인이 겪었던 상황들―가족이라는 테두리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이 사회와 개인이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거든.
재석 : 그도 그럴 법하네……. 소설이 나온 게 1차대전 직후라고 하니 아주 사회와 무관한 내용만으로 볼 순 없겠지.
명수 : 그렇긴 해도
『데미안』은 확실히 성장 소설에 가까울 거야. 읽는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은 전쟁 같은 뒷부분이 아니라, 어린 시절 처음 도둑질과 거짓말의 세상을 느끼고 한편으론 두려워하고 한편으론 동경했던 혼란스러운 심리잖아.
재석 : 그래.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그 혼란이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한 건 아니었지. 오히려 그런 진통이야말로 성장통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이 엄마 뱃속처럼 안락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야.
데미안이 롤모델이 되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
명수 : 그래도 데미안이 지금 시대의 롤모델이 되긴 어려울 것 같다. 결말부에 보면 너무 좀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내용이 관념화되고 있어.
재석 : 나도 그 부분은 참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많았어. 친구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다든가, 그러면서 그녀를 베아트리체 같은 이상향으로 설정한다든가 하는…….
명수 : 그 시대의 풍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뭔가 격랑처럼 몰아치는 감정과 이상향을 세우는 느낌은 1800년대의 괴테가 보여줬던 독일 문학의 흐름과 어느 정도 닿아있다는 느낌을 받거든. 꼭 지금 시대에 고전이라고 해서
『데미안』의 모든 걸 받아 안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재석 : 고전도 잘 골라 읽고 소화시켜야 제 맛이겠군. 그래도 그 성장의 공통적인 고통과 그를 넘어서려는 자아의 노력만큼은 고전을 고전으로 남게 하는 맛이 살아있는 것 같다.
명수 : 그게 오늘 우리의 대화가 고전 리뷰로까지 올라가는 이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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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